안녕하십니까?
보람되고 훌륭하신 일을 하심에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부산에 거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며, 불의에 타협치 않는 고결한 선조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정공(동강선생) 14세손 입니다.
자주 거론된 이야기지만 학봉선조님께서 통신사로 다녀 오신후의 조정보고 상황을 우리 문중에는 어떻게 정리
하고 계신지요? 10여년전 검제 종택에도 방문했고 문집도 사왔습니다만 아직 일반인은 식민사관의 교육때문인지
굉장히 부정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1) 어릴적 배운대로 당파싸움으로 거짓보고를 하셨는지?
2) 상황파악이 미진하여 사실 곧바로 침략할줄 모르셨는지?
3) 아니면 충분히 자세히 보고후 민심동요를 우려하신 내용도 함께 보고했으나 역사가 서인 세상으로 본말을 전도시켜
와전되어 왔는지?
4) 또다른 ...
저는 지금도 우리문중의성향이나 청계대조님의 교훈이나, 퇴계의 훈도나 모든걸 봐도 청렴, 정의로우시며
임금에게도 직언을 회피치 않으셨고, 임란후 온몸바쳐 싸우다 순국하셨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폄하하고 있음이
안따까와 글을 올립니다.
두고두고 자신있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설명할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아래의 글은 통신사로 가시게 된 싯점에서 부터 임란 발발 후 초유사로 임명 되신 싯점까지의 간략한 글입니다.
그 이후의 글은 생략하였으며 참고로 성웅화 된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과의 서신교환 기록도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좌측 부메뉴 아래 학봉문집베너를 클릭하시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축년 9월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예빈시정禮賓寺正이 되시니 이때 일본서 중[僧]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통신사通信使를 요청하려고 동평관東平館에 오랫동안 나와 있었는데 학봉선생께서 이들과 접촉이 많으셨다.
그들을 예禮로 대하니 이국 사람이 다 공경하고 심복하였다. 조정에서 통신사로 갈 분을 고르고 있었는데 모두 그것을 모면하려고 마음을 썼으나, 학봉선생께서는 가족들에게 “내가 아마도 갈 것 같으니 미리 행장을 준비함이 좋을 것이라.” 하시더니, 과연 부사副使로 선임選任되셨다. 친구분들이 위로하려 많이 모여드니, 부군은 “임금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릴 수 없으니 풍도風濤의 험함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다만 내 재질이 전대專對의 중임重任을 감당할까 두려워한다.” 하셨다.
경인년(1590) 봄에 상사 황윤길黃允吉·서장관 허성許筬과 어전御前에 숙배肅拜하고 서울을 떠나 4월 29일에 다대포多大浦에서 배로 떠나셨다. 배가 막 떠나자 큰 바람이 불어 닥쳐 닻줄이 끊어지고 돛대가 부러지니 타고 있는 사람이 모두 통곡하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으나, 학봉부사께서는 홀로 단정히 앉으셔서 시를 읊고 계셨다. 뒤에 바람이 자고 배가 섬에 닿을 때, 누가 묻기를 “배가 기울어지는데 어찌 두려운 빛이 없으십니까?” 하니, 이르시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는 것이니 오직 고요히 기다릴 뿐이라.” 하시고, 「천풍해도사天風海濤辭」를 지어서 회포를 푸셨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니 일본에서 마중 나오는 선위사宣慰使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황상사黃上使는 우리 조정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었으니 그들의 마중을 기다릴 것 없이 떠나감이 옳다 하고 그대로 가려하므로, 학봉부사께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왜常倭가 오고가고 하는데도 반드시 마중을 하였는데, 하물며 국가를 대표하는 통신사가 가는데 어찌 마중하는 사절이 없겠는가? 그들도 필경 관원을 보냈으나 바닷길이 험하여 중간에 막혀 있음이니 만약 우리가 급히 가기만 한다면 우리 자체의 행지가 무겁지 못할 뿐 아니라 저들이 다음부터는 조선사신에게는 영호迎護할 선위사宣慰使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전례前例로 삼아서 영영 보내지 아니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황윤길상사는 고집하고 기어이 떠나갔는데 그 후 과연 평행장平行長이 선위사宣慰使로 마중 와서 일기도一岐島에서 풍랑風浪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상·부사上·副使간에 첫 번째로 의견이 서로 갈라진 일이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여 평의지平義智가 국분사國分寺라는 절에서 잔치를 열고 초청하므로 일행이 함께 갔더니, 현소가 미리 와서 영접하였고, 의지義智는 뒤에 오는데 그대로 가마를 타고 바로 섬돌 위까지 올라와서 내리니, 부군이 그놈의 무례함에 노하셔서 교례交禮하지 말고 일행이 다 같이 사관으로 돌아가자고 제의하셨으나, 황상사黃上使는 “오랑캐를 탓할 것이 없다.” 하면서 듣지 아니하였다.
학봉부사는 “오랑캐이므로 책망할 것 없다 하나 그들도 상하上下의 분의가 있을 터인데 어찌 감히 그리하겠는가. 만약 그대로 그들과 있으면 이것은 사신의 체모를 잃을 뿐만 아니라, 주상主上을 욕보이는 일이니 그럴 수 없다.” 하시고, 곧 일어나서 사관으로 돌아오시니 서장관 허성許筬도 따라 나오고 말았다.
평의지가 괴상히 여겨 통역 진세운陳世雲에게 물으니, 세운이 “그 어른들은 병환이 나셔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다음날 왜인倭人들을 불러놓고 진세운에게 곤장을 치면서 수죄하시기를 “이 섬이 대대로 우리나라에 우로雨露 같은 은혜를 받고 내려와서 우리의 동쪽 번신藩臣이 되고 있다. 사신이 이곳에 오셨다면 저들이 몸소 나와서 일행을 맞아 호위할 것이고, 서로 대할 때에도 앞에 와서 꿇어앉아 재배하여야 마땅하거늘 수일 동안에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예로 대우하였더니 그만 교만하여져서 가마를 타고 마루까지 올라왔으니, 그놈이 만약 우리가 중간에 나간 것을 묻거늘 네가 마땅히 사실대로 말하고 전례典禮를 들어서 가르쳐 행동을 고치도록 할 것이 당연하거늘 도리어 탈기하여 거짓말로 둔사를 꾸며대어 일행의 체모를 망치게 하고 오히려 그놈에게 잘 보이려 하느냐? 네놈은 용서할 수 없다.” 하셨다. 도선주都船主가 그 말을 듣고 사죄하기를 “우리 부관副官(도주島主 아들을 부관이라 한다)이 나이 어려서 예법을 몰라 그리 되었으니 사신님께서는 관대히 용서하소서.” 하였다. 학봉부사가 “이 섬은 우리나라를 섬겨서 번신藩臣과 같은 것인데 부관은 도주의 아들로서 제가 어찌 감히 이같이 무례한가?” 하셨다.
평의지는 참회懺悔를 이기지 못하여 그만 가마 메고 온 놈에게 죄를 돌려 그놈들을 해변으로 끌고 가서 목을 베었다. 그렇게 하고 와서 사죄하고 그 후부터는 백보百步 밖에서 추종군들을 다 물리치고 제 혼자 걸어서 대문으로 들어와서 정성을 다하여 절을 올리고 들어왔다. 학봉부사께서 “충성과 순한 마음으로 잘하라”고 권면하시어 보냈다. 그 후부터는 그들이 무릎을 꿇고 지성으로 복사하여 감히 조금도 게을리 못하였다.
그런데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말하기를 “학봉부사께서 통역 진세운陳世雲을 매 때리고, 또 의지義智가 교군을 죽여서 사죄케 함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는 은혜와 신의로써 회유할 뿐이지 어찌 체모만 가지고 논하겠는가?” 하였으며, 상사황윤길도 “오랑캐들은 작은 예절 따위로써 교계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그런 일로 다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봉부사는 “옛날에 공도보孔道輔란 사람이 요遼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요나라의 광대들이 공자孔子놀이를 하므로 공도보가 분연히 그 자리에서 뛰어나와 다시는 잔치를 받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번 의지의 가마타고 온 것이 요나라 광대놀이에 비할 것인가? 사신이 당하는 욕은 대국인 우리나라가 당하는 욕이니 어찌 우리가 먼저 겁을 먹고 굴욕을 당하면서 교계하지 아니하겠는가? 처음부터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면 앞으로 왜왕의 궁전에 가서 이보다 더 큰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으면 그만 황겁하고 실조함이 또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셨다.
6월에 일기도一岐島로 가는 길에 귀봉龜峯에서 바람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상사上使는 날마다 통역 진세운을 의지義智에게 보내어 빨리 가자고 간청하니 평의지는 제 방에 들어박혀 전연 갈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또 황윤길상사와 허성서장관은 진세운으로 선주船主의 말꼬리에 따라 다니면서 가기를 애걸하듯 하게 하고 있으니 그 광경을 보신 학봉부사가 이르시기를 “진세운이 보는 욕은 곧 우리 사신이 보는 욕이다. 배에는 격왜格倭들이 있으니 그들에 명하여 선도先導케 하면 우리대로 갈 수 있는데 하필 우리가 그들에게 명령이나 받으려 다닐 것이 있는가? 만약 사신이 먼저 떠난다면 저들이 따라 오느라고 여가를 못 할 것이 아닌가?” 하셨으나 학봉부사의 말은 끝내 듣지 않고 많은 창피를 당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가니 과연 선위사宣慰使와 국왕사國王使가 며칠 앞서 와서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왜인들이 쌀을 섬에 넣어서 가져다주니 상사와 서장관이 몸소 나가서 받고 있었다. 이것을 본 학봉부사는 “그것을 어찌 우리가 받고 있는가?” 하시고 간여하시지 않으셨다. 다음날은 상사와 서장관이 왜사(선위사와 국왕사)를 우리가 먼저 청하여 보자고 하므로, 학봉부사는 “저들이 주인이니 저들이 먼저 와서 보일 것이지 우리가 보기를 청할 것이 무엇 있나?” 하였으나, 상사와 서장관이 기어이 듣지 않고 보러가니 왜사가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아서 그대로 사관으로 돌아왔다.
7월에 계빈堺濱에 가니 서해도西海道에 산다는 토왜土倭가 예궤禮饋로 식물을 가져 왔는데 그냥 무심코 받아 다 나누어 먹고 나니 그 속에 글이 씌어 있기를 “조선국 사신이 내조來朝(조회하러 왔다는 말)”라고 한 종이가 나왔다. 학봉부사께서 곧 상사와 서장관에 이르시기를 “왜인놈이 우리를 내조來朝라고 하였으니 나라의 욕됨이 심하다. 그것도 살파지 못하고 받았으니 장차 어찌 하겠는가?” 하시니, 상사는 답하기를 “오랑캐의 말은 무지망작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또다시 무엇을 교계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학봉부사는 “오랑캐는 무지하다고 하나 사신인 우리도 무지한가? 옳은 사람의 행동에는, 받고 주는 일에 일호라도 방과할 수가 없다. 오직 의리에 닿는가를 볼 것이니 지금 우리가 나라를 욕되게 하는 식물食物을 받았으니 의리에 비추어서 어찌되는 것인가? 저들이 가져온 식물은 저자에 나가면 다 살 수 있는 것이라 하니 지금이라도 그 수량대로 사서 돌리고서 ‘너희들 예단禮單에 쓰여진 말이 잘못되어 있으니 우리가 알고는 받을 수가 없으므로 곧 대신 물건으로 돌리는 것이니 너희 주인에게 사유를 알리라!’ 하면 의리도 바르고 말도 엄하여 이 모욕을 씻을 것이 아닌가?” 하셨다.
황윤길상사와 허성서장관이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부군의 의논을 여러 번 듣고서 곧 물건을 사서 그 사유를 말하여 돌렸더니, 왜인들이 와서 “우리는 소인小人이므로 한문 글을 잘 몰라서 남에게 써 달라고 손을 빌려서 이렇게 잘못된 것이니 우리 주인主人의 아는 바가 아니므로 사신님들은 고쳐 쓴 것을 양해하시고 그대로 받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도선주都船主가 또 사람을 보내서 말하기를 “저들이 가나문(일본문자)으로 써 온 것을 내가 번역하느라고 잘못 한 것이니 허물은 나에게 있으니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사죄하였다. 상사와 서장관이 “저들이 저렇게 실토하면서 사죄하고 도선주도 그처럼 사과하니 그대로 받아주자”고 하므로 학봉부사는 아직도 마음이 불쾌하시나 마지못하시어 그대로 따르셨다.
또 왜국倭國의 수도首都에 들어간 후에 황윤길상사와 허성서장관은 왜놈의 가마타기를 좋아하였다. 그 가마가 낮고 좁아서 갓도 벗고 관복도 벗고 늘 편복便服으로 가마를 타고 구경 다니기가 일쑤이나, 학봉부사께서는 반드시 관대를 정제히 하시고 행동하셨고 처음 국도國都에 들어갈 때에도 황상사와 허서장관은 역시 편복으로 들어갔는데 학봉부사는 “봉명사신奉命使臣이 예복禮服함은 왕명을 존중히 하기 때문이니 본국에 있어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남의 나라에 와서 어찌 예복을 하지 않겠는가?” 하시나, 황윤길상사는 “예복은 저들이 공경히 마중할 때에나 입는 것인데 지금은 왜인이 아직 공식公式으로 예접禮接하는 의식儀式도 없고 관백關白도 여행 중이므로 사신이 예복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에 학봉부사는 “의관을 정제히 함은 사군자士君子의 몸 가지는 법인데 하물며 봉명한 사신이 타국에 와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사신이 와서 지영祗迎을 받을 때 뿐 아니라 도중에서도 역시 예복만 하고 있었으니 어찌 관백이 있고 없음이 관계 되겠는가?”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국도에 들어갈 때 부군만 홀로 금관에 홍포로 예복을 갖추셨더니 길가에 나와 마중하는 수많은 사녀士女들과 귀족 부녀 고관들까지도 모두 학봉부사副使행차가 지날 때면 손을 공손히 얹고서 경의를 표하고 그 외는 보기를 가소롭게 여겼다. 이때에 와서는 허성서장관도 비로소 후회하는 기색이 보였다.
9월에 총견원摠見院이란 별장 같은 사관에 체재하시면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여행 중이므로 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평의지平義智가 와서 영악伶樂(우리나라에서 데리고 간 아악雅樂단을 말한다)을 빌려서 보여달라고 청하니 일행이 다 허가하려 하였으나, 학봉부사는 “왕명을 받들고 온 신하가 타국에 와서 왕명을 전달하지 못하면 이것이 마치 처녀가 시집가지 못한 것과 같은 처지이니, 시집도 가지 아니한 처녀가 노래를 팔아 가면서 남을 즐겁게 한다면 모두들 그를 천하게 보지 아니하겠는가? 왕명王命은 초개같이 버려두고 영악伶樂을 국도 중에 내놓아 관중의 놀잇거리가 되고 있다면 처녀가 노래 파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물며 상인常人의 마음이란 항심恒心이 없는 것인데 영인伶人들이 악기를 안고서 밤을 새워 가면서 도시 한복판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어찌 또 무슨 사고나 나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하시고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또 학봉부사께서는 허서장許書狀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관백關白과 사신이 만나는 절차節次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는데 서장관은 “마땅히 우리 사신이 뜰 아래에서 절을 할 것이다.” 하였고, 학봉부사는 “마땅히 마루에 올라가서 기둥을 사이에 두고서 절하는 것이 옳다.” 하셨다. 이래서 며칠을 두고서 결정을 못하였다.
학봉부사는 “일본은 우리나라와 대등한 나라라고 한다면 거기에 위황僞皇(가칭假稱 천황天皇이라는 것)이 제일가는 임금이고 관백은 위황의 대신大臣이다. 관백이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실정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국왕國王으로 잘못 알고서 대등한 지위로 대접하였으나 이것은 우리 국왕이 이웃나라 신하와 대등한 지위로 한 것이니 국가의 체면으로 욕됨이 크지 않겠는가? 우리가 지금 실지로 이곳에 와서 관백이 국왕이 아닌 것을 알았으니, 예例에 의거하여 상견하는 예禮를 정할 것이며 앞서 왔다간 사신들이 다 마루 위에서 절하였는데 우리만 뜰 아래에서 절하여 나라를 욕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셨다. 서장관은 “수길秀吉이 벼슬 칭호는 관백이나 실지로는 국왕과 다름없으며 우리 국서國書에도 수길을 국왕으로 하였고 또 우리 임금이 어휘御諱를 바로 쓰셨으니 우리 전하殿下께서 대등한 지위로 대정하였는데 신하가 된 우리가 어찌 항거하여 아래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공경恭敬을 폐하겠는가?” 하였다. 학봉부사는 “우리 국서에 어휘를 쓰시고 수길을 국왕이라고 하신 것은 일본의 실정을 잘 모르셨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국서는 고칠 수가 없으나 사신의 상견례相見禮는 마땅히 옛날대로 할 것이지 어찌 정하배庭下拜를 이번에 처음으로 시작해서 전에 없던 치욕을 취하겠는가?” 하셨다. 서장관은 “그렇게 하려 해서 저들이 순순히 따르면 다행이나 만약 일본 사신도 우리나라에 왔을 대 대궐大闕 뜰아래에서 절하였는데 귀국 사신은 어찌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면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 하니, 학봉부사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없는 법이니 일본에는 위황僞皇이 임금으로 있다면 관백은 아무리 귀한 지위라도 신하가 분명하다. 우리 사신이 위황을 본다면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禮이나 관백을 보는데 뜰 아래에서 절함은 예가 아니니, 지금 관백이 만약 정하배庭下拜를 받는다면 이것은 자기가 위황僞皇으로 자처함이니 신하된 의리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뜻으로 간곡히 효유하여 알려주면 그들도 반드시 잘 깨닫고 굴복할 것이 아니겠는가? 또 군자는 무슨 일이나 처음 하는 일은 잘 살펴야 하는 법, 이번에 두 나라 국교가 백년 만에 처음 시작되었으니, 이번이 역시 시작하는 것인데 만약 이번에 우리가 전에 없던 예를 만들어 놓으면 뒤에 오는 사신들이 팔을 걷고서 말하기를 뜰 아래 절하는 치욕恥辱은 어느 해 아무 통신사들이 와서 시작한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닌가?” 하셨다.
그리고 학봉부사께서 다음날 다시 연석宴席에서 현소玄蘇에게 묻기를 “너의 나라 제전諸殿들이 관백을 볼 때에 어디서 절하는가?” 하니, 현소가 “제전들은 관백과 같이 다 천황의 신하인데 그대로 맞절하지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물으시기를 “전에 우리 사신이 너의 나라에 와서 영외楹外에서 절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어찌하겠나?” 하시니, 현소의 말이 “저의 나라에서 접대하는 전례典禮가 있으니 관백이 돌아오면 적당히 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학봉부사께서 또 도선주都船主에게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와서 상견례相見禮할 때에는 어찌했는가?” 하니 마루에 올라가서 절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하배庭下拜는 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알으시고, 현소가 부군의 뜻을 관백에게 전하여 영외楹外에서 절하기로 정하였고 뒤에도 영구히 이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풍신수길秀吉이 경도京都에 돌아온 뒤에 평의지平義智가 찾아와서 “내일은 관백이 천황궁天皇宮에 조회하러 가게 되니 사신들은 길가에 나와서 관광하시라”고 청하였다. 학봉부사께서 답하시기를 “화려한 행렬을 보았으면 좋겠으나 우리는 아직 왕명을 전하지 못했으니 의리상 사삿일로 나갈 수가 없다.” 하였다. 평의지가 또 와서 청하니허성 서장관은 허락하였으나, 학봉부사는 역시 전대로 거절하였더니, 또 왜승倭僧이 와서 협박조로 말하기를 “이번에 관광하라는 것은 실로 관백의 의사인데 만약 나오지 않으면 사신 일행은 어느 때 돌아갈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일행이 큰 근심을 하여 아마도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처럼 돌아가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서로 모여 앉아 근심으로 날을 보내는 못난 자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서장관은 일찍 수레를 타고 관광하러 나가더니 그 날은 관백의 행차가 중지되어 관광도 못하고 돌아왔고, 다음 날 또 이른 아침에 나가더니 또 보지 못하고 허행만 하였고 세 번째 가서 겨우 보고 왔다 하므로, 학봉부사께서 편지를 보내어 서장관을 절책하셨다.
이때 풍신수길이 국도에 돌아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국서를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는데 일행이 모두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떤 자가 와서 말하기를 “세상일이란 모를 일이 많으니 관백의 측근자에 민부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이라는 자는 다 권세가 높은 자들이니 그들과 잘 교제해서 환심을 사게 되면 사신들이 일을 빨리 마치고 빨리 돌아갈 길이 트일 것이다”고 하여, 상사와 서장관들은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뇌물이라도 후히 주고서 일을 하려 하였다.
학봉부사께서는 “불가하다. 왕명을 받들고 온 사신이 비록 예禮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왕명에 욕이 되거늘 하물며 뇌물을 써가면서 일을 한단 말인가?” 하시니, 상사와 서장관은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반드시 예폐禮幣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우리가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므로 손님의 도리로서 예폐로 주는 것이니 구차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학봉부사는 “빈주 사이에 예폐란 당연히 주는 시기가 있는 것이니 국서도 전하지 못하고 먼저 사사로 예폐를 준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니다.”라고 하시니, 상사와 서장관은 “이렇게 사례私禮로 하는 것도 국서를 전하기 위함이니 나쁠 것이 없지 않는가?” 하므로, 학봉부사는 “우리는 당당한 대국의 사절로서 성주聖主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와서 위덕을 선양하여 그들로 우리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치욕을 참아가면서 그들에게 미태를 부려서 왕명을 전하려 하는가? 왕명을 전하기가 늦어진 것은 비록 사신이 무량한 탓이기도 하지만 저들이 궁전 역사가 덜되어 못 받는다 하였으니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니 사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신된 우리로서는 마땅히 예의로 알아듣도록 반복개유反復開諭할 뿐이고, 일호라도 비굴한 일이 있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는 죄는 씻을 수 없이 클 것이다.” 하시니, 상사와 서장관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뒤에 풍신수길秀吉이 국서를 받고서 4일이 지나고서 사람을 시켜서 이르기를 “서계書契는 곧 만들어 보낼 것이니 사신들은 우선 계빈堺濱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였다. 상사上使 이하로 일행은 모두 호랑이의 아가리에서 벗어났다고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다투어 짐을 꾸려가지고 떠날 준비를 하였으나, 학봉부사는 “우리가 국서 회답을 받지 아니하고 떠난다는 것은 우리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닌데 할 수 있는 일인가? 옛날부터 사신이 일도 끝내지 아니하고 국도國都를 나가는 자가 어디 있었는가? 하물며 계빈堺濱이란 곳은 여기서 100리 밖에 있으니 가령 서로 물어 볼 일이 있어도 그 사이를 어떻게 왕복하겠는가? 또 나도 비록 보잘 것이 없으나 같이 차견差遣된 사신인데 서로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이렇게 떠나가자는 것이 어찌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동사同事하는 의리義理이겠는가?” 하셨으나, 그들은 도망가기가 바빠서 앞장 선 자는 벌써 멀리 가고 있으니 학봉부사 혼자서 머물러 계실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계빈堺濱에 와서 보름이 지난 뒤에 풍신수길의 서계書契가 비로소 왔는데 그 내용이 여간 망패妄悖하지 아니하고, 또 전하殿下는 각하閣下라고 쓰고 우리가 보낸 예폐禮幣는 방물方物이라고 하였고, 또 본문 중에는 “바로 명明나라에 쳐들어가려 하는데 귀국이 먼저 달려와서 입조入朝하였다”는 등 해괴망측한 구절이 있었다. 이걸 보신 학봉부사께서는 크게 놀라시어 의리에 의거하여 물리치시고 현소玄蘇에게 글을 보내셔서 “만약 이따위 말을 고치지 아니하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따름이니 의리상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셨다. 현소도 할 말이 없으므로 각하閣下·방물方物·영납領納같은 어구語句만을 고쳐 보내고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려는 차에 먼저 달려와서 입조入朝했다는 말은 일본이 명 나라에 조회하러 가겠다는 뜻이라”고 괴변怪辯으로 핑계하면서 끝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상사와 서장관은 현소의 말을 그대로 믿고 다시 더 알아 볼 것이 없다 하므로 학봉부사는 정색하시어 크게 꾸짖으시고 다시 현소玄蘇에게 조목조목 들어서 편지를 써서 보내셨는데, 그 내용은 일본이 명나라를 쳐서 영토를 먹겠다는 것과 우리나라에서 사신 보낸 것이 저희들에게 뒷날을 염려해서 간 것이란 것, 입조入朝라는 어구에 대한 괴변으로 핑계한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것, 그 외에 여러 가지 위협스러운 어구를 지적하여 즉각 고치게 하고 끝으로 두 나라의 교의와 서로 신의를 지켜갈 것을 꾸짖고 효유하셨으니, 마치 어진 스승이 못된 제자를 훈계하듯 간곡히 하셨다.
현소도 그 편지를 보고 강직하신 학봉부사의 정신에 크게 탄식하고 사례하였으나, 그의 능력으로는 풍신수길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인즉 종시 괴변으로 돌리면서 고쳐 주지 아니하니 황윤길상사와 허성서장관은 그래도 몇 자나마 고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더 어쩌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봉부사께서는 며칠을 두고 무수히 논쟁하시면서 기어이 고쳐가지고 가려 하셨으나 황윤길상사와 허성서장관은 “그대로 가면 조정에서 적당히 할 것이라”고 우기면서 떠나기로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학봉부사께서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셔서 다시 현소와 선위사宣慰使였던 평행장平行長에게 각기 편지를 쓰시고 명나라에 대한 도리와 두 나라의 교린관계交隣關係와 대의에 의한 도리를 순순히 효유하여 보내려 하니 일행이 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하여 백방으로 편지를 못하게 방해하였다. 현소玄蘇는 학봉부사의 말씀이 당연함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여러 번 성의로 달래면서 나갔다면 끝에는 완전히 고칠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일을 최후로 결정하는 권한은 황윤길상사上使에게 있었고, 또 허성서장관이 황윤길상사의 뜻대로 따라하는 판이니 학봉부사가 써 놓은 편지를 보내려 하시다가 상사上使와 서장관이 중간에서 극력 저지하여 끝내 못 보내시고 분울한 심정을 참을 수 없으시어 써 놓은 편지를 바닷물에 던지시고 시를 지으셨는데, “물속의 고기와 용龍도 응당 글자를 보면 나의 마음을 알리라水底魚龍應識字”는 글귀가 있었으니 그때의 심경을 추상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종진宗陳이라는 왜승倭僧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