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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거니와 봄이 오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을 몰라하네.
또 직산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가 염려마소.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들 있으라 하소.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제나 나을까 할까마는 기필 못하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그지 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1592년 당시 경상도초유사로 파견나가 있던 김성일이 아내에게 보낸 언문편지다. 멋을 부리듯 길게 늘려 후려 쓴 글씨체며, 잘못 써 고친 자국 등이 어쩐지 슬쩍 웃음을 짓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석이 버섯 2근, 석류 20개, 조기 2마리를 함께 보냈다고 하니 역시 가족을 생각하는 아버지, 혹은 남편의 마음이란 수백 년 전 사대부나 오늘날의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흔히 김성일이라고 하면 임진왜란의 원흉처럼 여겨져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역사상으로도 1591년 정사 황윤길과 함께 부사로서 일본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전쟁의 가능성을 역설한 황윤길과는 달리 전쟁의 가능성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니 마치 조선이 임진년 아무런 대비 없이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양 여겨지기 쉬운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일 스스로 나중에 밝혔거니와 김성일이 그리 주장한 것은 전쟁의 위험보다 민심의 이반이 더 걱정되었던 때문이다. 사실 지금이라고 당장 어디서 쳐들어온다고 장사 잘 하는 사람 불러다 동원훈련 시키고,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사람 데려다 진지 만든다 무기 정비한다 시켜대면 결코 좋은 소리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그리 확고한 인식이 없던 당시의 사람들이다. 임진년 당시나 후대의 기록을 보더라도 백성들이 외적을 맞아 맞서 싸우기는 커녕 오히려 환영하더라는 탄식과, 그 원인으로 전쟁을 대비한다고 과도하게 백성들을 군비로 내몬 때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고 보면 김성일의 걱정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황윤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정을 징집한다, 성을 다시 고쳐쌓는다, 무기를 수리한다, 전쟁을 대비하는 데 백성들을 동원하여 몰아세운 결과 원성과 불만은 하늘을 찔렀고, 결국 대비한다고 하면서도 마음만 앞섰지 제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김성일이 다시 상소를 올리니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이반이고, 민심을 잃으면 성과 무기가 있어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내치에 신경쓰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파가 다른 서포 김만중조차 임진년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과도하게 백성들을 전쟁준비에 내몰지 않아 민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정도로 김성일의 이같은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단, 바로 이듬해 일본군이 쳐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물론 그렇다고 아주 전쟁준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북변에서 명성을 쌓은 이일, 이순신, 원균 등의 장수들이 남도에 배치되어 있었고, 명종대 새로 건조가 시작된 판옥선도 원래 목표한 대로 맹선을 완전히 대체하고 있었다. 제승방략에 의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도 나름대로 정비되어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부산과 동래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성을 다시 고쳐 쌓은 덕분이었으니 아주 준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러한 준비된 것들을 사용하여 적을 막아야 할 지휘부가 알아서 적전도주를 해 버렸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의 침략규모를 오산하고 있던 터에, 상상치 못한 대군이 밀려 오니 당장 경상 수군을 맡고 있던 박홍과 원균이 배와 물자를 모조리 불사르거나 자침시키고 도망쳐버렸고, 밀양에서는 기껏 병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우려는데 상황이 불리하다고 경상우감사 김수가 알아서 적전도주를 해 버리는 바람에 병사들이 흩어져 버려 경상병사로 있던 이일마저 어쩔 수 없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군 지휘부의 대응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느냐면, 제승방략에 따라 집결지에 집결했던 조선 수군 병사가 지휘관이 도망가는 바람에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더라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나올 정도다. 밀양의 경우에도 제승방략에 의해 경상우도의 병력이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그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경상우감사 김수가 도망침에 따라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국 해산되고 말았던 것 아니던가. 그런 상황이라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이 선조로부터 원수검을 받아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에는 병사를 모으려 해도 오합지졸 수천을 확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두 차례 돌격으로 고니시군에게 큰 위협을 가했다니 그 이름이 아주 허튼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렇게 모든 방어선이 무너지고 왕인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치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김성일은 다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경상도로 파견된다. 일본군의 지배 아래 들어간 백성들을 위무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장차 경상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장차 일본군을 몰아낼 대비를 하라고 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김성일은 그러한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해낸다.

먼저 김성일은 일본군을 피해 이미 적지가 되어 버린 경상도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민원을 들어주고, 왕명을 전달하고, 의병장 가운데 유력한 자를 골라 지방관이 없는 고을에 지방관에 임명하는 등 이들 지역에서의 행정력을 복구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럼으로써 일본의 점령 아래 있던 경상도에서도 조선 조정은 계속해서 지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내정은 물론 군사에도 힘을 써 군량미며 장정들을 모으고 - 이듬해인 계사년 정월 김성일은 15000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 곽재우나 정인홍 등의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장을 임명하여 이들을 통합하여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병들이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정상을 찾아가는 관군과 함께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양자 사이를 조율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관직도 없던 곽재우가 경상감사 김수와 대립했을 때에도 곽재우에게 피해가 없도록 중간에서 중재를 한 것도 바로 김성일이었다.

결국 임진년 당해, 그러니까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고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조선은 다시 일본의 점령 아래 있던 상주와 고령 등 경상우도 거의 전부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자 경상도 가기를 돌아다니며 동분서주했던 김성일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그가 아니었다면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아 경상우도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김성일에게는 아직 더 큰 싸움이 남아 있었다. 주연 김시민, 조연 곽재우, 김면, 정인홍, 엑스트라 일본의 듣보잡들이 참여하는, 김성일에 의해 프로듀스된 임진왜란 전사에 빛나는 가장 위대한 승리가. 바로 그 이름도 찬란한 제 1차 진주성 싸움이다. 호남을 공략하여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불안불안한 전황을 일거에 바꾸어 보려는 일본군의 의도가 진주성으로 집중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싸움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진주목사로는 이경이 있었는데, 다른 지방관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일본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지리산으로 도망가 숨어버린 뒤였다. 진주성에 도착해 몇 번을 불러도 이경이 응해 돌아오지 않자 김성일은 이경의 밑에 있다가 부름에 응해 달려온 김시민에게 진주목사의 대행을 맡도록 하니, 이로써 진주성 싸움이라고 하는 작품을 위한 주연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후 김시민은 진주목사를 대신해 진주성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장 김면의 요청으로 거창으로 진출했다가 금산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정식으로 진주목사로 임명됨으로써 주연 자리를 확정지었다.

주연이 있으면 조연도 필요했다. 김성일은 일본군의 공격목표가 진주성인 것이 확실시되자 싸움이 있기 며칠 전 우선 경상감사 김수의 지시로 거창에서 김면과 함께 작전하던 김시민을 진주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각지의 의병들에게로 사람을 보내 안팎에서 호응을 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곽재우와 김면, 정인홍 등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의병장은 모두 그의 요청에 응해 자신의 측근에게 병사를 딸려보내 진주성 외곽에서 싸움을 지원하도록 하니, 여기에 최강, 이달, 조응도, 정유경 등 각지의 의병과 관군이 달려와 진주성의 싸움을 도왔다. 안에서는 김시민, 밖에서는 각지의 의병과 관군들, 결코 숫적으로도 뒤지지 않는 병력이 성에 의지해, 성밖에서 산개해서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서로 호응하여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니, 바야흐로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물론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싸움의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일본의 수뇌부도 김성일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바이지만, 이로써 일본군은 조선과의 전쟁에서 지상군에 있어서까지 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영남에서조차 제대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력을 기울인 공세가 실패함으로써 선조를 쫓아 승승장구하며 평안도로 함경도로 진격해 갔던 일본군 주력조차 더 이상 주도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당초에 목표했던 조선의 완전점령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일본군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성일이 위의 편지를 보낸 것은 바로 그러한 싸움이 있던 해 겨울이었다. 진주성 싸움이 끝나고 목사 김시민이 전사한 빈 자리를 메우며 진주성을 지키는 한편으로 이미 회복한 경상우도에서의 행정 및 군사작전 전반을 지휘하던 도중 이 편지를 보내고 4개월 뒤 과로가 병이 되어 영영 일어나지 못할 몸이 된다. 향녕 58세. 말하자면 저 편지는 김성일이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이처럼 임진년 경상도초유사로서 김성일이 보인 활약은 이순신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았다면 김성일은 경상도에 대한 조정의 지배력을 회복하고, 의병과 관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경상우도를 회복하는 한편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전략적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조선에서의 전술적, 전략적 주도권을 빼앗아 왔다. 만일 김성일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찾는 것도,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한양의 일본군 주력을 물리치는 것도, 끝내 일본군으로 하여금 조선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한참 뒤로 미루어 지거나 아니면 영영 불가능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 김성일의 역할과 활약은 결정적이었다.

김성일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는 이듬해 같은 진주성에서 재차 진주성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맞아 도원수 권율이 결국 진주성을 포기하고 후퇴할 것을 결정한 데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설욕전을 위한 일본군의 준비 역시 치밀하기도 했지만 행주산성에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일구어냈던 권율마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 그 싸움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싸움으로 만들어내었으니, 그 지략과 용기는 가히 하늘에 닿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진왜란이 있기 전해 통신사로 갔다 돌아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 했던,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죽일 놈이 되어 그나마 이룬 공적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후손들로부터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비록 한때의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어 그리 한 것이었고,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린 것도 그의 책임만은 아니었으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알아주는 이조차 별로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김성일과 비교되곤 하는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나고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일찌감치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입으로 강경한 주장을 한다고 용감한 것도 아니고, 입으로 충성을 말한다고 충성스러운 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말과 행동이 온건하고 조심스럽다고 비겁하고 무책임한 것도 아님도.

아무튼 그 고되고 바쁜 와중에도 가족을 걱정해 편지를 쓰고 어려운 가운데 음식을 바리바리 싸 보내는 그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나라 위해 애쓰다 그예 다시 가족을 보지 못하고 못 오실 길을 떠나셨으니. 떠나시는 그 길이나, 보내는 그 마음이나 얼마나 애닲고 서러웠을까. 하지만 또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도 있는 것이니. 감사한 마음조차 어쩐지 송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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