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後期


김만휴(金萬烋)
   字(자)는 士逸(사일), 號(호)는 魯魯齋(노노재), 1660년(현종 1) 生員試(생원시)에 1등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退溪(퇴계) 선생께서 「心經釋疑(심경석의)」 책을 완성치 못하고 타계하여 이 책을 手錄成編(수록편성)하여 두었는데, 조정에서   이 책을 眞本(진본)으로 채택하여 국가에서 간행하여 내고 朝庭廟堂(조정묘당)에서 향리에서는 학문으로 最高禮遇(최고예우)인  順陵?奉(순능참봉)과 問學持平(문학지평)을 除授(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저서:溪山記善錄(계산기선록), 周易質疑(주역질의), 四書質疑(사서질의), 心經釋疑(심경석의), 魯魯齋文集(노노재문집).


김세흠(金世欽)
    1649(인조 27)∼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천약(天若), 호는 칠탄(七灘). 안동출신. 아버지는 주부 삼기(參基)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3년 홍문록·도당록에 올랐다. 부수찬·지평 등을 역임하고 1698년 교리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1707년 수찬으로 상소가 지나쳐 장벌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관작을 삭탈당하고 흥양(興陽)에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나서는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하였다.

김중남(金重南)
    1636(인조 14)∼1698(숙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덕휘(德輝), 호는 경재(敬齋). 아버지는 참봉 시숙(是#소34)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로 윤우(潤雨)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651년(효종 2)에 교서관저작·박사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참례도찰방(參禮道察訪)·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통훈대부로 승진하여 단성현감을 지냈으며, 1680년 봉사(奉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82년 자인현감을 지냈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어 단성과 자인에 아직도 그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그는 집에서는 효친과 애경으로, 관직에서는 충군과 애민으로 일관된 도학정신으로 교화정치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재집》 2권 1책이 있다.

김학배(金學培)
    1628(인조 6)∼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아버지는 암(#암30)이다.  김시온(金是#온07)의 문인으로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은 송준길(宋浚吉)이 유학을 강론할 때  이를 듣고 명쾌한 견식을 펴서 송준길의 칭찬을 크게 받은 바 있다.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예조좌랑에까지 이르렀다.
1668년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이 새로 설치되자 이단하(李端夏)·김만중(金萬重)·박신(朴紳)·홍도(洪覩) 등과 함께 교정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금옹문집》이 있다.


김세호(世鎬
    1652(효종 3)~1722(경종 2), 조선의 학자.  자는
京伯(경백), 호는 龜州(구주), 益基(익기)의 아들. 1681년(숙종 7) 司馬試(사마시)를 거쳐 1690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벼슬이 藝文館 奉敎(예문관봉교)에 이르렀다. 숙종이 講筵(강연) 때 周易(주역)의 文義(문의)를 물은 일이 있었으나 아무도 풀이하지 못하자 불려나가 정연하게 풀이했고,  金石物(금석물)에 대해서도 당시의 권위자였다.
 
김일진(金日晉)
    1659(효종 10)∼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진삼(晉三), 호는 우금당(友琴堂).  할아버지는 지평 지남(地南), 아버지는 통덕랑 팔주(八柱)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숙하였으며, 특히 변려체(騈驪體)에 재능이 뛰어났다. 1692년(숙종 18) 상경하여 폐비되어 있던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예를 표하고, 과거에서의 부정을 비롯한 폐정들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에 의하여 무산으로 유배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그뒤로 교유를 끊고 거문고와 책을 벗하며 살았다.

김여건(汝鍵)
    1660(현종 1)~1697(숙종23) 본관 의성. 자 천개(天開). 안동 출생.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 ·지평이 되고, 1693년 수찬(修撰)에 올랐다.90년 정언 때 세자책봉 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돈령부영사 조사석(趙師錫)의 불손함을 탄핵 ·유배시켰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저서에 《북천록(北遷錄)》과 잡저(雜著)가 있다.

김성구[金聲久]
    자는 덕휴, 호는 팔오헌, 본관은 의성, 1641년에 태어나 1707년에 서거하였다. 662(현종3년)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 전적,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1년)지평에 이어 거창현감 등을 역임. 1679년 예론과 인사 등의 문제로 노론일파와 대립하다가 제주의 정의현감으로  좌천하였다. 그 뒤 대사성, 좌승지, 여주목사, 홍주목사 등을 지냈다.
1693년 강원도 관찰사, 병조참지 등을 역임하던 중 이듬해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봉화 해저로 물러가 14년 동안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유고에는 팔오헌 문집이 있다. 1678년 수찬으로 있을 당시 請應天彌災疏를 올려 宮家折受의 폐와 경비절약 및 贓吏를 엄벌해야 한다고 논한 뒤 군왕이 성덕을  닦고 수령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乞歸養仍陳時弊疏도 같은 해 올린 것으로 특히 儲蓄과 경비절약문제를 강조했다. 各 道의 공납을 특파해서 백성들이 입고 있는폐해 중 다만 얼마라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朝家의 경비를 줄여 國用에 충당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內帑제도는 왕의 사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偏黨의 제거와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실정을 바로잡으라고 제청했다.
南遷錄은 1679년 제주 정의현감으로 좌천된 때부터 다시 상경할 때까지의 각종 사건 및 개인에 관한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것으로 예론이나 인사문제 등을 둘러싼 노론과 남인간의 권력싸움 등이 주로 지적되어 있다. 각종 時弊와 제주도의 情狀을 논한 상소나 狀啓 등도 당시의 사회, 경제 및 정치상황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김명석(金命錫) 
    1675(숙종 1)~1762(영조38), 조선의 학자.   자는 汝修(여수), 호는 雨溪(우계), 德誠(덕성)의 손자. 李玄逸(이현일) 및 그 아들 李栽(이재)의 문인. 문학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詩(시)는 독보적 존재라고까지 평가되었다. 1577년(영조31) 老人職(노인직)으로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성탁(金聖鐸)
    1684(숙종 10)∼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아버지는 태중(泰重)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호군 여만(如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인근의 각광을 받았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핵02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또한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에 유배되었고, 그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16권이 있다.

김낙행(金樂行) 
    1708(숙종34)~1766(영조42) 조선의 학자.   초명은 晋行(진행), 자는 艮夫(간부), 초자는 退甫(퇴보) 호는 九思堂(구사당), 校理(교리) 聲澤(성택)의 아들. 경북 安東(안동) 출신. 아버지의 명으로 李栽(이재)의 문하에서 《近思錄(근사록)》 《心經(심경)》 등을 연구, 1737년(영조13) 弘文館(홍문관)에 직중인 아버지가 무고를 받은 이재를 변호하려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아버지를 따라갔다.  전후 7년의 귀양살이 끝에 아버지가 光陽(광양) 配所(배소)에서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냈다.

김시준(金時準)
    조선의 학자. 자는 平仲(평중), 호는 依仁齋(의인재), 泰成(태성)의 아들.  李縡(이재)의 문하에서 奇才(기재)로 알려졌고, 生員試(생원시)·進士試(진사시)에 합격, 1751년(영조27) 成均館(성균관) 유생으로서 良役法(양역법)을 고치려고 하는 조정의 물음에 대해 《周禮(주례)》의 田制(전제)를 인용하면서 井田法(정전법)의 시행을 청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영조의 특명으로 《經綸補解(경륜보해)》를 지어 바쳤고, 그 후 3차례나 經筵(경연)에 나갔다.


김한동(金翰東) 
    1740(영조16)~1811(순조11) 조선의 문신. 자는 翰之(한지), 호는 臥隱(와은), 佐郞(좌랑) 景泌(경필)의 아들.  1763년(영조39) 司馬試(사마시)에 합격, 1781년(정조 5) 敬陵 ?奉(경릉참봉)을 지내고, 1789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을과)로 급제, 典籍(전적)·持平(지평) 正言(정언)·副校理(부교리)를 거쳐, 1797년 전라도 관찰사, 이듬해 대사간, 이어 承旨(승지)가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敦寧府 都正(돈녕부도정)을 지내고, 이듬해 천주교도로 몰려 明川(명천)에 유배, 1805년 放還(방환)되었다.


김    굉[金     ]
   
1739(영조 15)∼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자야(子野), 호는 구와(龜窩). 아버지는 생원 광헌(光憲)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73년(영조 49) 사마시를 거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1년에 스승 이상정이 죽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 1787년 전적을 거쳐 지평·정언을 역임하였고 단양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재직시에는 서리(胥吏)를 엄단하고 위정염간(爲政廉簡)하여 군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에 남달리 뛰어났고 필법이 높아 능히 한 체제를 이룰 만하였다

김희주(金熙周)
    1760(영조 36)∼1830(순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호는 갈천(葛川).  내성 망도리(乃城望道里)출생.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시동(始東)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효술(孝述)의 딸이다. 처음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를 거쳐, 1795년 단풍정친시(丹楓亭親試)에 합격한 뒤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병조와 예조의 좌랑과 정랑 등을 지냈다.   또한 영해부사·안주목사·우승지·형조참판·한성좌윤·사간원대사간·함길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 홍문관교리 때에는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고, 1800년에는 교리에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군수(安岳郡守)로서 교육제도가 부실하여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수백냥을 투자하여 강소(講所)를 신축, 군내의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만년에 재산(才山)의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덕봉(德峰)아래에는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서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김희락(金熙洛)
    1761(영조 37)∼1803(순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명(淑明).  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증직된 두동(斗東)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로 세원(世源)의 딸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 몇 달 뒤에 도산(陶山) 응제(應製)에서 장원하였다.
 1794년 규장각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혀 그의 족형인 희주(熙周)와 함께 궁중을 출입하며 여러가지 과제(課製)와 《사서》 조대(條對)에서 자주 장원하였다.  1794년에서 1800년 사이에 삼조(三曹)의 낭관(郎官)과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지내는 동안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말년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자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정조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많은 강제문과 응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편수관으로서 《해동인물고 海東人物攷》·《영남명신록》·《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고식 故寔》 5권 3책이 있다.〈李鍾德〉

김건수(金建銖)
    1790(정조 14)∼1854(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립(公立), 호는 만회(晩悔).   아버지는 호군(護軍) 재인(在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종해(宗海)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830년(순조 30)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장악원판사·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密陽浦)에 육로로 수송해온 세미(稅米)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김해부사·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만회헌문집》이 있다.

김규서(金奎瑞)
    179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국서(國瑞). 아버지는 유성(維城)이다.  1827년(순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왕세자가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들을 시험하였는데 강거수(講居首)로 유생의 대표였다. 승문원부정자로 출발하여 지평· 정언·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헌납·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가 죽었을 때는 섭통례(攝通禮)를 맡아보았다. 주로 청직(淸職)을 지내며 공사간에 소홀함이 없었고, 경사(經史)에도 밝았다고 한다.

김낙풍(金樂豊)
    1786(정조 10)∼1834(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적여(績汝), 호는 삼락재(三樂齋). 아버지는 성(城), 어머니는 장학호(張學浩)의 딸이다. 1814년(순조 14)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평안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온릉령(溫陵令)을 거쳐 예조좌랑과 호조·병조정랑을 역임하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822년 장령이 되었다가, 같은해 종부시정 겸 편수관이 되어 선원보(璿源譜)를 찬수한 공으로 1823년 병조참의에 올랐으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24년 돈녕부도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김장생(金長生)의 예론을 열심히 따랐다.

김진화(金鎭華)
    1793(정조 17)∼1850(철종 1).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성관(聖觀),호는 탄와(坦窩). 아버지는 현감 종수(宗壽)이다.   1828년(순조 28)에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자문감봉사(紫門監奉事)를 거쳐 한성부판관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나가 아산현령  ·진산현령·무장현령을 거쳐 능주목사에 이르렀는데,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 1834년 아산현령으로 있을 때는 진휼(賑글)을 잘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하여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김하종(金夏鐘)
   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의성. 자는 대여(大汝), 호는 유당(#유78堂)·유재(#유78齋) 또는 설호산인(雪壺山人). 화원으로 첨사(僉使)를 지낸 득신(得臣)의 아들이며, 건종(建鐘)의 동생이다. 그 역시 화원이었으며 벼슬은 첨사를 지냈다.  아버지를 이어 인물화에 뛰어나 1830년 순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도사(圖寫)를 비롯하여, 1852년과 1861년의 철종어진 도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851년에는 다른 화원들과 함께 〈철종철인후가례도감의궤도 哲宗哲仁后嘉禮都監儀軌圖〉를 제작한 바 있다.  유작으로 전하는 인물화는 알려져 있지 않고, 1875년경에 그린 《해산첩 海山帖》이 전해오고 있다. 이 화첩에 실려 있는 그림들은 금강산과 설악산 등 영동명승(嶺東名勝)을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로서, 김홍도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필치와 형태 등은 다소 과장되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김진형(金鎭衡)
    1801(순조 1)∼1865(고종 2)
    본관 의성. 자 덕수(德錘). 호 겸와(謙窩) ·청사(晴蓑).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校理)가 되었다.  1853년 이조판서 서기순(徐箕淳)이 배공당리(背公黨利)를 꾀한다 하여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남종순(南鍾順)에게 몰려 명천 (明川)에 귀양갔다. 그때 배소(配所)에서의 생활과 귀양간 내력을 기록한 《북천가(北遷歌)》를 지었다.
다시 풀려나와  185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시폐(時弊)를 상소하였으며, 상소문 구절 속에 조대비(趙大妃)의 비위를 거슬린 대목이 있어 전라도 고금도 (古今島)에 유배되었다. 《북천가(北遷歌)》 조선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이 지은 유배가사(流配歌辭).1853년(철종4) 작자가 교리(校理)로 있을 때 이조판서 서기순(徐箕淳)을 탄핵한 사건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  
당시 유배생활의 고락과 인정, 그리고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는 길에서의 견문 등을 읊은 가사이다. 모두 1,029구에 이르는 장편으로서, 가사의 형식을 빌린 기행문이라 하겠으며,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연행가(燕行歌)〉와 더불어 기행가사 문학의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마옥 역 중화(中火)하고, 마천령 다달으니, 안팎재 육십리라, 하날에 바쳐 있고, 공중에 걸린 길은, 참바같이 서렸고나...

김진우(金鎭右)
   1805(순조 5)∼1861(철종 1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국원(國元).  안동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기수(驥壽)이다.  18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원릉별검(元陵別檢)·성균관전적 등 여러 내외관직을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여 아무리 상사라도 잘못이 있으면 굴함이 없이 직언하는 성격 때문에 상사들이 그를 꺼렸다. 차차 벼슬생활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가 유유 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흥락(金興洛)
    1827(순조 27)∼1899. 한말의 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안동출신.  김성일(金誠一)의 주손(胄孫). 아버지는 능주목사(綾州牧使) 진화(鎭華)이며, 어머니는 이원상(李元祥)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초록하여 《제훈집설요람 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李滉)·이상정(李象靖)·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가정과 사우로부터 보고 들은 바를 모아서 《곤학록 困學錄》을 편성하고, 또한 〈초학잠 初學箴〉·〈외천설〉을 지었다.
1850년(철종 1) 친명(親命)으로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였다.  1851년 《학봉집 鶴峯集》을 중간하고, 그 이듬해에는 《가례의 家禮儀》를 편성하였다.   1854년 〈졸수요결 拙守要訣〉과 〈입학오도 入學五圖〉 및 〈주일설 主一說〉을 지었다. 〈입학오도〉에서는 학문의 대요가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의 네가지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였다.   
1867년(고종 4) 어사 박선수(朴瑄壽)가 유일(遺逸)로서 천거하여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경상도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1878년 집 서쪽 복병산(伏屛山)에 서산재(西山齋)를 지었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아니하였다.   1889년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을 회교(會校)하였다. 1894년 7월에는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랐다. 이해 8월 영해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한말 영남의 대유학자로 이돈우(李敦禹), 권연하(權璉夏)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자· 의병·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 였다.
사후 소계서당(邵溪書堂)에 입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산집》 16책(본집 13책, 속집 3책)이 있다.  이밖에 그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문인 705인이 등록된 《보인계첩 輔仁#계29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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