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廟配享功臣과 文廟配享家門의 位相


조선 시대(朝鮮時代)를 주도(主導)한 양반관료(兩班官僚)들은 기본적(基本的)으로 유학(儒學)을 신봉(信奉)하던 학자(學者)들이었다. 이들은 중국(中國)의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공자(孔子)가 집대성(集大成)하고 남송대(南宋代)의 주희(朱喜)가 재 정리(再整理)한 유학(儒學) 즉 주자학(朱子學)을 종교적(宗敎的) 정열(情熱)로 신봉(信奉)했다.

 

조선 시대 문묘배향공신을 배출(輩出)한 가문(家門)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尊敬)받았으며 국가(國家)에서는 기회(機會)가 되는 대로 그 후손(後孫)들을 녹용(錄用 특채特採)하였다.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전통사회(傳統社會)에서는 가문의 최고의 영예였다.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논의(論議) 과정(過程)을 보면 정밀(精密)하면서도 치열(熾烈)했다는 사실(事實)을 알 수 있다. 
 

고려 말(高麗末)의 삼은(三隱) 가운데 다른 두 분이나 안동 김씨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경주 이씨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나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推仰) 받았던 해주 최씨의 최 충(崔 沖), 퇴계(退溪) 이 황(李 滉)과 양대(兩大) 축(軸)을 이루었던 창녕 조씨의 남명(南冥) 조 식(曺 植) 같은 이도 문묘에 배향될만한 인물이지만 들지 못했다.

 

우리가 일반적(一般的)으로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이야기 할 때 대제학(大提學 문형文衡), 정승(政丞)과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한 이가 몇 분인가를 앞세운다. 그리고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한 분이나 문집(文集)을 낸 어른이 얼마나 되는가도 평가(評價)의 중요(重要)한 잣대가 된다. 여기까지는 대체(大體)로 서로 승복(承服)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직계(直系)이든 방계(傍系)이든 문묘에 배향된 어른이 있느냐에 이르면 그 위상이 저절로 판가름 날수밖에 없다. 
 

조선 왕조(朝鮮王朝)의 왕족(王族)인 전주 이씨조차도 문묘에 배향된 이가 없다. 삼대 정승(三代政丞) 집인 달성 서씨, 시대(時代)마다 인물(人物)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최고의 국반(國班)으로 자긍(自矜)하는 연안 이씨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없다. 의성 김씨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풍산 류씨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물론 그 이후(以後)의 인동 장씨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같은 학자들 모두가 문묘배향의 논의까지 있었지만 한 분도 여기에 들지 못했다.

 

특히,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 중 동방오현(東方五賢)은 문묘에 배향된 조선의 대표적(代表的) 성리학자(性理學者) 다섯 분을 말하는데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 황(退溪 李 滉) 선생(先生)을 지칭(指稱)한다. 동방오현의 위치(位置)는 율곡(栗谷) 이 이(李 珥)도 자리하지 못할 만큼의 영광(榮光)된 자리로서 가문의 영광이 아닐수 없는 가장 영예로운 권위를 부여받은 존귀(尊貴)한 자리이다.

 

★ 家格, 門閥 즉 家門의 位相을 順序대로 말한다면,

 

   첫째, 문묘배향 가문(文廟配享 家門)
   둘째, 대제학
(大提學, 문형文衡)을 배출(輩出)한 가문(家門)

   셋째, 정승(政丞)이나 판서(判書), 청백리(淸白吏)를 배출(輩出)한 家門

   넷째, 충신(忠臣)이나  자(孝子), 효부(孝婦), 열녀(烈女)를 배출(輩出)한

   가문(家門)순서(順序)라 할 수 있겠다.

           

1. 우리나라 문묘배향(文廟配享) 동방오현 가문(東方五賢 家門)

 

   서흥 김씨(瑞興金氏)  문경공(文敬公)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헌공(文獻公) 일 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한양 조씨(漢陽趙氏)  문정공(文正公) 정 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여주 이씨(驪州李氏)  문원공(文元公) 회 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진성 이씨(眞城李氏)  문순공(文純公) 퇴 계   이   황(退溪    李   滉) 
등,

   다섯 가문(家門)이다.

 

2. 우리나라 문묘배향(文廟配享) 동국십팔현 가문(東國十八賢 家門)

 

   경주 설씨(慶州薛氏)  홍유후(弘儒侯) 빙월당 설   총(氷月堂 薛   聰)
   경주 최씨(慶州崔氏)  문창후(文昌候) 고 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순흥 안씨(順興安氏)  문성공(文成公) 회 헌   안   유(晦軒    安   裕)

   연일 정씨(延日鄭氏)  문충공(文忠公) 포 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서흥 김씨(瑞興金氏)  문경공(文敬公)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하동 정씨(河東鄭氏)  문헌공(文獻公) 일 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한양 조씨(漢陽趙氏)  문정공(文正公) 정 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여주 이씨(驪州李氏)  문원공(文元公) 회 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진성 이씨(眞城李氏)  문순공(文純公) 퇴 계   이   황(退溪    李   滉)

   울산 김씨(蔚山金氏)  문정공(文正公) 하 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덕수 이씨(德水李氏)  문성공(文成公) 율 곡   이   이(栗谷    李   珥)
   창녕 성씨(昌寧成氏)  문간공(文簡公) 우 계   성   혼(牛溪    成   渾)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원공(文元公) 사 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문경공(文敬公) 신독재 김   집(愼獨齋 金   集)
   배천 조씨(白川趙氏)  문열공(文烈公) 중 봉   조   헌(重峰    趙   憲)
   은진 송씨(恩津宋氏)  문정공(文正公) 우 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문정공(文正公)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반남 박씨(潘南朴氏)  문순공(文純公) 현 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등,

   열 여섯 가문(家門)이다.

 

3. 조선조(朝鮮朝) 삼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을 輩出한 家門 

 

   연안 이씨(延安李氏)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전주 이씨(全州李氏)  밀성군파(密城君派)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달성 서씨(達城徐氏)  약봉  서 성(藥峰 徐 星)  등, 네 가문(家門)이다.

   특히, 약봉 서 성(藥峰 徐 星)손(子孫) 중에는 삼대 정승(三代政丞),  

   삼대 대제학(三大提學), 삼대 대학자(三代大學者)가 배출(輩出)되었다.


4. 조선조(朝鮮朝) 삼대 정승(三代政丞)을 배출(輩出)한 가문(家門) 

   청송 심씨(靑松沈氏)  4세(世)  심덕부(沈德符) : 좌의정(左議政)

                                  5세(世)  심   온(沈   溫)  : 영의정(領議政)

                                  6세(世)  심   회(沈   澮)  : 영의정(領議政)

   청풍 김씨(淸風金氏)  김   구(金   構) : 육조판서(六曹判書), 우의정(右議政)

                                 김재로(金在魯) : 삼정승(政丞)

                                 김치인(金致仁) : 삼정승(政丞)

   달성 서씨(達城徐氏)  종태(徐宗泰) : 영의정(領議政)

                                 서명균(命均) :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

                                 서지수(志修) : 영의정(領議政)

 

5. 청백리(淸白吏) 6以上을 배출(輩出)한 씨족(氏族)


   전주 이씨(全州李氏)   파평 윤씨(坡平尹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연안 이씨(延安李氏)   남양 홍씨(南陽洪氏)   전의 이씨(全義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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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廟配享과  書 院의  橫 暴>>


조선 중종中宗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 세운 취지는 사습士習을 바로 하고 성인聖人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명현거유名賢巨儒을 추모하고 그 유덕遺德·유훈 遺訓을 계승하는데 있었고, 따라서 유학儒學의 경전經典을 강론 講論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조선후기에 와서 서원書院은 원회院會·도회都會라 하여 술 마시고 공론空論을 일삼는 터전이 되었으며, 따라서 당파黨派나 따지는 소굴로 바뀌어졌다.

서생書生들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국가에서 내린 노비奴婢와 토지土地의 혜택에 힘입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면서 성리학 性理學을 들먹이며 시詩나 읊고 잡된 책·문집文集이나 간행刊行하며 선비 행세를 하려 하였으며, 가문家閥과 사문師門의 세력을 배경으로  벼슬을 얻는 구실로 삼았다.

 

이들은 원보院保라는 비공식의 세금稅金을 서원書院의 건축建築· 개수改修·제향祭享이라는 구실로 관官·민民에게 마구 거두어들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일반 상민常民은 물론 지방관리地方官吏까지 눈알을 빼는 등 서슴없이 사형私刑을 가하기도 하였다.

 

                         ▶ 문묘(文廟) 배향(配享)


문묘文廟는 원래 공자孔子를 모신 곳에 도학道學이 높은 학자 學者를 종사從祀하게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된 학자는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김인후 金麟厚·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 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조헌趙憲·김장생 金長生·깁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 朴世采로 이들을 18현賢이라 부른다.

 

이 종사從祀에 참여는 바로 도학유자道學儒者로서 공식적인 인정認定을 받는 것이 되며, 이 문묘文廟는 대설위大設位인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한 중설위中設位·소설위小設位가 있었다.

묘정廟廷 배향配享은 공로功勞있는 신하臣下를 종묘제사宗廟 祭祀에 부제副祭 하는 것으로서, 각 왕王의 묘정廟廷에는 명신名臣  ·공신功臣 등을 배향配享하여 그들의 공적功績을 기렸다.

 

서원書院 배향配享은 지방에 따라 도학道學이 높은 학자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 아래 문인文人의 순차順次와 도학道學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배향配享하였다. 이 종사從祀 또는 배향配享 문제는 명분名分을 좋아하는 유림儒林에 의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학통學統에 따라 자기 스승을 참여하게 하려는 다툼질로 번져졌으며, 서원書院에 주향主享·종향從享은 갖가지 문제들로 많은 싸움을 유발시켰는데, 이런 분란 紛亂은 바로 이 배향配享 으로 문벌門閥과 학벌學閥을 빛내서 큰 힘을 과시하자는 데서 나왔고, 또 지나치게 형식과 명분名分을 중시한데서 비롯되었다.


                 ▶ 서원(書院)의 횡포(橫暴)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서원書院 유생儒生들의 횡포橫暴는 극심하여 지방행정권 침해·행정질서 문란을 초래하였다.

이중에서도 가장 횡포橫暴가 심했던 서원書院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 이었다.

 

화양서원華陽書院은 노론老論의 우두머리 우암尤庵 송시열 宋時烈을 제향祭享한 서원이며,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황제 皇帝 신종神宗·휘종徽宗을 모시기 위해 우암尤庵의 유지 遺志에 의해 숙종肅宗 3년(1703년)제자 권상하權尙夏가 세운 것으로서, 만동묘萬東廟 라는 이름은 선조宣祖 임금의 어필인 “만절필동 萬折必東”의 처음과 끝 글자를 취하여 지은 것이다.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는 노론老論의 집권을 배경 으로 이곳 서생書生들은 주호酒戶라는 지정음식점을 만들어 일종의 유흥장遊興場처럼 만들었고 “서원書院에 제수전 祭需錢이 필요하니 ㅇ월 ㅇ일까지 얼마를 봉납奉納 하라”는 고지서에 묵인墨印을 찍어 화양묵패華陽墨牌를 군郡·현縣 및 상민常民 에게 발송하였다.

 

이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받은 자는 관官·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田畓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는데, 만일 불응하면 잡혀가서 공갈·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는데,   지방관리들은 어떤 횡포를 부려도 그대로 당하기만 하였다.

 

이런 폐단으로 관官·민民의 원성怨聲이 심해지자 철종哲宗 9년(1858년) 7월에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임금의 명命이 내려졌다.

 

그 후 철종哲宗 13년(1862년) 3월 이곳 유생儒生들이 원우 院宇를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挾雜輩들과 전라도 지방  까지 가서 재물財物을 거두어들이는 횡포橫暴를 일으키자 다시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금지시켰다.

 

고종高宗 2년(1865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한양 대보단 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향祭享하므로 별도로 만동묘 에서 제향祭享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였다.

 

고종高宗 5년(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전국에 서원  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려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등 47개소의 서원書院만 남겨두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이에 유생儒生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연일 항의집회抗議 集會를 하고 통문通文을 돌리면서 반대하였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자가 있다면 공자孔子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書院은 이 나라 선유先儒를 제사祭祀 지내는 곳인데도 그곳이 도적盜賊의 소굴이 됨이랴 ” 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그 철폐撤廢를 단행하였다.

 

                                           <資料-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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