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에도 장날(5일장)이 있었다.
이날은 시골 사람들이 장작 한 지게 혹은 잡곡 한 두 말을 팔아 술도 마시고, 고등어 한 손지게 목발에 달아 오는 것도 한 때의 행복이었다.

경북 안동시 남후면 무릉리 소재 산모퉁이를 지나는 신작로 옆에 효자각이 있다. 이 비각에 얽힌 사연인즉 겨울철 장날에 아버지가 장에 갔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어린 아들이 산모퉁이까지 아버지 마중을 갔던 것이다.

이 모퉁이는 겨울에는 바람이 모질고 세차게 부는 곳이다.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기다리다 지친 아들은 잠이 들었다. 술 취한 아버지는 밤늦게 돌아와 그냥 자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찾아 헤매던 중 산모퉁이 오목한 곳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의 사연이 전해지자 동네사람들이 이 자리에 비를 세워 효자각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40여년 전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효자비 건립 시비 문제로 경북 교육계의 지대한 관심사로 대두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효 개념의 분기점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 풍습에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처가에 세배 들이러 간다. 문경 산골 어느 가정에서 대보름이 되어 열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처가에 가서 술도 실컷 마시고 풍성한 대접을 받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자고 가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오는 도중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눈바람과 함께 기온이 급강하하였다. 산비탈 눈길을 걷기엔 술 취한 사람으로서는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도중에 그만 쓰러지게 되었다.

한기에 떠는 아버지 모습을 본 아들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아버지께 덮었지만 결국 부자는 얼어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가 널리 퍼져 경북교육청에서 아들의 효성을 영원히 기리고자 효자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 때 일부에서 반대하여 결국 세우지 못하였다.
반대 이유는 오늘의 교육은, 창의력이 결핍된 폐쇄 교육으로 학생을 지도한다는 것은 시대 역행적 교육방식이라 하였으며 효의 참뜻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는 것이 근본"이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눈보라치고 술 취한 아버지가 쓰러졌으면 아들은 동네로 뛰어내려와 동네사람들과 협력 아버지를 산길에서 구하는 것이 오늘의 교육이라 주장하였다.
부자가 함께 죽어 어머니의 한 맺힌 서러움의 쓰라린 가슴을 무슨 방법으로 지을 수 있겠는가.

효의 개념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차원에서 재정립할 시대라고 그들은 역설하였다. 일시적이라 하겠지만 그 당시 반대를 한 사람들은 반대론자란 이름으로 괴로움과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야 그들이 진정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판단하는 시대적 요구이자 선각자라고 재인식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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