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대첩과 학봉 김성일의 역할

 

이 글은 경상대학교 부설 경남문화연구소가 2009년 1월 중에 3회에 걸쳐 ‘역사도시 진주의 문화’라는 큰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 세미나의 첫 회 주제로서 『임진왜란과 김성일』의 저자인 발표자가 1월 14일에 경상대학교 남명학관에서 발표하였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발표자 : 김 명 준

들어가는 말

임진년 진주대첩은 417년 전 이곳 진주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와서 진주대첩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 주어진 것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주대첩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실 여러 분들 앞에서 진주대첩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외람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 중에 여러 분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거나 의문이 있는 경우에는 질의 토론 시간에 말씀하여 주시면 성심껏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제를 말씀드리는 중에 여러 훌륭한 선인들을 자주 언급하여야 하는데, 그분들의 휘자(諱字)를 존칭 없이 쓰더라도 학술 대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양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순신과 김성일

 

저는 오늘 이야기를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8월의 기사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 하고자 합니다. 그 기사의 내용을 제가 한 번 읽겠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서 서해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 등은 진주의 관요(關要 국방상의 요새지)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김산(金山)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하려 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湖西)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의 방어에 힘입어 군수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 때의 장사(壯士)들이 방어(防禦)하여 지킨 공로가 또한 대단하다 하겠다.”

 

서해 입구에 웅거하였던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는 정말 어린 아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제가 부연하여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과 공적이 나란히 기술되어 있는 김성일에 대하여는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물론 역사를 전공하신 분들이나 이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일반 사람들은 김성일 하면 ‘아! 임진왜란 전에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와서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왕에게 보고를 하여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게 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김성일에 대하여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왜 위에서처럼 이순신과 동격으로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오늘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서는 먼저 몇 가지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선 위의 인용문에 “김성일이 진주의 관요를 지키고 있었다” 고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성일은 임진왜란 전에는 진주와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진주의 관요를 지키게 된 경위를 우선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그가 경상우병사의 발령을 받은 일, 경상도 초유사가 된 일, 경상우도 감사가 되어 다시 이곳에 와서 진주를 중심한 경상우도에서 도합 만 1년간 활동한 일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김성일은 문관이었습니다. 그런 김성일이 왜적의 침입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때인 임진년 4월 11일, 곧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에 적의 침입을 막으라고 무관의 자리인 병사로, 그것도 적이 쳐들어오는 쪽의 최 일선을 담당하는 경상우병사로 발령을 받은 것은 그가 통신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임진왜란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

 

김성일은 1590년에 조선통신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습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가기 전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보기로 하겠습니다. 1587년부터 2년간 대마도는 세 번이나 일본의 가짜 외교 사절을 조선에 보내어 ‘일본의 왕이 바뀌었으니, 이웃 나라 조선은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것을 축하하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일본의 왕이 바뀐 것이 아니라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이 부하 명지광수(明智光秀)의 습격을 받고 자결한 다음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관백이 된 것을 왕이 바뀐 것이라고 조선을 속였던 것입니다. 대마도주는 1586년 풍신수길로부터 조선왕을 입조(入朝)시키라는 엄명을 받고 고민 중에 있다가 풍신수길의 명령을 변조하여 일본의 국왕이 바뀐 것을 축하하여 달라고 조선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입조란 다른 나라의 신하국가가 되어서 그 나라를 섬기고 조공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이 일본의 신하국가가 되고 조공도 바치게 하라는 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렇게 변조된 대마도의 요청을 조선은 ‘바닷길에 어둡다’ 등의 이유로 거절하다가 한 가지 조건을 걸어 보았습니다. 1587년 2월에 전라도 흥양, 곧 지금의 고흥 등지에 침입하여 우리나라 관군 1천여 명을 살상하고 그 일대를 약탈한 손죽도(損竹島) 사건을 저지르게 한 왜구 등을 데려오면 통신사 파견을 검토하여 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대마도 측이 왜구를 인도한 사화동(沙火童)과 왜구 3명, 조선인 포로 등을 데려왔습니다. 이들을 인수받은 조선은 전쟁에 이긴 것과 마찬가지의 국가 차원의 승전 행사를 치렀고, 국왕 선조는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하였습니다. 국왕으로서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전쟁을 승리한 것과 같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니,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그래서 왜의 사신 종의지(宗義智)에게는 상을 주고 잔치도 베풀어 주었습니다.

 

통신사 귀국 보고와 왜국의 침입에 대한 김성일의 또 다른 보고

 

일본 측의 3차에 걸친 사신 파견 요청과 조선 반민 및 조선인 포로 송환 등의 계속적인 ‘선린우호’ 조치에 조선은 마지못하여 일본 왕이 바뀐 것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 등이었습니다. 1590년 4월 말에 일본으로 떠났던 이들 사절단이 1591년 1월 말경 부산으로 귀국하여 3월 왕에게 귀국보고를 하였습니다.

 

귀국보고에서 상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김성일의 보고는 ‘절대로 침입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한 것으로 변조되어 두고두고 비판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국의 침입 가능성에 대한 김성일의 보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과 『국조보감』 각각의 윤 3월조와 『징비록』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왕은 “비변사(備邊司)의 청에 따라 황윤길, 김성일 등에게 당시 서울 동평관에 와 있던 일본의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가서 만나, 왜국의 사정을 조용히 묻고 그 나라의 상황을 갈고리로 파헤치듯이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왜의 사신) 현소(玄蘇)가 김성일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지 못하였다. 풍신수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만약 조선이 먼저 중국에 알려 조공을 할 수 있게 하여 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하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이다” 하니, 김성일 등이 대의로 헤아려 볼 때 옳지 못하다고 타일렀다. 그러자 현소가 다시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하니, 사세 상 당연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귀국 보고 한 달 정도 후에 “일본의 상황을 갈고리로 파헤치듯이 자세히 살펴보라”는 왕의 특별 명령에 따라서 김성일이 회례사라는 명분으로 서울에 와 있던 일본의 사신을 만나서 들은 말은 ‘일본이 두 가지 이유로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일본의 조공을 중국이 받아주지 않아서 풍신수길이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과 ‘고려가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친 것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일본은 꼭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입하겠다고 하는 말을, 그것도 왕의 특별명령으로 다시 찾아가서 만난 왜국의 사신으로부터 들었으니, 이 말은 왕과 비변사에 틀림없이 보고 되었을 것입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국정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비변사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최고 기구가 아닙니까? 비변사는 직위가 높고 국방업무에 경험이 많은 제한된 숫자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도 좋은 곳입니다. 이처럼 깊이 있게 논의하고 국방대책을 협의하자고 설치했던 기구이니, 비변사는 김성일의 보고를 받고나서 일본의 침입 가능성에 대하여 한 번 더 검토와 논의를 하였을 것입니다.『징비록』에도 보면 “비변사에서 황윤길, 김성일 등이 파악하는 왜국의 상황에 따라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왕에게 이들로 하여금 왜국의 사신을 만나보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고도 왜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다면, 국왕과 비변사 구성원들은 그 이상의 직무유기를 할 수 없는 최고의 직무유기를 한 것이 됩니다. 외국(外國)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 이상의 국방업무(國防業務)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김성일의 두 번째 보고 외에도 당시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보는 여러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첫째 통신사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공식 외교 문서인 풍신수길의 답서에 “중국에 곧바로 들어가겠으니, 조선이 앞서 내조하라”는 내용이 있었고, 둘째로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 곧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이것은 큰 수치이다. 다음해(곧 임진년) 2월에 바로 명나라로 향하겠으니, 조선도 우리를 도와 대명궁(大明宮)에 날아 들어가지 않으려는가”한 황윤길 등이 가져온 또 다른 일본의 외교문서가 있었습니다. 셋째 선위사 오억령이 부산에 가서 회례사로 온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 등으로부터 “내년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상국, 곧 중국을 침범하려 갈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이를 조정에 보고한 바도 있습니다. 넷째로 당시 조선이 왜국과 한 패가 되어서 중국을 침범 하려 한다는 중국 측의 의심을 받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중국침략은 중국의 정보망에도 포착된 것이며, 중국은 요동도사를 통하여 왜의 동정을 조선에 물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다섯째 조선이 왜국과 한패가 되어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는 중국 측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하여 조선은 수차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섯째 대마도주 평의지가 또 부산포에 와서 “일본이 대명(大明)과 통호하려고 한다. 조선에서 이 사실을 중국에 알려주면 매우 다행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와서 알려주는 것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 평의지의 이 말은 물론 조정에 보고 되었습니다.

 

선조의 희생양 김성일

 

그런데 막상 왜적이 침입하고 나니, 국왕 선조는 김성일이 두 번에 걸쳐 보고한 왜국에 대한 정세 보고 중 나중에 한 보고, 곧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는 없었던 듯이 민심 안정을 위하여 말한 처음 보고를 문제 삼아 그를 체포하여 오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선조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국정(國政) 최고책임자(最高責任者)로서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김성일에게 돌리려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곧 김성일을 자기의 희생양(犧牲羊)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같은 선조의 행위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채 일부 사람들로부터 수백 년간 비판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조선은 통신사들이 귀국한 바로 그 해, 곧 임진왜란 1 년 전부터 만일에 대비한 나름대로 방어책을 세웠었습니다. 첫째로 각도의 성곽을 수축하고, 둘째 무기를 점검하고, 셋째 무신 중에 뛰어난 재질이 있는 자는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한 것입니다. 특히 조정은 일본이 육전보다는 해전에 강하다는 판단아래 전국, 그 중에서도 경상, 전라도의 성곽 수축에 힘쓰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도 이때의 무신발탁 중의 하나입니다.

 

조선 운명의 분기점

 

조선이 아직 망할 때가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김성일의 충정에 하늘이 감동하였음인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던 김성일이 임진왜란 최초로 왜적을 격퇴하고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 승리는 적의 선봉 부대를 격퇴시킨 것으로 승리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 전후의 전개 과정을 보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2일 전에 왕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관인 김성일을 경상우병사로 발령을 냅니다. 발령을 받은 김성일은 곧바로 경상우병영이 있는 창원으로 출발하였으며, 충주 단월역에서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상주를 거쳐 주야로 달려와서 의령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정암진을 통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휘하 장병들이 강 건너 편의 적을 피해가려고 “정암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는 다시 그를 따라 온 아들 김역(金역)에게, “강물이 불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간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속여 보고하였습니다.

 

그때 전 목사 오운(吳澐)이 김성일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는,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하였습니다만, 왜 정암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습니다. 김성일이 크게 노하여 군관 김옥과 아들 김역을 잡아들여 사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마산)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김성일은 창원 병영에서 후퇴하여 와 있던 전 병사 조대곤(曺大坤)을 만나 인수인계를 하였습니다. 그 얼마 후에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김성일이 군사들의 동요를 막은 다음에 군사를 골라 좌우에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복장을 하고 빙글빙글 도는 금 가면을 쓴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왔으며, 장병들은 이들을 겁내어 떨었습니다. 그런데 김성일이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꼼짝 않고 있으니, 이상히 여긴 두 왜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며, 그 뒤에는 왜적 수십 명이 부채를 휘두르며 걸어왔습니다.

 

김성일이 군관들에게 왜적들을 쏘게 하고 용맹한 군사들을 골라 돌격하게 하였으나, 다들 서로 먼저 나가라고 미루었습니다. 김성일은 김옥에게 말하기를 “너는 전에 말하기를 먼저 나가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피할 수 있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서서 말에 올라 수리 밖까지 쫓아가서 금 가면을 쓴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수급 둘을 베고 금 안장, 준마, 보검을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김성일이 군관 원사립과 이숭인을 시켜 왕에게 괵수(馘首 자른 목)를 바치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이 처음으로 왜적을 물리친 싸움이었습니다.

 

김성일이 격문을 돌리고 흩어진 장졸들을 불러 모아 적을 물리칠 계책을 마련하던 중에 전년도에 통신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한 내용을 문제 삼아 왕이 자기를 잡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체포명령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명령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고는 곧 한양을 향하여 주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충청도 직산에서 초유사로 임명하는 사령장을 받았습니다.

 

한편, 김성일을 벌하려고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린 왕은 얼마 뒤에 김성일이 올려 보낸 왜적의 수급과 장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김성일이 한 번 죽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그가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자 왕세자가 힘써 구원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과 최황(崔滉)도 김성일을 적극 변호하여서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김성일이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왜적을 물리친 바로 그 일이 그 자신을 살렸음은 물론 조선을 패망에서 구하는 운명의 분기점이 됩니다.

 

초유사 김성일

 

초유사가 된 김성일은 직산을 출발하여 공주, 전주 등을 거쳐 남원, 운봉을 지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5월 4일 함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는 중에 근왕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가고 있던 경상감사 김수를 운봉에서 만나서 준엄하게 권고하여 경상도로 되돌아오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함양에는 군수 이각과 늙은 아전 몇 사람만 있었습니다. 김성일은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는데, 전 현령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 이로(李魯)도 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김성일이 초유사로서 또 경상우도 감사로서 활동하는 동안 크게 도왔었습니다.

 

김성일은 그 자리에서 초유하는 격문을 썼는데, 문장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붓을 먹에 적실 겨를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 격문에 대하여 『선조실록』의 사관은 선조 28년 2월 6일조에서

 

“김성일은 초유사로 임명되자 도로 영남지방으로 들어가서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니, 원근에서 모두 메아리처럼 응하여 함락되었다가 도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 16~17읍이나 되었다. 그의 초유하는 격문은 충의(忠義)가 북받치고 말뜻이 격렬하였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들조차도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동해서 눈물을 떨구었다.”

 

고 논평하였습니다. 사실 이 격문은 그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들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흩어진 군사들과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초유사가 되어 경상우도에 온 다음 처음으로 올린 것으로 보이는 장계가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에 실려 있습니다. 경상도에 의병이 일어난 일과 각 지역별 상황, 곽재우의 전투 능력 및 성격, 병기 및 군량 조달의 어려움, 진주성 방어에 대한 결의 등을 밝힌 장문의 장계입니다. 이 중에서 우선 임진왜란 발발 초기의 경상도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도의 순찰사(곧 김수)는 서울로 올라갔고, 병사는 군졸이 없고, 수사는 군영을 잃었으며, (왜적에게 실함되지 않고) 남은 고을은 다만 거창, 안음, 함양, 산음, 단성, 진주, 사천, 곤양, 하동, 합천, 삼가 등 10여 고을이 있을 뿐인데, 인민들이 모두 깊은 산중으로 도망쳐 들어가 빈 성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비록 수령(守令)과 가장(假將)이 있기는 하지만 호령이 시행되지 않아 군사를 조달하여 응원할 방책이 없으니, 불원간 모두 왜적들의 소굴이 될 것인바, 애통하고 절박한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본도는 함락되어 패전한 나머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들만이 산 속으로 숨어든 것이 아니라, 대소 인민들이 모두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나 짐승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이에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초기에는 초유사 김성일이 격문을 내보내고 되풀이하여 설득을 하여도 의병에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 김성일의 종사관인 조종도의 누이동생 시가가 함양의 노 판서 댁이어서 조종도가 노씨들이 피난한 산 속에 찾아가서 의병을 일으키기를 돈독히 권면하였더니, 뒤에 군내의 선비들이 많이 모여왔습니다. 김성일이 이들에게 창의의 의리를 타이르니, 듣는 이들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영공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일하려면 마땅히 먼저 (감사 김)수(晬)와 (병사 조)대곤(大坤)을 제거하여서 인심을 고동 시켜야만 그 뜻을 이룰 수 있는데, 어찌 (김)수를 맞이하여 왔습니까? 우리들은 처음 영공의 선성(先聲 전부터 알리어진 명성)을 듣고 마치 어린 아기가 젖을 물리기를 바라듯 하였는데, 다시 순찰사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운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린 것도 의가 아니고, 한 도에 원수가 없는 것도 또한 의가 아닙니다. 나는 다만 의로써 일을 처리함을 알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말은 좀 지나치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김수와 조대곤을 죽여야 한다는 말은 산음에서도 나왔습니다. 이곳 사람 오장(吳長)과 의령 사람 이지(李旨), 단성 사람 김경근(金景謹)이 칼을 짚고 김성일을 맞이하면서, 김경근이 말하였습니다. “김수와 조대곤을 죽이지 않고서는 대의를 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니, 김성일은 “그렇게 하여서는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감사와 병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의병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산음 현감 김낙(金洛)은 평소에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군사를 8백여 명이나 모집하였습니다.

초유문을 내보낸 지 여러 날이 지나고, 또 의병들이 창기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초유사 김성일은 효과적인 의병 창의 방법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령이 없는 고을에 수령을 세워서 행정체제를 갖추는 것과 명망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유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즉 전시에 무너진 행정체제를 다시 조직화하면서 지역 유지들로 하여금 앞장서서 의병을 창의, 모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발적으로 초유사를 찾아온 손승의(孫承義)를 고령 가수(假守)로 삼았습니다. 산음을 떠나면서 현감이 도주하여 행방불명이 된 의령에 조종도를 가수로 삼고, 현감들이 숨어 있다가 불려서 나온 단성, 삼가는 이로를 소모관으로 삼아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습니다. 인사 발령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김성일은 이후로도 조종도, 곽율(郭율), 김준민(金俊民) 등을 가수로 발령 내어 행정체계를 복원, 유지함과 아울러 이정(李瀞), 오운(吳澐), 정경세(鄭經世) 등을 소모관으로 삼아 군사들을 계속 모집하였으며, 군량미 등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저관을 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도승지의 서장에 따라 의병 창기와 전투에 공이 많은 박사제(朴思齊)를 의령현감에, 강덕룡(姜德龍)을 함창현감에, 변혼(卞渾)을 문경현감에, 여대로(呂大老)를 지례현감에, 정기룡(鄭起龍)을 상주판관에, 정인홍(鄭仁弘)을 성주목사에, 이정을 사근도찰방에 임시로 차임하고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신갑(辛岬)을 사천가수로, 조종도를 단성가수로 차임하였습니다.

김성일은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과 면천, 허통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여러 고을에 선악부를 두고 왜적을 치는 자는 선적에 기록하고 왜적에게 가담하는 자는 악적에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적에게 가담하였던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적의 수급을 가지고 와서 속죄하기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김성일은 초유사로서 의병 창의를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구상,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의병들 일어나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원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가 격문이 나가기 전인 4월 22일에 자기의 많은 재산을 다 내놓고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에 있을 때 곽재우가 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특하게 생각하고 편지를 보내어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목을 베어서 처벌해야할 김수와 초유사가 함께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갈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유사가 단성에 있을 때 와서 만나 서로 이야기를 해보고는 같이 국사에 힘쓰다가 죽기로 약속을 하고 함께 진주로 갔습니다.

 

전 좌랑 김면(金沔)은 거창에서 기병하고, 고령과 거창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참모는 곽준(郭䞭)과 문위(文緯)였습니다. 김면 휘하에는 나중에 박성(朴惺), 변혼(卞渾)도 참여하였으며, 난 초에 도망하였다가 이지의 노력으로 초유사에게서 용서를 받은 황응남(黃應南)이 가세하여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거창의 산척(山尺)수십 명도 참여하여 일당백의 공들을 세웠습니다. 김면은 우지곡(牛旨谷) 밑에 진을 치고 지례, 김산, 개령에 유둔한 적을 막았습니다.

합천의 전 장령 정인홍과 곽율(郭율) 등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정인홍은 합천 사람을 동원하여 군사로 하고, 야로(冶鑪)에 주둔하여 성주성에 웅거한 왜적을 괴롭혔습니다. 그의 참모는 하혼(河渾), 조응인(曺應仁), 정인영(鄭仁榮)이었으며, 군량 조달은 정인준(鄭仁濬)과 서적(徐迪)이 담당하였습니다. 권양(權瀁)은 진중 군수물자를 관리하고 호렴(戶斂)도 거두어서 공급하였으며 병정으로서 숨는 자가 있으면 그 집 간을 불사르기까지 하여 감히 숨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군병의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을 모두 의병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성일은 함안 사람 이정을 소모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흩어진 병졸 6백여 명을 거두어서 군수 유숭인(柳崇仁)에게 맡기고 함께 복병을 설치하고 성을 지키며 적의 길을 끊었습니다. 군수 유숭인은 산속에 숨었다가 나와서 정호를 건너 의령을 지나다가 곽재우와 마주치었습니다. 곽재우가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죄를 물어 활을 당겨 쏘려고 하니 그도 활로 응수하여 서로 한동안 버티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조종도가 가서 화해케 하여 곽재우의 진영에 머물러 있었는데, 초유사가 이정의 말을 듣고 자기 고을 함안으로 돌아가게 하였던 사람입니다.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은 적이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도망을 갔고, 초유사 김성일이 그의 악행을 듣고 처벌하려고 하니 감사 김수가 그를 두호할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사소한 일로 그를 파면시키고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으로 가장을 삼았습니다. 나중에 손인갑이 전사하고 나서 김성일은 거제 현령 김준민을 합천의 가수로 삼았습니다.

 

박사겸(朴思謙), 박사제(朴思齊), 노흠(盧欽) 등은 삼가에서 기병하였습니다. 윤탁(尹鐸)은 삼가의 대장(代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곽재우에게 가서 정암진에 진을 치고 강을 건너려는 적을 막았습니다. 또한 삼가에서는 박사제가 도총(都摠)이 되고, 허자대(許子大)가 병기를 만들고, 정질(鄭晊)이 군량을 주관하고, 노순(盧錞)은 군량 수송을 담당하고, 정연(鄭演)은 독후장이 되고, 권난(權鸞)은 돌격장이 되고, 이운장(李雲長)은 수병장(收兵將)이 되고, 심대승(沈大承), 배맹신(裵孟伸)은 선봉장이 되고, 허언심(許彦深)은 군향(軍餉)을 맡고, 강언룡(姜彦龍)은 병기를 다스렸으며, 고을의 부호들은 다투어 소를 잡고 쌀을 내어 군사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습니다. 전국적으로 경상우도 만큼 많은 의병들이 일어난 곳이 없습니다. 이는 한 편으로는 남명 선생의 경의(敬義) 사상 특히 의리 교육에 힘입은 바가 아주 크다고 봅니다. 곧 남명 선생이 의병 창기의 토양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초유사 김성일이 이처럼 마련된 토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의병의 꽃이 피도록 힘써 가꾼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경상우도 일부 지역의 상황

 

임진년 6월초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초유사 장계에서 경상우도의 김해, 창원, 우병영, 칠원 등지는 왜적의 소굴이 되어 있으며, 연해 여러 진보(鎭堡)의 장수들은 왜적을 바라보고서도 겁을 먹고 앞 다투어 육지로 도망쳐서 바다의 군영이 모두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고성도 왜군들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점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령 김현(金絢)은 평소 형벌이 가혹하여 민심을 잃었는데, 백성들이 난을 만나 그를 죽이려하자, 복병을 매복시키고 거짓으로 도망한 체하였습니다. 배반한 백성들이 성안에 들어가 관고의 물건을 훔치자 복병들이 이들을 엄습하여 50여 명을 사로잡아 참수하였습니다. 이로 이해 백성들이 더욱 원망하여 배반하므로 현령은 수사와 함께 일시 바다로 나갔는데, 그 사이 왜적이 입성한 것입니다.

현령 김준민(金俊民)이 성을 잘 지키고 있던 거제현도 순찰사 김수가 근왕할 일로 불러가서 현령이 없자 군사와 백성이 무너져 흩어져서 왜적들이 성안에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남해는 현령 기효근(奇孝謹)이 바다에 나간 사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군관으로 하여금 군량 창고를 불태우게 하니, 고을 백성들이 다 흩어졌고, 현령이 돌아와 보니 빈 성만 남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보리를 거두어 군량을 마련하고 흩어진 군졸들을 수합하여 어렵게 성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함안은 군수 유숭인이 분탕질하는 왜적을 공격하여 자못 퇴각시켰는데, 순찰사가 근왕할 일로 군수를 불러가자 왜적들이 온 군에 두루 널렸다고 하였습니다. 초계는 적선 2백여 척이 올라와 상륙하여 도적질하니, 인민들은 달아나 숨고 가장(假將) 최몽성(崔夢星)은 군을 버리고 산중으로 도망하였으며, 왜적들이 이틀 간 연달아 합천을 공격하고 있는데, 병사가 거창에 있지만 군졸들이 다 도망하고 한 명도 없어서 응원할 방책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적이 합천을 점령한다면 내지의 4, 5개 고을이 차례대로 함락당할 것이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진주의 군사적 전략적 중요성

 

이제 진주대첩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초유사 김성일은 임진년 6월 초순경에 왕에게 올린 장계에서 진주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巨鎭)으로 양도 (곧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만 보존할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고을도 토붕와해 되어 조석간도 보존할 수 없을 것이어서 왜적들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으로 인하여 도내가 텅 비었으니, 또다시 왜적들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수양 한 군이 강회의 보장이 된 것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진주의 정병은 이미 감사와 병사에게로 갔다가 모두 무너져 산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그 나머지 성을 지키는 군사는 겨우 1천여 명이며, 아병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도 겨우 6, 70명뿐입니다. 신은 진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려하고 조치하여 이 고을을 견고하게 지킴으로써 호남 및 내지를 방어하는 계책으로 삼으려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은 호남 및 경상우도 내지를 방어하기 위하여서는 진주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 자신은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진주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또 그러한 조치가 제대로 실행되도록 독려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적이 침입한 이래 호남과 호서 지방 일부, 그리고 경상도 중 진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국토의 대부분은 왜적에게 빼앗긴 상태여서 이때는 나라의 운명이 조석 간에 달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김성일은 이 남은 지역은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국가 중흥의 근거지로서 우리로서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또 왜적으로서도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하여서, 또 조선 중흥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서도 그들의 미 점령 지역 중 인력과 물자의 주 공급원인 전라도를 점령하려 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왜적들의 조선 침략의 출발점이자 거점인 부산 등지로부터 전라도로 가는 방법도 지름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에 그 지름길 상에 있는 진주를 그는 이처럼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지도를 놓고 보면 강원도 동해, 삼척 부근에서부터 경남 서남쪽 끝에 있는 하동까지 고산준령들이 연이어 있습니다. 소위 소백산맥 입니다. 이런 천혜의 요험이 있어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길은 소백산맥 중에 있는 육십령(六十嶺)이나 팔량치(八良峙) 등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부산에서 이들 고개로 가는 지름길은 창원, 함안을 지나 정암진(鼎巖津)에서 남강을 건너 의령, 삼가, 산청이나 거창을 지나 안의까지 와서 육십령을 넘거나 남쪽으로 더 내려와서 함양 팔량치를 넘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정암진은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또 하나는 진주를 통하여 단성, 산청을 지나 함양에서 팔량치를 넘거나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안의에서 육십령을 넘는 길이 있습니다.

 

이처럼 육십령이나 팔량치는 소백산맥 중에서 호남을 지키는 최고의 관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재로 가는 길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임진왜란 초기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진주는 두 재로 가는 길목이 될 뿐만 아니라 남해안 평야지대를 지나 전라도로 진입하는데도 요충인 곳입니다. 그래서 김성일은 진주는 호남의 보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추풍령 북쪽에서 전라도 특히 전주로 들어가는 길은 이치, 웅치 등을 통하여 가거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와서 지례와 거창 사이에 있는 우지현(牛旨峴)을 통과하여 육십령이나 팔량치를 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왜적들이 성주, 고령, 개령, 지례, 김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낙동강 수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애쓰는 일방, 전라도로 진입하고자 무수히 전투를 벌였으니, 낙동강에 면해 있는 초계, 고령과 전라도 진입의 길목에 있는 거창의 군사적, 전략적 중요성도 아주 컸습니다.

 

진주 수성을 위한 준비

 

위에서 말한 초유사의 장계를 보면 김성일은 불원간에 있을 진주성 전투를 예견하고 이 전투를 위한 준비를 이때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장수를 충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목에 종기가 난 전 목사는 순찰사가 주청하여 파직시켜서, 성을 지킬 장수는 판관 한 사람 뿐이기 때문에 그는 편의에 따라 진(鎭)을 버린 수령과 변장 등을 수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했습니다. 가덕 첨사 전응린, 고성현령 김현, 권관 주대청에게 기회를 주어 스스로 공을 세우게 한 것입니다. 김성일은 다른 때에도 여러 사람에게 그렇게 다시 일 할 기회를 주었고, 다시 기회를 얻은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공적을 낸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이때 진주성을 지키는 군사는 겨우 1천여 명이며, 아병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도 겨우 6, 70명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군사가 부족한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병사와 수사가 휘하에 군사가 없다고 그나마 성을 지키는 군졸들을 보내달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이에 공문을 보내어 군사를 보내줄 수 없는데 대한 병사와 수사의 이해를 구하면서, 진주의 병사들은 모두 진주에 남아서 전적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진주에 사는 유생 3백여 명이 서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막기로 모의하였으며, 초유사의 독촉을 받은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서 군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소모관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은 생원 한계(韓誡), 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 하였습니다. 또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로 삼고,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 등 두 사람으로 복병장을 삼고, 하천서(河天瑞)를 조도로 임명하고, 강덕룡(姜德龍)은 갑병을 수선케 하고, 신남(申楠)은 옹희를 관장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인 군사를 조련하니 위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군율도 자못 정제 되었습니다.

 

이처럼 김성일은 진주에 주둔하면서 장수들과 군사들을 모아서 이들을 조련하고, 식량과 병기를 갖추게 하며, 허물어진 성도 수축하고 성 둘레의 못이 얕은 곳은 더 깊이 파게 해서 진주 수성 준비를 하였습니다. 텅 비었던 진주성이 차츰 방어 태세를 갖추어 간 것입니다.

 

김성일은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근을 침범해 오는 왜적을 공격해야만 병세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함양, 사천, 고성의 왜적을 선제하여 공격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고성에서 사천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침범하려는 적을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서 격퇴시켰으며, 다시 사천 성 밑까지 진격하여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니, 왜적은 고성으로 물러갔습니다(군관은 장교이니 병졸을 포함한 전체 군사 수는 적어도 몇 배 내지 몇 십 배가 될 것입니다). 전 군수 김대명이 고성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같이 적을 유인, 야습하니, 왜적은 웅천, 김해 등지로 물러가고 김대명 등은 창원의 마산포로 들어가서 진을 쳤습니다.

 

임진년 7월에는 창원과 진해에 주둔한 적이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하여 대거 진양으로 침입 하였습니다. 거창에 머무르고 있던 김성일은 급히 단성으로 달려가서 함양, 산음, 단성의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진양으로 출동시키고, 김시민을 독려하여 동요하지 말게 하며, 또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최강, 이달(李達) 등에게 명령하여 좌우익으로 나누어 구원케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전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가서 성에 들어갔습니다. 적이 촉석루 앞까지 왔으나, 김성일이 뒤쫓아 와서 독전하니, 낭패하여 물러갔습니다. 적을 살상함이 심히 많았고,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을 수복하였습니다.

 

진주 판관 김시민이 조대곤과 더불어 정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사천의 십수교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또 새벽에 고성 성 밑에 가서 북치고 고함쳐 위엄을 뽐내니, 적이 도망하여 진해에 있는 적과 합하여 창원으로 철병한 것도 있습니다. 곧 사천, 고성, 진해를 수복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김시민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먼저 말씀드린 사천, 진해, 고성 수복과 같은 전투가 아닌가 합니다.

 

경상좌도 감사에서 경상우도 감사로

 

김성일은 임진년 8월에 가서야 6월 1일부로 경상좌도 감사로 발령이 난 것을 들었습니다. 선전관 이극신(李克新)이 의주에서부터 왜적의 소굴을 뚫고 와서 통고를 한 것입니다. 바로 부임 하려하니, 왜적 때문에 길이 막히기도 하고, 또 경상우도 사민들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여 9월 초에 낙동강을 건너 경상좌도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자마자 경상우도 감사로 다시 전근이 되어서 9월 중순에 경상우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김성일이 경상좌도 감사로 부임하는 것은 경상우도 사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벼락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이로(李魯)는 그의 『용사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경상)우도 사람들은 어린이는 울고 늙은이는 한숨지으며, 어른은 호통하면서 안절부절 못함이, 마치 물을 잃은 고기와 같고, 보금자리를 불태운 제비와 같았으며, 의병의 무리들은 대개가 마음이 꺾여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비들은 밀물 치듯 수십 명이 떼 지어 와 뜰아래서 (경상우도에 계속) 머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다가 우도의 유생들은 여러 가지로 김성일의 유임운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향교에 모여서 그 방법을 의논하자고 통문을 돌렸습니다. 통문의 대표자는 유학 강위로(姜渭老)였습니다. 이 통문에 따라 모여서 의논을 하였을 것입니다. 진사 박이문(朴而文)은 합천, 초계, 삼가, 의령, 진주, 단성의 소두(疏頭)가 되어서, 진사 정유명(鄭惟明)은 거창, 안음, 산음, 함양의 소두가 되어서 각각 왕에게 김성일을 경상우도에 머물러 있게 하여 달라고 상소를 올렸으며, 사인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인은 김성일에게 경상우도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만원서를 올렸습니다.

 

이때 상소를 왕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경상우도 이 아래쪽에서 왜적들의 소굴을 지나서 국토의 저 서북쪽 끝에 있는 왕에게 상소문을 전달하여야 하는 것이니까요. 삼가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노순(盧錞)이 두 개의 원류소를 가슴에 품고 김성일을 유임시키고자 의주까지의 그 어려운 길을 가서 왕에게 상소문을 전달하였습니다.

 

김성일은 왕명을 받들어 경상좌도로 갈 수 밖에 없어서 낙동강을 건너가게 될 무렵 이로가 따라 가겠다 하니, 김성일은 “저쪽의 의혹이 풀리기 어려우니 아직 피하라”고 하였으며, 곽재우 또한 하직 인사차 와서, “형세가 이미 순찰사 김수(金晬)에게 용납되지 않으니, 청컨대 군대를 해산하고 진영도 파하고 속관이나 되어 휘하에 따라 가겠나이다” 하고 말하니, 김성일은 탄식하면서 “그대의 말인즉 그럴 듯 하다 마는 내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요, 그대가 마지못해 좌도로 넘어온다면 나는 당장에 장계로 품의하여 현풍, 창녕, 영산 세 고을의 도의병장으로 삼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사실상 적을 토벌하는 데야 어찌 좌도니 우도니 할 것이 있겠소. 그러나 다만 그대가 강좌로 넘어오면 강우는 장차 어떻게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경상우도 사민들의 진정으로 김성일은 경상좌도에 가자마자 바로 경상우도의 감사가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9월 16일에 낙동강을 건너 경상우도로 와서 19일에 거창에서 전 우도 감사 김수를 만나 업무인수를 하였습니다.

 

김성일이 경상좌도 감사로 가고 난 후에 당시의 경상우도 감사 김수(金晬)는 진주는 지킬 수 없으며, 성을 지킨다는 것은 위험하고, 성 밖에서 싸우면 살아날 길이 있다고 하면서 김시민에게 급히 가서 거창 우지현의 위급함을 구하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시민은 진주를 떠나 김면 대장의 진문에 가서 사랑암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한 다음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진주성 전투를 위한 준비와 적의 정암진 도강 저지

 

김성일이 경상우도에 돌아와서 진주성을 지키는 목사가 없음을 알고는 크게 놀라 군관을 시켜서 가서 김시민을 데려오게 하여 엄하게 타이른 후 다시 진주로 가서 성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진주성 싸움이 시작되기 보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이야기 입니까? 김성일이 경상좌도에서 경상우도로 온 시기와 김시민이 진주성으로 다시 돌아간 시기 말입니다.

 

당시 경상우도의 최고 책임자였던 김성일은 왜적들이 일방은 진주를 통하여 경상우도 내지를 노리고, 다른 일방은 의령을 거쳐 산음으로 직행하고, 또 다른 일방은 성주의 적이 거창으로 침입하려는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주를 포함한 경상우도 내지 전체를 아우르는 방어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는 진주성 안에 들어가 있는 대신 인근 고을에 주둔하면서 이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병력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는 진주성 방어를 위하여 성 내외에 병력을 배치하면서, 또 정암진 도강 저지를 통하여 진주와 의령, 산음을 통한 적의 전라도 진입을 막으며, 거창, 성주 등지의 김면, 정인홍 군은 그 주력들이 개령, 성주 등의 적이 거창, 고령 등 내륙으로 침입하는 것에 대비하도록 병력 동원을 최소화 하였던 것입니다.

 

진주를 쳐들어 온 왜적은 김해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 24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김성일은 왜군의 동정을 곧바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전라도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김성일은 다시 10월 2일에 첨정 조종도를, 10월 6일에는 정랑 박성을 보내어 전라좌우의병장에게 응원을 청했습니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의 군은 진주성 싸움에 때맞추어 왔습니다만 좌의병장 임계영 군은 진주성 싸움이 끝난 다음에 도착하였습니다.

 

왜적들이 진주를 포위하기 전에 합포(곧 마산)를 짓밟고 장차 파릉(곧 함안)을 침범하려 하므로 김성일은 산음, 단성, 삼가, 의령의 네 고을 유생 및 관원과 오운, 조종도, 이로, 초계가수 곽율과 함께 정호 언저리에서 병력을 과시하며 깃발을 많이 만들어서 좌우의 산위에 열 지어 꽂았습니다. 이때 곽재우는 정호 건너 함안 벌판에 배수진을 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왜적들이 정호를 건너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도망쳤습니다.

 

이것은 왜적의 정암진 도강을 막아 왜적이 남강 북쪽에서 의령, 진주, 산음 등지로 공격하려는 것을 막은 대규모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왜적이 정암진을 건너서 침공할 경우에는 진주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게 되니, 군사 숫자가 턱없이 적은 우리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 진주를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없어서, 진주는 외부 지원이 없는 고립무원의 전쟁터가 되고, 전라도도 위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암진 도강 저지 계책은 진주대첩을 가능케 한 뛰어난 작전이었습니다.

 

김해를 떠난 왜적 3만(일본 측 자료에는 2만) 명은 한꺼번에 진격하였는데, 9월 24일에는 세 부대로 나뉘어 노현(露峴)에 있던 군대를 습격하고, 27일에는 창원부를 침범하였습니다. 왜적들은 이긴 기세를 타고 10월 2일에는 함안을 함락하였고, 4일에는 함안을 출발하여 남강을 건너 세 방향에서 진주를 포위하였습니다. 이때 창원에서 진주로 패퇴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사천 현감 정득렬, 가배량 권관 주대청과 함께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으며, 유숭인이 패하여 전후로 죽은 자가 1,4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임진년 진주대첩을 이룩하는 데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진주성 내외에 병력을 배치하다

 

김성일은 왜적들이 진주를 포위하기 전에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 “목사는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 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죽음으로 보답하라”고 면려 하였습니다. 또 곤양 군수 이광악, 진주 판관 성수경(成守慶), 전 만호 최덕량(崔德良), 권관 이찬종(李纘宗) 등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주성 안에 들어가서 김시민과 협력하여 지키고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즉 성밖의 장수와 병력으로 하여금 진주성 안에 들어가게 하여서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일방, 성안에 있던 군민의 사기를 드높인 것입니다.

 

진주성 전투가 끝난 다음에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 보면 전 우후 이협은 당시 사람들이 ‘성안에 들어가면 성이 함락되어 틀림없이 죽는다’ 말하였기 때문에 성문까지 왔다가 들어가지 않고 도망쳤다고 하였습니다. 김성일은 이렇게 도망친 전 우후 이협과 대비하여 “난리에 임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든 것이 매우 가상하다”고 권관 이찬종을 칭찬하였습니다만, 이때 성안에서 싸운 군관민 모두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안에 계속 남아 있었거나 성밖에서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니, 그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김성일은 또 외부에서 진주를 지원하도록 각 의병장에게 지역을 분담시켰습니다. 곧 삼가 의병장 윤탁(尹鐸), 의령가장 곽재우, 초계가장 정언충(鄭彦忠) 등으로 하여금 동쪽을 통하여 들어가고, 합천가장 김준민은 북쪽을 통하여 들어가고, 전라도의 의병 최경회는 서쪽을 통하여 들어가고, 고성가장 조응도(趙凝道)와 복병장 정유경은 남쪽을 통해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김성일은 진주성 안에서 왜적을 막을 장수들과 진주성 밖에서 진주성을 지원할 의병장들을 미리 선정하여 배치한 것입니다.

 

진주대첩을 이루다

 

이 사전 배치에 따라 성 안에서 목사와 그를 도와 함께 승첩을 이룬 장수들의 공적을 간략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목사 김시민은 평소에 염초를 구워 만들고 조총을 본 딴 총통을 주조하여 사격 연습을 시켰으며, 싸움에 임해서는 화약을 물 쓰듯 썼고, 총통으로 철환을 쏘아 적을 물리치는데 큰 힘이 되게 하였습니다. 5일부터 10일 새벽까지 6일 동안 노약자들과 여자들을 남장을 시키는 등의 위장술을 써서 군사의 위용을 웅장하게 하기도 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악공들로 하여금 문루에 올라가 피리를 불게 하는 등 심리전술을 쓰기도 하고, 적이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서로 엮어서 멍석을 덮은 것과 3층 산대를 만들어 공격하려던 것을 현자총통을 쏘게 하여 명중시켜 적이 물러가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적이 젖은 솔가지와 대로 엮은 발로 성을 공격하려는 것을 보고 화구(火具)를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로 싸서 섶을 묶은 속에 넣어두어 성밖으로 던질 준비도 하고, 많은 가마솥에 물을 끓여 적에게 퍼부을 준비를 하는 등 성내의 군관민을 잘 이끌어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판관 성수경은 적이 여러 공성 도구를 마련하여 동문을 밤낮 5일 동안 공격 하였지만 이를 굳게 지켰으며, 특히 10일 새벽 마지막 공격 시에는 옹성에서 진천뢰와 질려포를 터뜨리기도 하고, 큰 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 불붙인 짚을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붓기도 하는 등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 적을 물리쳤습니다.

 

전 만호 최덕량은 옛 북문에 1만여 명이 갑자기 몰려 왔을 때 군관 이눌(李訥), 윤사복(尹思復)과 함께 도망하는 군사의 목을 베면서까지 싸움을 독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 무너질 뻔 한 성을 지켰습니다. 율포군관 이찬종은 성안에 들어가 협력하여 남문을 지켰습니다.

 

곤양군수 이광악은 고을의 정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목사와 함께 성을 지켰습니다. 그는 8일 목사가 성을 지키기 어려울 듯하다면서 노약자들을 몰래 수문으로 내보내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려 하마터면 군관민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성을 지키는 것이 위험할 뻔한 것을 막았습니다. 10일 새벽에는 목사가 총탄에 맞아 의식을 잃자 대신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었으며, 왜장을 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성 밖에 배치된 여러 의병장들도 진주성을 지원하였습니다. 삼가 의병장 윤탁은 2백여 명을, 초계가장 정언충은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마현에서 적과 오랫동안 크게 싸웠으나 궤멸되어 돌아왔으며, 의령가장 곽재우는 심대승(沈大升)으로 하여금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밤에 향교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불게 하여 성 안 사람들과 서로 호응하며 왜적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성안에 대고 “전라도의 구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장군이 내일 아침에 와서 왜적을 쳐 죽이기로 하였다”고 하니 성안의 사람들도 역시 크게 외치면서 서로 호응하였습니다. 8일 밤 2경에는 고성가장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 등이 십자 횃불을 든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진현 위에 늘어서서 뿔피리를 불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구원병이 온 것을 바라보고는 즉시 큰 종을 울리고 뿔피리를 불어 호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왜적의 무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막사를 불태우고 복병을 보내어 강변을 막고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9일에 왜적 한 부대가 단계현으로 향해 가다가 합천가장 김준민에게 쫓겼으며, 또 다른 부대는 단성읍내를 분탕질 하다가 역시 김준민에게 쫓기었습니다. 살천창으로 향해 가던 다른 부대는 정기룡(鄭起龍), 조경형(曺慶亨) 등에게 쫓기다가 진 친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정유경은 미시에 다시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진현으로부터 사천에 이르러 진을 치고 군위를 뽐내었으며, 또 용사 20여 명을 뽑아서 남강 밖에서 분탕질 하는 왜적과 대나무를 찍는 왜적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자 진에 있던 왜적들이 강을 건너 쫓아왔으므로, 정유경은 물러났습니다.

 

고성의 의병장 최강은 밤에 망진산에 올라가서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횃불 4, 5개씩을 들고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쳐서 적병이 놀라게 하고, 성안의 군사들을 성원 하였습니다. 이달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두골평에 진을 치고 공격하여 적을 베어 죽였습니다. 이밖에 군관 윤경남(尹慶南)과 승의장 신열(信悅)은 김준민과 함께 적을 쫓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밖의 의병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밤낮으로 활약하여 적이 우리 후원군이 아주 많은 것으로 알게 하여 진주성 공격을 그만두고 후퇴하게 하는데 큰 몫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면도 있었습니다.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기 전 왜적의 정암진 도강을 막으려고 병력을 이끌고 군세를 과시했을 때 경상우감사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의령, 함안의 경계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기병을 내어 적을 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곽재우는 배수진을 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끝내 함안 경내에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아 진주성 싸움에서 패주하던 적병이 편안하게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곽재우가 명령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하였으며, 김성일은 노하여 곽재우를 뜰 안으로 잡아오게 한 다음 장차 군율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박성과 오운이 막하에 있다가 말려 그만 두었습니다.

 

진주성 대첩과 김성일의 역할

 

김성일은 군사업무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였지만, 적군의 작전에 대처하는 전략과 병력배치, 병기 및 군량 마련과 지원, 군민들의 사기 앙양책, 적정파악 실태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뛰어난 군사 전문가였습니다. 특히 임진년 진주대첩과 관련하여서는 김성일의 다음과 같은 활동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첫째, 김성일은 임진년 5월 초유사로 부임하면서 진주의 군사적, 전략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알고, 관계자들에게 진주는 기필코 방어해야 할 곳임을 인식시키면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목사를 비롯한 관군으로 하여금 병력의 확보, 성지의 수축, 병기의 준비, 식량의 확보 등 진주 자체로서 수성을 철저히 준비하게 하였으며,

 

둘째, 진주대첩 전 5개월 동안에 진주를 두 번이나 떠났던 목사 김시민을 데려와서 진주를 지키게 하였으며,

 

셋째, 왜적이 성을 포위하기 전에 이광악 등 훌륭한 장수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안에 들어가 목사와 힘을 합쳐 성을 지키도록 하여 성안의 군사력을 강화한 외에 성안 관민의 사기를 고양시켰으며,

 

넷째, 싸움이 한창일 때는 적에게 포위된 성안에 사잇길을 통하여 화살 등 무기를 공급하여 전투를 지원하고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특히 적의 마지막 공격 날에는 성안에 화살과 탄환이 다 떨어져서 성이 함락될 위기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가서 무기를 공급하게 하여 가까스로 성을 지킬 수 있게 하였으며,

 

다섯째, 적이 진주를 공격하기 전에 정암진을 건너 작전을 전개하려던 것을 병력 과시만으로 막아 군사의 수가 크게 열세에 있던 휘하의 관군과 의병들이 진주를 집중하여 지원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적이 의령, 산음 등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여섯째, 호남에까지 여러 번 지원을 요청하여 원군을 지원 받았으며, 왜적의 진주성 공격이 한창 진행 중이던 10월 6일에도 임계영에게 사람을 거듭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여 우리 측의 전투력 보강에 힘썼으며,

 

일곱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여러 의병장들을 진주의 동서남북 사방에 포진시켜 적을 공격하게 하거나 우리 측을 성원토록 함으로써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의지와 격려가 되게 하였고, 왜적들에게는 전방과 후방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위협을 줌과 동시에 우리 지원군이 아주 많다는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적들이 작전을 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가져서 결국 후퇴하게 하였습니다.

 

요약하건대, 김성일은 진주성을 죽음을 무릅쓰고 반드시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목사 등으로 하여금 평소 방어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적이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이광악 등 외부의 병력을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성 내부의 군사력을 강화한 외에 성 외부의 동서남북 사방에 의병들을 분담 배치하여 왜적을 공격, 교란하게 하기도 하고, 성안의 아군을 성원토록 하는 기본 방어 구도를 마련하였습니다.

 

진주대첩은 김성일의 이러한 기본 계획과 지휘에 따라 염초와 총통 제조, 사격 훈련, 성지 수축 등 평시에 수성 준비를 철저히 한 외에 싸움이 시작되자 상하 관민을 잘 이끌어서 여러 날에 걸친 적의 공격을 물리친 목사 김시민의 공과 곤양군수 이광악, 판관 성수경 등 각자가 맡은 지역을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지킨 수성장병 모두의 공과, 진주성 밖 사방에서 왜적들을 공격하거나 성안의 관민들을 성원한 전라도를 포함한 여러 곳의 의병 등 외부 지원군의 공이 한데 어우러져 이룩된 승리입니다.

 

진주대첩의 영향

 

이제 진주대첩으로 얻은 효과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진주대첩으로 조선은 경상우도 내륙과 호남으로의 왜군 침범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왜적의 호남 침입을 막은 것은 호남 그 자체를 지켜서 국가 중흥의 기틀을 확보했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시에 경상우도 수군과 전라도 수군의 배후를 지킨 것이 되어 양도 수군의 병력 충원과 식량 조달, 군비 마련 등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배후로 왜적이 쳐들어오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크나큰 지원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왜적을 크게 무찌름으로써 전국적으로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켰습니다.

 

진주대첩이 미친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임진왜란을 흔히 7년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첫해, 곧 1592년에 왜적의 공세는 가장 치열하였으며, 명나라는 제대로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으며,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여 국왕이 국토를 버릴 생각까지 한 그런 때로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남쪽의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인 진주성에서 왜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쳐서 승리를 거둔 것은 평안도와 함경도에 유둔하고 있던 왜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으로, 이는 이후 그들의 작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음력 10월이면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혹한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조선을 침입한 왜군들이 보급 기지로 생각하였던 호남 공략에 실패한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적들이 이때 받은 타격에 대한 복수로 명과 왜 사이에 강화 교섭이 진행 중이던 이듬해 6월에 거의 총력을 경주 하다 시피 하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한 다음, 성을 허물고 무자비하게 살육을 자행한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임진년 진주대첩은 단순히 호남과 호서의 방어로 군수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다는 차원을 넘어서 임진왜란 전국(戰局)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완전히 바꾼 승첩이며, 조선의 목숨을 구한 위대한 승리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史實)’은 진주성 대첩의 현장 비문에서도 확인됩니다. 곧 진주성에 조성된 ‘진주대첩 계사순의 제단(晉州大捷 癸巳殉義 祭壇)’의 비문(碑文)(허선도 찬 許善道 撰)에서는 임진년 진주대첩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패한 전쟁이 아니다.… 당시 호남은 나라의 부고(府庫)였고 영우(嶺右)는 호남의 문호(門戶)였다. 적의 전라도 침공은 남해 상 및 금산(錦山) 진안(鎭安) 통로로도 감행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전주로 이르는 첩경(捷徑)이 낙동강을 건너 영우(嶺右)를 통하여 팔량치 또는 육십령을 넘어가는 길이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되풀이 되었다. 이처럼 영우와 호남은 순치의 관계여서 영우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의 전도는 가망이 없었다. 실로 이 때 영우 일대는 적에게는 반드시 쟁취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꼭 사수해야 할 요충이었다. 그러므로 중심지인 이 진주에서 일대공방전이 벌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임진년 시월(十月)의 진주성대첩이다. 이 무렵 영우일대는 내경외의(內敬外義)를 몸소 실천하는 남명 조식의 교화에 힘입어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령의 곽재우 ․ 거창의 김면 ․ 성주의 정인홍 등이 의기를 높이 들고 초유사 김성일의 주획(籌劃) 아래 각 전선을 방수하였다. 6일간에 결친 진주성 싸움은 이 같은 충의와 선전의 총결산이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통솔 하에 수천의 군사가 몇 배의 적군이 온갖 기기 및 기계로서 악착같이 밀어붙이는 데도 끝가지 물리쳤다. 그리하여 전에 이루어진 해상 승첩 및 이치 웅치에서의 혈전과 삼위일체로 호남방수를 이룩하였으니, 이 전승은 임진 삼대첩의 하나로 찬양된다.…”

 

맺음말

 

오늘 서두에서도 인용하였지만,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이처럼 위대한 승첩을 이룩하는데 시종일관 총체적으로 기획하고 지휘함은 물론 휘하의 의병과 관군 등을 잘 조정 ․ 지휘하여 적의 경상우도를 통한 전라도 진입을 여러 차례 막은 김성일의 공적을,

 

이때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서 서해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 등은 진주의 관요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김산(金山)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하려 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의 방어에 힘입어 군수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 때의 장사들이 방어하여 지킨 공로가 또한 대단하다 하겠다”고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에 남는 국가 공식 역사서인 『실록(實錄)』의 기록과 전적지 현장에 서있는 ‘진주성대첩비(晉州城大捷碑)’ 비문의 기록은 이처럼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임진년 진주성대첩에 관한 세간의 인식은 이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 발표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황에서부터 진주성 대첩까지의 전반적 상황을 다시금 고찰해본 것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경청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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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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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의성김씨 문충공파(鶴峯 金誠一) 친목회 행사시에 
학봉기념사업회 김명준 사무총장님께서 주신자료를 제가 대신하여 게시하였습니다.

학술적인 자료를 비롯한 또다른 자료들을 주시기로 하셨으니 보내어 주시는대로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부할수 있는 자료들을 주셔서 많은 분들에게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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