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진령(隔塵領)의 절경(絶景) 도연폭포(陶淵瀑布)
  


안동시내에서 동쪽으로 18㎞, 국도를 따라 20분 쯤 차를 달리다가 망천(網川)에 이르러 오른쪽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 울퉁불퉁한 돌길을 20분쯤 달리면 길이 오르막이 되면서 오른쪽에 격진령(隔塵領)의 수려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빠져 흐르는 도연폭포가 보인다.

격진령은 폭포 옆에 깎아 지른 듯이 따로 솟은 높이 50m, 길이 300m의 바위산으로서 층암절벽의 기화요초(奇花妖草)와 산마루에 솔숲을 얹고 있는 모습이 천하일색이다.  격진령을 아늑히 둘러 싼 높고 짙푸른 산색과, 검은 벼랑밑을 미끄럽게 흐르는 파아란 물빛과 햇빛 아래 더욱 하이얀 돌빛과의 조화...... 폭포 주변의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을 연발케 한다.

이 폭포는 아득한 옛날엔 격진령 산허리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물이 멀리 산자락을 돌아 흐르던 것이 오랜 세월 홍수와 급류가 산허리를 드리받아 그만 산을 무너뜨리고 바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 요사이도 홍수가 지면 물이 비좁은 폭포로만 다 흐를 수가 없어 멀리 산자락을 돌아서 흐른다.
폭포의 높이는 불과 4m에 불과하지만 낙동강 지류의 수개의 폭포중 가히 으뜸이다.

삼백리 상류인 일원산에서 발원(發源)하여 흐르는 반변천 본류인 만큼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특히 홍수때 이 폭포를 통과하는 수량(水量)은 전국의 어느 폭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폭포 양편 닳고 닳은 거대한 규암의 형해(形骸)는 이름 그대로 기름바위요, 폭포밑은 질그릇 같이 움푹 패여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고, 폭포를 뛰어 오르지 못해 모인 고기떼들로 천렵꾼 또한 성시(盛市)를 이룬다.

폭포 왼쪽 솔숲 속에는 조선조(朝鮮祖) 명유(明儒),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縕) 선생의 유허비각(遺墟碑閣)과 은거(隱居)하던 초당(草堂)과 정자(亭子)가 있고 옛적엔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 육부자(六父子)가 공부하던 장육당(藏六堂)도 있었다.
격진령 암벽 중허리에 새겨진 낙연현류(落淵縣流)·선유창벽(仙遊蒼壁)·표은고풍(瓢隱古風) 등 세칭 하남삼절(河南三絶)의 문구를 보아서도 이 곳이 얼마나 사람들의 기림을 받던 곳인가를 알만 하다.

돌아 프르는 물을 따라 격진령의 끝으로 가면 돌다리를 건너 선찰서 입구가 보인다.  사변 전 화재로 지금은 산신각만 남아 있고 마당 앞에는 석간수만 쉼없이 흐르며 옆 벼랑 위엔 쪽대문만 남은 선유정 옛터 또한 세월 속에 까마득히 잊혀져 가고 있어 적막하고 유현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교통이 다소 불편하여 찾는 이가 많이 않아 오히려 멋을 아는 이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이제 이 폭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고 영영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아쉬움을 금할 길 없어 여기에 천렵하던 일화를 하나만 기록해 둔다.

"陶淵瀑布漁, 個個盤上漁, 作時然後食, 合江恨無書"

이 한시는 도연폭포에서 고기를 잡아 식사에 임하던 선비들이 글모르는 합강 어른을 놀려 주고자 한시를 짓는 자만이 고기를 먹자고 합의하므로 글모르는 합강 어른이 한탄한 시로서 정말 재미있는 글이라고 하여 오늘날 전해오고 있다.

시의 뜻은 "도연폭포 고기가, 개개인 반위에 올려져 있는데, 시를 지은 후에 먹도록 하자 하니, 합강은 글모르는 것이 한이로다." 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사람들의 풍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격진령(隔塵領)의 절경(絶景)과 도연폭포(陶淵瀑布), 先祖님들 경연 하시던 停子가 뒤로보입니다,
P,S, 瓢隱 .諱(시온)온자는 기둥 온자 나무목 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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