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公山과 壬辰倭亂과 八公山上庵會盟                    

                   金鍾協 (대구광역시팔공산자연공원관리사무소장)                                        

 1, 八公山은 우리 대구의 진산으로 산자락을 굽이쳐 흐르는 琴湖
    江과 더불어 「달구벌」의 어버이 같은 존재다. 
    정기서린 장엄한 산봉우리와 수려한 산세 · 奇巖怪石과 老巨樹
    · 골짜기마다 맑은 계곡과 폭포와 明鏡止水 같은 貯水池 · 우리
    나라 천연기념물1호인 達城側柏樹林 · 광대한 산악에 꿋꿋하
    게 자생하는 희귀야생초와 아름다운 야생화가 한데 어우러지
    고 온갖 산새(鳥)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어서 自然史博物館
    과 같은 천혜의 自然公園이다.
    봄(春)에는 매화와 목련 · 참꽃과 철쭉 · 개나리와 벚꽃 등이 화
    사하게 피어나고, 여름(夏)에는 울창한 녹음 속에 계곡마다 맑
    은 물소리가 교향악을 연주하며, 가을(秋)에는 울긋불긋 불타
    는 단풍으로 물들이고, 겨울(冬)에는 하얀 눈 덮인 山峰과 아름
    다운 雪花가 장관을 이루어 사계절 철따라 확연히 변신을 거듭
    한다. 
    갓바위에서 架山山城사이 30km가 수많은 바위山頂으로 이어
    지고 東西南北 사통팔달 종횡으로 연결된 능선마다 풍경과 전
    망이 달라서 어디서나 오르고 내릴 때에 짜릿하고 특성 있는
    쾌감을 더해주는 매혹적인 등산로가 일년 365일 山을 좋아하
    는 전국의 등산객들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산자락마다 桐華寺 · 파계사 · 부인사 · 銀海寺 · 송림사 · 禪本
    寺 · 관암사 · 인각사 · 제2석굴암(三尊石窟三尊佛像) 등 명승고
    찰이 있고 佛敎의 유적과 유물이 즐비하여 한국불교의 聖地로
    자리매김하면서, 冠峰石造藥師如來坐像(갓바위불상)을 중심으
    로 우리나라 藥師信仰의 제일가는 도량(道場)이다.
    新羅時代엔 五岳(동악:토함산 · 서악:계룡산 · 남악:지리산 · 북
    악:태백산 · 중악:공산)중 中岳(父岳)의 위상을 차지하여 하늘
    에 제사지내던 祭天壇이 있는 靈山이고, 한국불교의 최고봉인
    元曉大師가 수도 득도하고 高僧大德을 많이 배출한  聖山이며,
    삼국통일의 명장 金庾信 장군을 비롯한 花郞들의 호연지기를
    키운 名山이기도 하다.
    高麗時代엔 태조 王建과 얽힌 사연이 오늘날까지 王山 · 파군
    재 · 안심 · 반야월 · 一人石 등 곳곳에 전해져 오고 있고 蒙古
    의 침입 시에는 항몽의 기지가 되기도 했었다.

    朝鮮時代에는 임진란이후 義兵과 僧兵활동의 본거지가 되었으
    며, 6.25동란 때에는 공산게릴라의 출몰과 준동도 있었으나 洛
    東江戰線을 사수한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八公山은 빼어난 산세와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유구
    한 역사를 통해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지켜오면서 우리고장 주
    민들의 심신수련장으로 푸근한 휴양처로, 찬란한 역사와 문화
    의 보고로, 오늘날 만인에게 사랑받는 自然公園으로 위상을 키
    워가고 있다.
    八公山은 고려 태조 王建 등과 얽힌 사연과 전설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口傳되거나 여러 기록물에도 널리 전파되어
    있다.
    그러나 팔공산이 近世나 現代에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그부문에 대한기록과 유적유물의
    발굴이나 조사 연구 활동이 미흡한 것은 매우 큰 아쉬움이다.
    우리고장의 歷史를 바로 알고 正體性과 位相을 바로 세우기 위
    해서도 이 지역 주민들의 소중한 자산인 八公山에 대한 深究와
    資料의 集大成을 위한각계의 더많은노력과 활동을 기대하면서
    임진란 중 八公山의 중요한 救國活動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壬辰倭亂 관련문헌에 따르면 임란 중 경상우도관찰사 鶴峯 金
     誠一 先生(1538~1593)께서 桐華寺에 머물면서 官軍과 義兵의
     협력을 조정지휘하고  의병활동을 지원 격려한 기록이 있고,
     四溟堂大師(任惟政 : 1544~1610)가 동화사에 僧軍司令部를 두
     고 승군을 조련 지휘하던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편액이 동화사경내 鳳棲樓에 지금도 걸려있는 것으로 봐서도
     팔공산은 임진란 때 義兵과 僧兵들의 救國活動의 本據地가 되
     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학봉 김성일 선생께서 1592년 4월 11일 慶尙右道兵馬節度使
     에 제수되어 昌原에 위치한 本營으로 부임하던 중 4월 11일
     日本 本土를 출병한 왜군이 4월 13일 釜山 東萊에 출현하여
     일본파견통신사(1590년 4월 29일 부산출국 1591년 1월 28일
     부산귀국) 귀국보고와 관련한 허물로 主上(宣祖)으로부터 鞠
     問(註 : 중대한 죄인을 심문)의 命이 있었다. 
 
     그러나
     朝廷宰相들과 王世子등의 간곡한 구원과 김성일 慶尙右道兵
     馬節度使가 昌原인근에서 임란 발발 후 최초로 왜적의 首級
     둘을 베고 각종 戰利品을 노획한 후 조정에 올린 戰果報告의
     狀啓에서 보인「一死報國 臣之願也」의 결의와 충의를 신뢰
     하고 嶺南士民들의 두터운 信望을 가상히 여긴 主上께서 4월
     26일 학봉 선생을 慶尙道招諭使(註 : 국란시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관직)로 임명하였다.
     김성일 초유사는 5월초 咸陽에서 직접 招諭文(註 : 사민들의
     창의를 독려하는 초유사 격문)을 지어 布告하여 왜적의 침략
     으로 山中으로 피신해 있던 嶺南士民들을 의병의 대열에 모이
     게 하고, 金沔(1541~1593) · 鄭仁弘(1535~1623)을 의병대장으
     로 삼고, 각 고을마다 召募官(註 : 의병을 모집하던 임시관직)
     을 뽑아 兵士를 징발케 하고, 의병장 郭再祐(1552~1617)등을
     격려하여 왜적에 대항케 하였다.

     임진(1592)년 6월 1일 조정에서 경상도를 좌 · 우도로 나눌 때
     김성일 초유사는 慶尙左道觀察使로 임명됐으나 8월 11일에야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김성일 초유사가 경상좌도관찰사로 임명된 소식을 접한 慶尙
     右道民들의 열화와 같은 右道留任上疏에 따라 김성일 경상좌
     도관찰사는 9월초에 昌寧 · 靈山 · 密陽 · 淸道 · 慶山 · 河陽 등
     지를 거쳐 右道에서 左道로 부임하던 도중 新寧에서 다시 慶
     尙右道觀察使에 제수하는 명을 받아 安東의 先塋에 省墓하고
     晋州監營을 향하던 길에 9월14일 대구의 桐華寺에 머물게 되
     었다.
    
(註 : 경상 좌·우도 관찰사임명은 조정에서 각각 6월1일과 8월7일에 敎旨를 내렸으나 당시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여러 기록마다 임명과 제수의 날짜에 약간의  혼선이 있음)
 
 
     팔공산 동화사에서 慶尙左道兵使 朴晉(생몰미상)을 만나 의병
     장과의긴밀한 협력을 간곡하고도 엄중히당부하고 이미초유사
     때 의병대장으로 삼았던 權應銖(1546~1608)를 병사로 승진케
     하고 의병활동을 격려하여 義兵들의 士氣를크게 진작시켰다.

 3, 壬辰亂은 우리의 선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의병
     을 창의하여 침략왜군에 대항했던 세계전쟁사에 일찍이 없었
     던 官軍보다 民兵이 주도한 이 땅의 義兵活動史이기도 하다.
     임진란초기에 경상도 지역에서 불씨를 지핀 義兵倡義는 조선
     팔도 전역에 열화와 같이 확산하였으며 우리 대구지방은 팔공
     산이 의병활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大邱市史나 壬辰嶺南義兵史등에 의하면 1592년 4월 21일 大
     邱城이 왜군에 점령당하자 達城 · 慶山 · 永川 · 軍威 · 漆谷 등
     대구인접 각지의 守令들은 모두 피신하고 많은 백성들은 팔공
     산으로 피난했다.

     八公山은 지세가 매우 험준한 難攻不落의 鐵甕城으로 이곳에
     서 영남지역 선비를 중심으로 수많은 의병을 창의한 여러 차
     례의 公山會盟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분명한 기록과 큰
     공훈을 남긴 것은 嶺南32賢의 「八公山上庵會盟」이라 짐작
     된다.
     壬辰年의 왜군침략으로 朝鮮八道가 소용돌이치던 1596(丙申)
     년 9월 15일 첩첩산중에 소재한 八公山上庵(註 : 은해사나 파
     계사의 후산에 소재했던 암자로 추정)에는 영남의 각지에서
     온 서른두 분의 선비들이 은밀히 모였다.

     이 모임에는 임진란 중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도초유사
     · 경상좌·우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92년 10월의 晋
     州大捷을 이끄시고 1593년 4월 29일 晋州의 慶尙監營에서 병
     환으로 순국하신 학봉 김성일 선생의 장자인 愛景堂 金潗
     (1558~1631), 학봉 선생의 생질인 安東의 岐峯 柳復起
     (1555~1618), 김성일 초유사의 의병소모관으로 公山城에서 창
     의한 대구지역 의병활동의 중심인물인 樂齋 徐思遠
     (1550~1615), 尙州지역 의병소모관 愚伏 鄭經世(1563~1633),
     초유사의 참모였던 寧海의 의병장 淸愼齋 朴毅長(1555~1616)
     과 朴瑜(1576~1619) 부자, 일찍이 김성일 초유사와 생사를 함
     께하기로 결심하고 운명직전의 김성일 관찰사가 피신을 종용
     했으나 병환중의 관찰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殉國臨終
     을 지켰던 玄風의 의병장 大庵 朴惺(1549~1607), 김성일 초유
     사의 휘하에서 의병에 가담하고 紅衣將軍 忘憂堂 郭再祐와 함
     께 火旺山城을 사수했던 선산의 三松 鄭邦俊(1557~????), 학
     봉 선생과 교유했던 寧海儒林의 선비 雲嶽 李涵(1554~1632)과
     惺軒 白見龍(1543~1622), 당시 61세로 최고령이던 永川의 의
     병장 湖叟 鄭世雅(1535~1613), 당시 18세 최연소자였으며 19
     세에 최연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靑松의 芝嶽 趙東道
      (1578~1668)등등... 

      宣武原從功臣錄이나 倡義錄 · 會盟錄 · 선현들의 文集 등에
      서 국란극복에 뚜렷한 공훈을 세웠다고 기록된 쟁쟁한 人物
      들이 원근에서 왜적의 눈을 피해가면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
      쓰고 험준한 팔공산을 찾아 집결했던 것이다.  八公山上庵에
      서 회합하면서 意氣投合한 서른두 분은 각자의 字를 넣어 ‘朝
      廷에 충성을 맹서하고, 外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창의를
      결의하며, 聖君과 선비가 힘을 합쳐 太平盛世를 기원’하는 서
      른두 절의 五言聯句 戱言詩를 남겼으니 이는 곧 壬亂義兵史
      와 八公山義兵活動의 자랑으로 후세에 참으로 큰 교훈을 주
      고 있다.

     첫째 400여 년 전 通信과 交通수단이 어려웠던 戰亂 중에도
      沙鉢通文을 통해 嶺南의 각 고을과 門中과 儒林의 대표적 人
      物들이 험준한 팔공산까지 찾아 모여 決死報國을 결의한 憂
      國衷情이다.

     둘째 평소 高邁한 學德을 쌓아 각 지역에서 존경받아온 指導
      者로 의병활동을 주도해온 중심인물들이 倭賊討伐을 위한 정
      보교환 · 병력 및 물자동원 · 작전책임지역분담 등 상호 긴밀
      한 협력과 효율적인 역할분담을 진지하게협의한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한 슬기로움이다.

     셋째 우리의 선현들이 生死의 갈림길인 戰場에 임하면서도
      각 자의 이름(字)을 넣어 五言聯句의 戱言詩를 연작하는 당당
      하고 여유로운 浩然之氣와  멋스러운 風流世界를 보여준 기
      개 높은 선비정신이다. 

 4, 八公山上庵會盟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남긴 望潮堂實紀 · 芝嶽
     實紀 · 守拙堂逸稿 · 湖叟實紀 · 淸虛齋集 · 水月齋遺集 · 岐峯
     先生逸稿 · 梅窩實紀 · 蘭皐先生遺稿 등 여러 문헌에 똑 같은
     내용의 五言聯句戱言詩가 수록되어 있음은 八公山上庵會盟을
     證據하는 대단히 값지고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아닐 수 없다.
  
     八公山上庵會盟 서른두 분의 生涯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영남
     각 고을과 문중과 유림의 대표적 인물일 뿐 아니라 학덕이 높
     은 선비들로써 靑史에 길이 남을 功勳을 세운 義兵將으로 후
     세에 존경받고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八公山上庵會盟이 있은 지 4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난
     2002년에 대구에서 32선현들의 後孫들이 모여 ‘남다른 世誼를
     돈독히 다지고, 선현들의 忠義와 學德과 功勳을 추모하며, 遺
     志와 遺訓과 遺業을 기리기 위하여’ 「先賢公山益聯追慕會」
     (약칭 : 공산회)를 조직하였다.

     2002년 3월에 발기하여 4월에 창립한 公山會는 2004년도에 서
     른두 분의 생애를 요약한 「八公山上庵壬亂倡義諸賢行錄」을
     발간하고 앞으로「八公山上庵會盟戲聯詩碑」건립 등 팔공산
     상암회맹선현현창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公山會의 이 같은 활동은 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
     후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공통의 책무로 매우 가치 있는 사업
     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八公山上庵會盟先賢顯彰事業은 서른두 분 후손 들 만
     의 몫이 아니라 우리 地域社會와 國家에서도 적극 성원하여
     추진되어야 함이 마땅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된다.

     筆者는 大邱廣域市의 八公山自然公園 관리책임을 受命하여
     일찍이 400여 년 전에 팔공산과 깊은 緣을 맺은 鶴峯선생과
     愛景堂의 後孫으로 남다른 감회를 느끼며 큰 애정을 가지고
    「팔공산지킴이」역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새롭게 다짐하면서
     팔공산상암임진창의제현행록에서 「八公山上庵留時諸益各呼
     字戲聯」을 여기에 옮겨 소개하여 우리고장의 큰 자랑이요 소
     중한 자산인 八公山의 正體性을 바로 세워 널리 알리고 位相
     을 키워 가는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八公山上庵留時諸益各呼字戲聯

當時年歲

戱          聯

世 居 地

朴匪虎(박비호)

渭老

丙午

五十歲

渭老遇聖主(明宗一, 一五四六)

위노(渭老)가 훌륭한 임금을 만났고,

北溪

咸陽

醴泉渚谷

鄭大方(정대방)

道修

乙丑

三十一歲

斯文景道修(明宗二十, 一五六五)
 
사문(斯文)이 도수(道修)를 우러러 보도다.

東溪

慶州

晋州

鄭邦俊(정방준)

君弼

丁巳

三十九歲

君弼�良臣(明宗十二, 一五五七)

임금을 보필(君弼)하면 어진 신하에게 상을 내리고,

三松

草溪

善山草谷

徐仁忠(서인충)

邦輔

甲寅

四十二歲

邦輔翊聖朝(明宗九, 一五五四)

나라의 재상(邦輔)은 성군이 다스리는 조정을 돕도다
.

望湖堂

達城

蔚山南玉

黃廷幹(황정간)

公直

戊午

三十八歲

忠心推公直(明宗十三, 一五五八)

충성스러운 마음은 공평하며 정직(公直)한 사람을 추천하고,

道川

長水

尙州

朴毅長(박의장)

士剛

乙卯

四十一歲

壯略得士剛(明宗十, 一五五五)

장한 지략은 사강(士剛)을 얻었도다.

淸愼齋

務安

寧海陶谷

朴  楡
(박  유)

伯獻

丙子

二十歲

埰玉思伯獻(宣祖十, 一五七六)

옥돌을 캐는 데는 백헌(伯獻)을 생각하고,

 

務安

朴毅長의長子

趙東道(조동도)

景望

戊寅

十八歲

修道倚景望(宣祖九, 一五七八)

돌을 닦는 데는 경망(景望)에게 의지하네.

芝嶽

咸安

靑松薪城

李宜潛(이의잠)

炳然

丙子

二十歲

炳然傾丹悃(宣祖九, 一五七六)

병연(炳然)은 성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기울이고
,

守拙堂

驪江

慶州良洞

崔山立(최산립)

立之

庚戌

四十六歲

立之屹東嶽(明宗五, 一五五○)

입지(立之)는 동악(東嶽)에 우뚝하네.

愚庵

全州

善山海平

鄭世雅(정세아)

和叔

乙未

六十一歲

堯庭命和叔(中宗三十, 一五三五)

요임금 조정은 화숙(和叔)에게 일을 시키고,

湖叟

烏川

永川大田

孫  曄
(손  엽)

文伯

甲辰

五十二歲

魯國仕文伯(中宗三十九年, 一五四四)

노(魯)나라는 문백(文伯)에게 벼슬을 시켰네.

淸虛齋

月城

慶州良洞

金見龍
(김현룡)

德普

庚戌

四十六歲

德普九二占(明宗五, 一五五○)

덕보(德普)는 구이(九二)를 점쳤고,

水月齋

水原

延日南面

呂大老(여대로)

聖遇

壬子

四十四歲

聖遇千一運(明宗七, 一五五二)

성우(聖遇)는 천재일우의 운수로세.

鑑湖

星州

金山耆洞

鄭經世(정경세)

景任

癸未

三十三歲

經國委景任(明宗十八, 一五六三)

나라를 다스림은 경임(景任)에 맡기고,

愚伏

晋陽

尙州愚山

權  濟
(권  제)

致遠

戊戌

五十八歲

行道思致遠(中宗三十三, 一五三八)
 
도를 행함에는 그 은택이 멀리까지 미칠 것(致遠)을 생각하라.

源塘

安東

山淸丹山

金  軫
(김  진)

天極

乙酉

四十七歲

冀闕象天極(明宗四, 一五四九)

기궐(冀闕)은 천극(天極)을 본뜬 것이고,

道淵亭

 

慶山慈仁

當時年歲

戱          聯

世 居 地

尹  潚
(윤  숙)

士淵

癸丑

四十三歲

學海注士淵(明宗八, 一五五三)
 
쉬지 않고 공부하면 선비의 세계(士淵)에 들어간다.

 

坡平

醴泉龍宮

柳復起(유복기)

聖瑞

乙卯

四十一歲

慶雲呈聖瑞(明宗十, 一五五五)

경사가 생길 조짐이 있는 구름은 성서(聖瑞)를 나타내 보이고
,

岐峯

全州

安東水谷

金  潗
(김  집)

活源

戊午

三十八歲

混泉連活源(明宗十三, 一五五八)

물이 솟는 샘은 장유수(長流水)의 원천(活源)에 이어진다.

愛景堂

義城

安東琴堤

朴  惺
(박  성)

德凝

乙酉

四十七歲

德凝能潤身(明宗四, 一五五八)

덕이 엉기면(德凝) 몸이 윤택해지고,

大庵

密陽

玄風倉洞

權世春(권세춘)

景和

庚子

五十六歲

景和已殷春(中宗三十五, 一五四○)

햇빛이 온화(景和)하면 이미 봄은 무르익네.

栗軒

安東

山淸丹山

曺好益(조호익)

士友

乙巳

五十一歲

遠方從士友(仁宗一, 一五四五)

먼 곳의 사우(士友)를 따르니,

芝山

昌寧

永川芝日

李  涵
(이  함)

養源

甲寅

四十二歲

眞工涵養源(明宗九, 一五五四)

참된 공부는 마음의 본원을 함양(養源)함일세.

雲嶽

載寧

寧海仁良

權士諤(권사악)

明彦

丙辰

四十歲

昌朝選明彦(明宗十一, 一五五六)

창성(昌盛)한 조정은 명석한 선비(明彦)를 가려 뽑고,

梅窩

安東

慶州安康

孫起陽(손기양)

景徵

己未

三十七歲

聖世多景徵(明宗十四, 一五五九)

성군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상서로운 징조(景徵)가 많도다.

聱漢

密陽

密陽茶院

徐思遠(서사원)

行甫

庚戌

四十六歲

高遠能行甫(明宗五, 一五五○)

고상하고 심원(深遠)한 것을 능히 행하고(行甫),

樂齋

達城

大邱伊川

鄭三畏(정삼외)

德敬

丁未

四十九歲

修省貴德敬(明宗二, 一五四七)

수양과 반성에는 덕과 경(德敬)이 귀하도다.

望慕堂

迎日

慶州霞谷

李汝璉(이여연)

國寶

己巳

二十七歲

金玉非國寶(宣祖二, 一五六九)

금과 옥은 나라의 보배(國寶)가 아니오.

竹軒

 

淸道士洞

白見龍(백현룡)

文瑞

癸卯

五十三歲

龍鳳是文瑞(中宗三十八, 一五四三)

용과 봉은 문채의 성서(文瑞)로 움 일세.

惺軒

大興

寧海元邱

南慶薰(남경훈)

應和

壬申

二十四歲

有唱相應和(宣祖五, 一五七二)
 
부르면 서로 응하여 화답(應和)하니.

蘭皐

英陽

慶州普門

權師聖(권사성)

時可

乙亥

二十一歲

時可太平世(宣祖八, 一五七五)

때는 가히(時可) 태평성세로세.

龍溪

安東

豊基臥龍



※ 朝鮮 宣祖二十九年(丙申 一五九六) 九月 十五日 八公山上庵에서 字를 불러 희롱으로 연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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