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어, 마을 이름까지를 방적동(邦適洞)이라 했다니, 곧 「나라가 바뀌었으니(邦之革矣), 나는 어디로 갈것인가(我安適歸)의 뜻으로였다고 하는데, 그 방적동이란 지금의 안동시대 율세동(栗世洞)으로, 속칭「밤적골」은 방적동에서 음전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천( )의 증손되는 만근(萬謹)이 해주오씨(海州吳氏)인 그 처가가 임하(臨河)에 살았기에 풍광도 아름답고 생활 조건이 좋은 그 이웃 마을 천전(川前)에 옮겨 정착하게 된 것이라 한다.


川前에 정착한 만근의 손자 청계(靑溪)가 글을 좋아하는 선비로 일찍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여러군데 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이바지했으며, 그 아들 五형제가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맏아들 약봉(藥峰), 넷째 학봉(鶴峰), 다섯째 남악(南嶽)이 文科에 오르고, 둘째 귀봉(龜峰), 셋째 운암(雲巖)이 進士로, 그 五형제 모두가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에 추앙되어 세상이 오룡(五龍)이라 일컬었으며, 그 중에서 넷째 학봉(鶴峰)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도학(道學)의 거봉(巨峰)으로 국사에 활약한 명신이었고, 임진왜란에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긴 운천(雲川)이며, 약봉의 손자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지촌(芝村), 역시 약봉의 후손으로 영남 유학(儒學)의 거장(巨匠)인 제산(霽山)이 있어, 학봉의 후손인 조선 말기의 석학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과 함께 퇴계학맥의 삼고봉을 이루었으며, 역시 학봉의 후손으로 권신의 비위(非違)를 탄핵하다가 북관에 유배, 귀양살이의 기록을 유려한 필치로 엮어, 가사(歌辭)문학의 명편 북천가(北遷歌)를 남김으로써 우리 국문학사에 두둑한 위치를 차지한 겸와(謙窩), 왜적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고향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등, 교육·청년운동에 발분하다가, 장지(壯志)를 품고 분연히 압록강을 건너, 구국(救國) 제단에 몸을 바친 일송 동삼(一松 東三) 동만(東萬) 형제 등 많은 인물을 냈다.

의성김씨는 예로부터 글 잘하고 행실 높은 선비가 대를 이어 청계공 이래로 무릇 양질의 문집을 냈다지만, 초야에서 글 읽고 몸 닦아 조촐한 생애에 자적(自適)해 온 맑은 기풍이 가문에 이어 내려, 왜정때는 아예 관직를 외면하여, 공직이라고는 교육에 종사한 이들이 있었을 뿐이다. 靑溪의 후예중 남악(南嶽)파는 예천 금당실(醴泉 龍門面 金谷洞)에, 학봉파(鶴峰派)는 金溪(安東 西後面 金溪里)에, 지촌파(芝村派)는 지례(芝禮, 安東 臨東面 芝禮洞)에 그 世居의 터전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졌으나, 그 본산인 내 앞에는 큰 종가와 작은 종가 등 웅장한 옛 건물이 많으며, 보물 450호로 지정된 큰 종가는 안동의 많은 문화재급 옛 건물 가운데서도 매우 특이한 양식이어서, 고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 있으며, 역대 조상들의 유묵(遺墨)등 귀중한 유물이 간직되어 있고, 작은 종가에는 의성김씨 문중의 四寶로 꼽히는 옥피리, 문장검(유실), 연하침(烟霞枕) , 매죽연(梅竹硯)이며, 보물 484호로 지정된 임진왜란 때 운천의 호종일기(扈從日記)등 유물들이 간직되어 온다.

◎ 개호(開湖) 숲

의성김씨 청계공파의 본산인 천전마을 앞 반변천 가에는 개울을 따라, 약 1키로 쯤의 울창한 소나무숲이 길게 펼쳐져 있다. 개호(開湖)숲이라 일컫는 이 숲은 개촌조(開村祖)인 통레공 만근(通禮公 萬謹)이  조선 成宗무렵에 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을미년 대홍수로 많이 유실되어, 운천의 발의(發義)로 다시 조성했다는 사연이,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문중규약인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의 서두에 전한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 규약을 엄중히 지켜, 조상이 끼친 알뜰한 자연보호정신을 계승, 조림한 이래 400여년에 쟁기를 대 본적이 없는 이 開湖숲은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 일직 귀미파

영가지(永嘉誌) 일직현(一直縣) 귀미촌(龜尾村) 조에 보면 "산과 물이 서로 얽혀 안고 돌아, 마치 거북과 뱀이 모인 모양 같아서 귀미(龜尾)라고 한다. 「안귀미」가 있고, 또 안망(安望)촌· 소호(蘇湖)촌·성남(星南)촌이 있는데, 예로부터 명가가 많이 살았으며, 형승(形勝)으로도 한 고울(縣)의 으뜸이다" 라고 되어 있다.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큰 길을 따라 약30리, 일직면 소재지인 운산(雲山)을 막 지나자, 국도에서 갈려, 소호리 마을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뚫린 비포장도로로 약 5리, 「안망실」뒷 고개를 넘으면 동서로 길게 트인 동부(洞府)가 열리는데, 여기가 바로 귀미파 의성김씨의 터전인 속칭 「안귀미」로, 행정구역으로는 일직면 귀미리이다.
멀리 일월산에서 떨어진 한 갈래 지맥이 남으로 구불구불 백여리를 뻗어 내리다가, 여기에 이르러, 한구역 명당 터전을 배포하고자, 마치 자를 대고 끊어낸 듯 뚝 잘려, 동서로 길게 뻗은 직선 언덕을 이루었다. 이 언덕을 배경으로 아늑히 깃든 남향 마을 귀미는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귀계천(龜溪川)이 바로 마을 서쪽 옆에서, 낙동강의 큰 지류의 한 줄기인 미천(眉川)에 합류된다. 마을 동쪽·서쪽에 들판이 열리고, 주위의 나지막한산들이 예쁘고 정다워, 그지없이 아늑하면서도 양명하고 수려한 환경은 영가지에 이른바 그대로, 형승이 관연 외귀미와 더불어 한 고을에서 으뜸으로 일컬을 만 하다.

17세기 중기(孝宗)때 진사 근(近)이 그 아우 원(遠)과 함께 여기에 터전을 열어 정착, 그 후손들이 뿌리를 내려, 이래 300여년을 세거해 오는 귀미의 의성김씨는 역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석(錫)을 시조롤 하며, 고려의 태자첨사(太子詹事)로, 공민왕때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함에 공을 세운 용비(龍庇)를 중시조로, 그리고 고려말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어수선한 국정을 개탄, 벼슬을 던지고 안동에 낙향한 거두(居斗)를 입향조(入鄕祖)로 한다.

세종임금때 하위지(河緯地)·성삼문(成三問)등과 동방(同榜)급제로, 집현전(集賢殿)학사에, 승문원사(承文院事)로, 世宗文運에 공헌하고,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벼슬을 던지고, 향리에 숨어버린 한계(漢啓)는 거두의 증손이며, 귀미 의성김씨의 파조(派祖)인 진사 만흠(萬欽)은 충신 한계의 둘째 아들이다. 만흠(萬欽)의 증손 안계(安繼)가 유일재(唯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공헌하고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으며, 귀미에 터를 열은 近·遠 형제는 바로 安繼의 아들이다.

산천의 영기(靈氣)를 힘입어 귀미에서는 문한(文翰)에, 행실 도타운 선비를 잇달아 배출했으니, 근·원형제의 후손에서 진사 12장, 문과 一장에 문집(文集) 九질을 냈고 뛰어난 문장 학행에, 국난(國難)을 당하여, 분연히 명을 던져 구국(救國)에 이바지한 의사들도 있었다.

근(近)의 6대손 굉(宏)이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원년 문과에 올라, 순조때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으며, 문장·글씨에 뛰어났고, 그의 증손 도화(道和)는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莩事)를 지냈으며, 뛰어난 문장과 높은 행실로 사림의 우러름을 모은 유림(儒林)의 거벽(巨擘)으로, 고종 을미(서기 1895)의 변에, 고장 선비들이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의기(義旗)를 들때, 대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구국제단(救國祭壇)에 헌신한 후손인 영주(永周)는 병오년(서기 1896) 왜적과 친왜(親倭)역당을 토멸하고자,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의기로 의병진(義兵陳)의 선두에서 분전하다가, 청송지구에서 전사했으며, 그 부인 남자현(南慈賢)여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북만주 10여 군데에 교회를 건립, 여성교육회를 조직·독립운동과 계몽사업에 힘을 다하다가, 하르빈에서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斷食) 항쟁,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추서(追敍)되었다. 또 을미의병운동에 경주·이천·금성·청송·영덕 등지에서 진두(陳頭)를 맡아 지휘하다가, 축산 오십천 전투에서 적탄에 부상, 물 속에 투신하여, 장렬히 최후를 마친 하락(河洛, 원의 손자)등, 구국제단(救國祭壇)에 몸바친 의사들이 있었다.

귀미의 의성김씨는 정착이래 상하 300년에 이렇듯 인물·문행(文行)이 연면(連綿)하여, 안동에서도 일컫는 문중으로, 터전을 마련한 오우당(吾友堂) 근(近)을 추모하여 생담정사(笙潭精舍)를 짓고, 영모사(永慕사)를 세워, 춘추로 제사를 받들며, 마을에는 원의 손암정(孫巖亭), 이성(爾聲)의 사휴정(四休亭) 굉(宏)의 자양정(紫陽亭), 도화의 이산정(泥山亭)등 유적이 있고, 귀와, 척암등 현달한 조상들의 교지(敎旨)·명지(名紙)·유묵(遺墨)등이 그 종가에 보존되고 있다.

- 의성김씨(義城金氏, 예안파)

녹전면 신평동의 예안파 의성김씨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로서 이 고장 안동에 세거하는 의성김씨 세 갈래 가운데서 입향한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다. 무릇 의성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석(錫)을 시조로 하는데 예안파는 고려 후기에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내고 상서좌보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의(宜)의 셋째 아들 춘(椿)을 입향조로 한다. 충렬왕때 문과를 거쳐 추밀원부사 동정(樞密院副使 同正)을 지낸 춘이 그때 몽고의 침략에 항복한 고려 조정이 탐탁치 않은데다가 여러 대 살아온 고장인 의성 고을이 적에게 항복한 허물로 감무(監務)로 격하되는 사태가 겹쳐 예안땅 비봉산 아래 깊숙하고 조용한 사천(沙川)이란 마을로 옮겨 자취를 감추었다.

그 아들 옥(玉)이 문과를 거쳐 좌사간(左司諫)을 지내고 옥의 아우 연(衍)이 또한 문과급제로 판 문하시중 평장사(判門下侍中 平章事)를 지냈으며 옥의 아들 현주(玄柱)가 문과급제로 도첨의 경리시랑찬성사(都僉議 經理侍郞贊成事)를 지냈고 아들 을방(乙邦)이 또한 문과급제로 기울어 가는 조정의 벼슬을 하다가 고려가 무너지자 향리 예안에 물러와 요성산(遙聖山) 아래 집을 얽고 시끄러운 세상을 피한다는 뜻으로 둔번초당(遁煩草堂)이라 이름하고 숨어서 살았는데 한양 조정에서 이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래서 고장 사람들이 그 마을을 둔번촌이러 일컫게 되어 지금도 둠버리로 불린다.

을방의 손자 자한(自漢)·자하(自河)가 함께 부사(府使)를 지냈고 자강(自江)이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 자강의 손자 영균(永均)이 문장(文章)으로 알려졌으며 효우(孝友)의 아들 흠조(欽祖)가 문과급제, 중종때 검열(檢閱)로 윤인경등과 함께 앞서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김종직,김일손 등을 신원(伸寃)함과 동시에 유자광을 유배시켰고 그 손자 양(瀁)이 진사문과로 한림(翰林), 그 뒤 택룡(澤龍)이 퇴계문인으로 학문에 깊었고 문과급제로 임진왜란 극복에 이바지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 아들 진사 숙(琡)은 문장에 능하여 광해군때 영남 유림에서 회재(晦齋)와 퇴계에 대한 변무소(辨誣疎)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초(草)하였고 구한말 만휴(萬烋)가 학문이 뛰어났고 영수(永銖)가 군수로 치적이 있었으며 영호(永鎬)가 효행이 뛰어났다.

예안파 의성김씨 종가는 고려가 망하자 을방이 정하여 이룩한 둠버리의 옛터 그대로여서 안동에서도 가장 오래 지켜오는 종가터의 하나로명성이 높다. 600여년을 그 사손(嗣孫)이 살아오는데 고장사람들이 이를 삼대종가(三垈宗家)라 일컸는다. 곧 거기는 세 군데의 터가 있다는 것인데 맨 윗자리는 출세에, 아래 자리는 재물에, 그 중간자리는 자손에 이롭다 하였는데 을방은 벼슬도 재물도 제쳐 버리고 중간 터를 취해 집을 이룩하였다.

- 의성 바래미 의성김씨

의성김씨가 바래미에 터전을 잡기는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八五軒 金聲久)로 부터인데 그 선향은 성주로 선조때 부제학을 지낸 그의 조부 우굉(宇宏)이 상주에 옮겨 살았다. 바래미에 터전을 잡은 이래 문운이 크게 융성하여 문행(文行), 과한(科宦)이 무리를 이루었으니 팔오헌의 아들 여건(汝健)이 문과급제로 관찰사를  지낸 바 있고  진사에 이어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희주(凞周), 문과급제로 지평(持平)을 지낸  희락(凞洛), 곽종석의 문인으로 국권수호와 광복대업에 생애를 바치고 광복 후 육영사업에 만년을 이바지한 창숙(昌淑) 등이 모두 여기에서 났으며 과거로는 구한말까지 200여년에 문과 19장, 무과 2장, 진사가 48장으로 한때는 솟대로 숲을 이루어 마을의 빨래가 마르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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