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손꼽히는 집안은 연산의 사계 김장생 집안, 회덕의 우암 송시열 집안, 논산 노성리의 명재 윤증 집안이다. 이 가운데 우암 집안의 특징은 아들이 귀해서 양자를 많이 들였다는 점이다. ‘10대 양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자로 들어온 후손이 다시 양자를 들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조선시대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일은 유교적인 관습이었다.



안동의 학봉 김성일 집안. 13대 종손도 양자였고, 현재 14대 종손인 김시인(88)씨는 ‘둥주리 양자’로 들어왔다. 경상도에서 말하는 ‘둥주리 양자’는 양자로 들어올 사람이 이미 결혼을 해서 처자식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양자는 당사자가 10대 중반 또는 총각일 때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시인은 양자로 들어올 당시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아들 둘이 있는 상태였다. 새의 둥지처럼, 처자식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를 통째로 들여왔다고 해서 둥주리 양자로 부른다.

학봉 문중에서 양자를 들이기 위한 정성은 대단하였다. 문중의 원로들이 양자주기를 꺼려하는 김시인의 생가에 가서 부디 양자를 들이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10명씩 조를 짜서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석고대죄’하는 것처럼 간청하였다. 그 설득기간이 무려 7개월이나 되었다고 한다.

15대 종손이 될 김종길(63)씨. 두루넷 사장도 지냈고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이다. 그도 딸만 셋이라서 셋째 동생인 김종성의 장남을 양자로 들인 상태이다. 5세 때 양자로 이미 들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 살면서 양부 집을 왔다갔다 하였지만, 대학은 안동에 내려와서 다니고 있다. 종손 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일부러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12대 300년 동안 만석군을 지낸 경주 최 부잣집. 이 집은 양자를 들일 때 일종의 콘테스트를 실시하였다. 부잣집이라 지원자가 많았다. 일단은 항렬과 나이가 비슷한 양자후보자 수십 명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 참석한 양자 후보자들 개개인의 지능, 언행, 품성 등이 어떠한가를 관찰해서 인사고과(?)가 높은 후보자를 양자로 선택하였다. 이번에 LG 구본무 회장의 ‘조카양자’는 가장 보편적인 사례에 속한다.

@식사에관한 관습

▣ 식사 예절

먹고 마시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요건이기 때문에 예절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비록 음 식의 형태와 종류는 달라지더라도 음식 예절은 옛날과 현대가 달라질 수 없다.

사람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음식 예절 이므로 그 사람이 음식을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보면 다른 생활 예절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식탁 예절이라고 하면 식사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세분할 수 있다.

@한국의관혼상제

▶전통상례
상례(喪禮)란 자연인의 사망에서부터 치장(治葬 : 매장, 화장 등) 의식을 거쳐
상주들이 상기(喪期)를 마치고 기제(忌祭)를 지내기 전까지의 절차와 의례를 말한다.

오늘날의 도시사회에서는 장의사에게 모든 의식의 집례를 통괄하여 맡기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옛부터 전해오는 상례 절차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상례에는 초종(初終), 고복(皐復), 발상(發喪), 습·염(襲·殮), 성복(成服),
발인(發靭), 하관(下棺), 우제(虞祭)와 소대상(小大祥)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세부 절차나 집행 방법에 있어서는 각 지역이나 사회에서의 신분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1) 초종(初終)

망자(죽은 사람)의 유언·임종·수시(收屍 : 시신의 눈을 감기고 코·귀·입을 솜으로 막고 안치시키는 과정)순의
절차가 이에 포함된다. 그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

임종과정에서 선비는 여자가 지키고 있는 데서 운명하지 않고,
부인은 남자가 지키고 있는 데서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였다.
최근에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망자의 숨이 끓어지면, 시신을 동쪽으로 눕힌다.
동향은 생성·재생의 방위이므로 되살아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손발이 굳기 전에 살살 주물러서 곧게 편다.
중풍 등의 고질로 수족이 오그라져 있는 사람은 판자를 받쳐서 소렴 때까지 단단히 묶어놓는다.


2) 고복(皐復)

고복은 떠나가는 영혼을 다시 불러 들여 재생하기를 비는 초혼(招魂)의식이다.

망령이 혹시 다시 살아날까 비는 마음으로 지붕위에 올라가서 망령의 호(號)나 자(字)를 부르며
"복·복·복" 세 번 외치고 나서 지붕에 옷을 던져놓는다.
요즘은 간소하게 하려고 복의(復衣)를 기둥에 매어 두기도 한다.

입관을 하고 난 뒤 복의는 지붕에서 내려놓고 출상 때, 또는 입관 후 내린 즉시 소각하거나,
복의를 시신위에 덮어 두었다가 대렴후에 영좌 앞에 두고, 후일 혼백과 혼백과 같이 묘소에 묻는다.


3) 사자상(使者床)

고복(皐復)이 끝나면 시신이 굳기 전에 반듯하게 눕히고 베개를 베어준다.
솜으로 입과 코를 막고는 양손을 거두고 종이(한지)로 낯을 가린 뒤에
휜 이불 호청으로 덮고 병풍으로 앞을 가린다.

병풍앞에는 사자상을 차린다.
수시가 끝나면 죽은 이의 영혼을 데리러 일직·월직사가 온다고 믿기 때문에
사자상(뱃머리밥 또는 사자밥)을 바로 마당에 차린다.

상가집의 마당 복판에 대문을 향해 차리고 상 위에는 밥·나물·간장을 차리며, 상 앞에 짚신을 놓는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사자로 하여금 영혼을 편하게 모시도록 하기 위해 대접하는 것이다.
사자상은 물린 뒤 사자밥은 술 만들 때 넣었다가 삼우제 때 먹는다.


4) 발상(發喪)

고복이 끝나고 자손들이 상제(喪制)의 모습을 갖추고
초상난 것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발상'이라고 한다.

상주는 머리를 풀고 버선을 벗고 왼소매를 빼서 입고, 통곡을 한다.
이러한 상주의 모습을 "죄인형색이라 한다"고 한다.
성복제(成服祭)를 지내기 전까지는 이 같은 형상을 하고 두루마기는 입지 않는다.

호상(護喪)을 선정하여 이후의 모든 장례 절차를 주관 지도하게 하고,
초상이 났음을 외부에 알리는 것으로, 가까운 친척에게는 전령을 보내거나 하여 속히 알리고,
발인 일시와 장지, 하관일시가 정해지면 부고를 작성하여 발송한다.

부고에는 부음(訃音)과 고기(告期)가 따로 있었다.
부음은 어느 집안의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고기는 한 보름 후에 발인 일시와 장지 및 하관 시간을 통기하는 것을 말한다.
3일장, 5일장이 성행하는 오늘날에는 고기는 부고에 통합되어 없어졌다.

부고를 받으면 세속에서는 뒷간이나 대문에 꽂아 두는 일이 많았다.
상주의 금식은 상주의 근력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5) 습(襲), 염(殮), 입관(入棺)

시신을 목욕 시키고(襲), 수의(壽衣)를 입히면(殮), 입관을 하게 된다.

시신을 목욕시킬 때는 머리를 빗기고, 상투를 쪽고, 향탕(香湯 : 향나무 물)으로
솜이나 수건에 물을 적셔 시신을 닦는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했으나, 요즘은 여자가 의복만 벗기고 남자가 하는 것이 상례다.

밤함(飯含)이라 하여 시신을 굶길 수 없다며 입에 쌀을 세 번 넣는데
입안의 오른쪽-왼쪽-가운데 순으로 넣는다.
처음은 '천석이요', 두 번째는 '이천석이요', 세 번째는 '삼천이요' 라고 외친다..

소렴은 의관을 씌우고 시신을 세부적으로 묶는 것을 말한다.
이때 머리카락, 손톱, 발톱을 깎아 주머니에 넣어 입관시 함께 넣는다.

대렴은 이불을 덮어 묶고는 입관하는 것을 말한다.
혼백은 명주실 세 가닥으로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있는 형상으로 호상이나 백관이 접는다.
혼백은 백의외 속백(束帛)하여 모셨다가 삼우 후에 산소의 오른쪽에 매혼한다.

고인의 유의(遺衣)는 충곽(充槨)에 사용되고 계절별로 한 벌씩만 남겨 한 벌만 빈소에 차려 놓는데,
철따라 옷을 바꾼다.


6) 성복(成服)

성복은 복제(服制)에 따라 상주들이 상복을 입는 절차를 말한다.

상복을 입고 나면 성복제를 지낸다.
성복제는 각각 기복(忌腹) 차림으로 집사가 잔을 올리고 항렬 연장자순으로 복을 입는다.

상주의 옷은 오복도(五福圖)의 다섯 가지 양식에 의거해 지어 입는다.
굴건(屈巾)·두건(頭巾)은 상주의 것을 질이 나쁜 삼베로, 백관의 것은 고운 베·광목·옥양목 등으로 접는다.
가마(加麻)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제자나 친구가 두건에다 가느다란 삼끈으로 테두리를 두른 것을 말한다.

상장(喪杖 :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짚는 지팡이)은 부친상일 때와 모친상일 때가 서로 다르다.

대체로 부친상에는 대나무, 모친상에는 버드나무를 짚는다.
이유는 아버지는 핏줄이므로 숨쉬기 좋으라고 대나무를 쓰고,
어머니는 자손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버드나무를 쓴다는 것이다.
어느 지팡이를 짚든 뿌리쪽이 위로 향하게 한다.


7) 발인(發靷)

관을 방에서 들고나와 상여로 옮기는 것을 천구(遷柩)라 하고,
상여가 상가를 떠나 장지로 출발하는 것을 발인 또는 출상(出喪)이라 한다.

발인시에는 반드시 발인제를 지낸다.

발인제 때 관의 위치는 천구하여 관을 상여 앞에 두고 발인제를 지내는 경우
영구(靈柩, 관)을 상여 위에 올려 모셔 놓은 다음 발인제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발인제는 간단하게 제물을 차리고 발인축을 읽고, 맏 상주는 두 번 큰 절(단작이배;單酌二拜)을 한다.

발인제를 지내고 상여꾼들이 상여를 처음 들어올렸을 때
망자의 집 쪽으로 향하여 세 차례 상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망자가 집을 보고 마지막 하직 인사라 한다.

상두꾼은 보통 남자들이지만 상여가 나갈 때 상여의 뒤쪽에 광목을 길게 늘어뜨려
부인들이 이것을 잡고 따라 가기도 하는데,
이를 '설매' 또는 '배줄'이라 하고 혼이 저승갈 때 타고 가라는 뜻이다.


8) 운구(運柩)와 노제(路祭)

발인 후 상여를 장지로 운반 이동하는 것을 '운구' 또는 '운상(運喪)'이라 하거나 '행상 나간다'고 한다.
운구를 담당하는 일꾼은 '상두꾼'이라 하며, 상여노래의 앞소리를 하는 사람을 '선소리꾼'이라 한다.

운상 때는 맨앞에서부터 명정(銘旌), 영여(靈與), 만장(輓章), 운아삽(雲亞삽),
상여(喪輿), 상주, 백관, 조문객의 차례로 줄을 잇는다.

노제(路祭)를 안 지낼 수도 있지만 운구 도중에 보통 한 차례를 지낸다.
노제는 주로 망령(亡靈)의 친구들이 주제관이 되어 지내므로
원하는 우인(友人)들이 많은 경우는 두서너 차례 지내기도 한다.

노제의 장소는 마을 어귀·골목 어귀·삼거리 등 망령과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날 때 지내는데,
친구들이 사자와의 마지막 하직인사로 지내는 것으로 사자와 이별을 섭섭하게 여겨 행하는 제사이다.


9) 하관(下棺)과 부수 제례(祭禮)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기 전에 장지에서 일하는 일꾼을 '산역꾼'이라 한다.
산역꾼과 지관은 장지 근처의 바위나 개울가에 가서 술, 과일, 어포를 차려 놓고
'오늘 이산에 손님이 들어오니 산신께서는 손님을 잘 보살펴 달라'고 빌면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그리고 묘를 쓸 자리에 명태를 막대기나, 삽에 묶어 꽂아 세우고,
그 주위에 술을 뿌리고는, 개토제(開土祭)를 지낸다.

묘자리를 조성하기 위해 구덩이를 팔 때는 묘터의 상·중·하에 술을 붓고,
술을 부은 자리에 괭이로 각기 흙을 파기 시작한다.
이 관중을 파는 것을 '청광 낸다' 또는 '굿 낸다'고 한다.

하관은 천광이 끝나면 지관이 잡아준 하관 시간에 맞추어
상제들이 상에서 관을 운반하여 와서 베끈을 잡고 천천히 하관한다.

하관할 때 상주는 곡을 하지 않는다.
하관은 시신의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하관한다.

하관 때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묻는 '동천개'는 쓰지 않고 관채로 묻는데,
이때 지관이 하관을 보면 해롭다고 정해주는 나이의 사람이
하관을 보게 되면 중상을 당한다 하여 하관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발인날이 말날(午日)인 경우 쥐띠인 사람과 죽은이와 상극의 띠를 가진 이가
하관을 보면 죽은 사람이나 산사람 모두에게 해롭다고 하여 보지 않는다.
상주도 마찬가지다.

하관이 끝나면 지관은 관을 바로 잡고 평평한지 여부를 살펴 이상이 없으면
흙덮기에 들어가는데 '복토한다'고 한다.

그리고 봉분이 완전히 성분되었을 때 주과포를 차려 평토제(平土祭)를 지낸다.

평토제를 지내고 나면, 집사가 영좌(靈座 : 혼령을 안치하는 장소)를 철거하고
상주는 영여에 혼백을 모시고 왔던 길로 되돌아 집으로 오거나,
상여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되돌아온다(다른 길로 와야 귀신이 못 따라 온다고 함).

되돌아올 때 상주들은 영여를 뒤따르는데 이를 반혼이라 한다.

집에 돌아오면 안상주들이 곡을 하면서 혼백을 맞이한다.
혼백은 빈소에 모셔진다.
그러면 망자에게 반혼을 고하는 제를 지내는데 이를 반혼제(返魂祭)라 한다.

앞에 주과포혜를 진실하고(차려놓고) 술을 치고 축을 읽고 상주들이 두 번 절한다.


10) 기제사(忌祭祀) 전의 각종의례

영좌를 장지에서 반혼하여 와서 혼백을 다시 모시고 난 후부터
담제(嬉祭)를 지내기 전까지 지내는 각종 제사를 묶어 흉제(凶祭)라 한다.

기제사 지내기 전의 각종 제사는 담제를 지내므로써 보통 끝이 난다.


① 우제(虞祭)

갓 돌아가신 영혼을 위로하는 뜻으로 지내는 제로 일종의 위령제이다.
우제는 세 번 지내는데, 세 차례 모두 다 그 집안의 기제사 방식(가문에 따라 다름)과
동일하게 지내고 곡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 초우제(初虞祭)

반혼한 혼백을 빈소에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초우제라 한다.
초우제와 반혼제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초우제는 장사 당일에 지내야 한다.
초우제를 지내고 나면 상주 이하 상제들은 비로소 목욕을 할 수 있지만 빗질은 하지 못한다.

- 재우제(再虞祭)

원래는 초우제를 지내고 난 다음날 또는 그 하루 거른 다음날 아침에 지낸다.
보통은 초우제 지낸 다음날 아침에 지낸다.

- 삼우제(三虞祭)

재우제 바로 다음날 아침에 지낸다.
삼우제를 지내고 나서 상주는 비로서 묘역에 갈 수 있다.
상주는 간단한 묘제(墓祭)를 올리고 성분이 잘 되었는지 묘역이 잘 조성되어 있는지를
직접 살피고 잔손질을 한다.

최근에 와서는 상기(喪期)를 단축할 경우 삼오날(삼우제날) 가서 봉분 옆에 흙을 파고
혼백을 묻는다. 이를 매혼(埋魂)이라 한다.




② 졸곡제(卒哭祭)

삼우제를 지내고 3개월 이후 날을 잡아 졸곡제를 지낸다.
최근에는 상기가 짧을 경우 삼우제가 끝난 뒤 첫 강일에 지내기도 한다.

졸곡제를 지내고 나서 상주는 아침 저녁으로 조석을 올릴 때만 곡을 하고,
평시에는 빈소에서 곡을 하지 않는다.

졸곡제 전에는 축문에 상주를 "疏子○○"라 쓰지만 졸곡 후에는 "孝子○○"라고 쓴다.

③ 부제

졸곡제 다음에 지내는 제사로 신주를 조상 신주 곁에 붙여 모시는 제사이다.
사당이 있는 경우 망위(亡位)의 신주를 모셔가서 이미 봉안되어 있는
선망신위(先亡神位)들과 존비·위차에 맞게 자리매김하여 제사를 모신다.
철상 후 빈소로 신주를 다시 모셔온다.

④ 소상(小祥)

사망 후 1년만에 지내는 제사로 제사 방식은 우제와 비슷하다.
먼 친척도 오고 문상객(주로 초상 때 조문오지 못한 사람)도 많이 오므로 음식을 많이 장만해 대접한다.
소상을 치르고 나면 일반적으로 바깥상주와 안상주는 요질과 수질을 착용하지 않는다.

⑤ 대상(大祥)

사망 후 2년만에 지내는 제로 소상과 같은 방식으로 지낸다.
소상 때 보다 많이 오는 큰 행사이다.
보통 대상이 끝나면 사당이 있는 경우 신주는 사당에 안치하고 영좌는 철거한다.
담제를 따로 지내지 않는 경우는 이날 바로 탈상하고 상기(喪期)를 끝내기도 한다.

⑥ 담제

대상 후 두달째 되는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이날 탈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담제 때 탈상하고는 사당 고사를 한번 더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한다.
지금은 이 길제도 사라졌다.

이후의 제사는 기제사로서 이는 제례(祭禮)에 포함시키고 상례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또한 근래에는 우리의 고유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 일본 음식, 기타 인스턴트 음식 등이 혼재되고 있어 식탁 예절도 음식의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달라진다. 그러나 식탁 예절의 기본은 나라나 민족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서는 우리 나라 음식을 예로 들어 어느 나라 음식이든 공통 되는 기본적인 내용을 서술한다.

▣ 식사하기 전의 예절

식사 전에는 위생상의 필요뿐만 아니라, 마음을 안정시키고 경건한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 식사 전에 건내 주는 물수건은 손만 닦아야 한다. 얼굴이나 머리를 닦거나 심할 경우에는 겨드랑이 등 몸을 닦는 사람도 있는데, 보기에도 흉하고 비위생적이며 남에게도 큰 실례가 된다. 가볍게 손을 닦은 물수건은 잘 접어서 식탁 옆에 놓아두는 것이 예의이다.

식사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으면 몸치장을 단정히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 윗사람과 함께 음식을 들거나 여러 사람이 회식할 때에는 윗사람이 수저를 든 다음에 들어야 하며, 식사를 마칠 때에도 윗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예의이다.

▣ 식사할 때의 예절

젓가락은 혼합된 색을 싫어한다는 옛말도 있듯이 한꺼번에 이것 저것 반찬을 집으면 여러 가지 맛이 뒤섞여서 참맛을 모르게 된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정결하게 맛을 알고 먹는 습관을 기르도록 한다.

식사할 때 맛있는 반찬만을 골라 먹거나, 뒤적거리며 집었다 놓았다 하는 것은 남에게 불쾌감을 주므로 피해야 한다. 또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입안에 넣지 말아야 하며, 가시나 찌꺼기는 한 곳에 가지런히 모아서 여러사람이 함께 쓰는 식탁이 지저 분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거나 입안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며, 수저가 그릇에 부딪쳐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된다. 국이나 물을 마실 때, 후루룩 소리를 내거나 뜨거운 음식을 불어대는 것도 곤란하다. 특히 음식을 먹는 도중이나 다 먹고 나서 물을 입에 머금고 소리를 내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 음식을 먹을 때 몸을 앞으로 굽히는 것, 한 손을 떠받치는 것, 몸을 뒤로 젖히고 음식을 입에 넣거나 혀를 내밀어 먹는 것 등은 천한 버릇이다.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 음식을 입에까지 가져다 먹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예부터 우리들은 음식을 먹을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생활 풍습의 변화로 이러한 규범도 바뀌고 있다. 부득이 말을 해야 할 때에는 입 안에 음식물이 없을 때 하여야 하며, 윗사람이 무엇을 묻거나 말을 건낼 때에는 먹던 것을 삼키고 나서 수저를 놓고 말하여야 한다.

▣ 식사가 끝났을 때의 예절

윗사람이 아직 식사 중일 때에는 먼저 먹었다고 자리에서 일어 나서는 안 된다.

수저를 상 위에 내려놓지 말고 국그릇에 걸쳐 놓았다가 윗사람이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에 얌전히 수저를 내려놓는다.

일행의 식사가 다 마쳐졌을 때에는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인사말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힘써야겠다.


▶ 전통 혼례

(1) 혼인 절차

남녀가 부부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단히 성숙한 노력과 책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비록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이라도 나이에 관계없이 어른으로 대접했다. 이러한 책임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혼인의 의식과 절차를 매우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치루었으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례라고 하여 대례(大禮)라고도 했다.

전통혼례 절차는 중국의 주육례(周六禮)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사례(四禮)를 참고하고 한국 고래의 습속을 절충한 것이다.


① 주육례(周六禮)

우리가 혼인하는 것을 "육례를 갖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육례라 하면 으레 지금부터 약 3천년 전 중국 주(周)나라 때의 혼인절차라 이해한다.



납채(納采)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아내를 삼고자 한다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문명(問名)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신부가 될 규수의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딸은 어머니가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알면 신부가 될
그 딸이 어떤가를 알 수 있어서이다.
납길(納吉)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하면 좋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납징(納徵)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하기로 결정한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것이다.
청기(請期)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날짜를 정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친영(親迎) : 남자가 여자 측에 가서 신부가 될 규수를 데려다가 예식을 올리는 절차이다.



② 주자사례(朱子四禮)

지금부터 약 8백년 전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주자(朱熹)가 주나라의 육례와
그 시대에 이미 변하여진 시속의 예를 참작하여
4가지로 축소한 혼례의 절차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혼례이다.



의혼(議婚) : 남자 측과 여자 측이 혼인할 것을 의논하는 절차이다.
납채(納采)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며느리 삼기로 결정했음을 알리는 절차이다.
납폐(納幣)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예물을 보내는 절차이다.
친영(親迎) : 남자가 여자 측에 가서 규수를 데려다가 예식을 올리는 절차이다.



③ 한국 전통 혼인례의 절차

한국의 전통 혼례는 주자가례의 4 순서를 따르지 않고, "육례(六禮)를 갖춘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관습에 의한 혼인절차가 6 순서로 되었기 때문이다.



혼담(婚談)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청혼(請婚)하고,
여자 측이 허혼(許婚)하는 절차이다.
납채(納采)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혼인을 정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신랑이 될 남자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四柱)를 보내는 절차이다.
납기(納期) : 여자 측에서 남자 측에 혼인 날짜를 정해 알리는 것으로
혼인날을 택일(擇日) 해 보내는 절차이다.
납폐(納幣) :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예물을 보내고 받는 절차이다.
대례(大禮) : 신랑이 여자의 집에 가서 부부가 되는 의식을 행하는 절차이다.
우귀(于歸) :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媤宅)으로 들어가는 절차이다.





(2) 전통혼례식 절차



전통혼례에서 대례(大禮)를 행하는 예식이다.

대례(大禮)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맞아 오는 의식이다.
오늘날의 결혼식과 같다.

전통혼례의 진행은 주례자의 홀기(笏記: 식순)에 따라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의 순서로 행한다.


1. 전안례(奠雁禮)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신부집에 도착하여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예이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연분을 지킨다는
백년해로 서약의 징표다.


옛날에는 산 기러기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나무 기러기를 대신 사용한다.
※ 목(木)기러기 : 그 상징적 의미




2. 교배례(交拜禮)

전안례가 끝나고 신랑 신부가 초례청에서 처음으로 상견을 하는 의식이다.
교배례는 두 사람이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의식이다.
상견이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서로 상대방에게 절을 한다.
이 교배로써 두 사람은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것이다.


전안례가 끝나면 신랑이 초례청 동쪽 자리에 들어선다.
신부가 수모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초례청 서쪽 자리에 들어선다.
신랑은 신부를 초례청으로 인도한다.
신부의 수모가 신랑 쪽 자리를 편다.
신랑의 시반이 신부 쪽 자리를 편다.
신랑과 신부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다.
상견이 끝나면 신랑은 시반, 신부는 수모의 도움을 받아 세수 대야에 담긴 물에 손을 씻는다.
신부는 씻는 흉내만 내고, 소맷자락 밖으로 손을 내놓지 않는다.
수모의 도움을 받으며 신부가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한다.
답례로 신랑이 신부에게 한 번 절을 한다.
신부가 신랑에게 다시 두 번 절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다시 한 번 절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고, 신랑과 신부가 마주 꿇어앉는다.



3. 합근례(合変禮)

합근례는 술잔과 표주박에 각각 술을 부어 마시는 의식이다.
처음에 술잔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로서 인연 맺는 것을 의미하고,
다음에 표주박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의 화합을 의미한다.


신랑 왼쪽의 시반(보조자)이 신랑의 잔을 들고 신랑 오른쪽의 시반이 술을 따른다.
신랑은 신부에게 읍하고 나서 시반이 들어준 잔을 집어 술을 마신다.
신부 오른쪽의 수모는 왼쪽 수모(보조자)가 들고 있는 술잔에 술을 따른다.
신부 왼쪽의 수모가 잔을 들어 신부의 입에 살짝 갖다 댄다.
신부 왼쪽의 수모가 표주박을 들면 신부 오른쪽의 수모가 술을 따른다.
신부의 수모가 신랑에게 표주박을 갖다주면, 신랑은 신부에게 읍하고 나서 표주박을 들어 술을 마신다.
신랑 왼쪽의 시반이 표주박을 들면 오른쪽의 시반이 술을 따른다.
신랑의 시반이 신부의 입에 표주박을 갖다 대고 신부는 마시는 흉내만 낸다.



4. 하객에게 큰절

합근례가 끝나면 혼례식의 절차가 끝난다.
신랑과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난 하객들에게 큰절을 한다.


@전통제례

1. 제례(祭禮)의 의의


제례란 사례(四禮)중의 하나이며, 제사(祭祀)를 지내는 예를 말한다.

제사는 조상이나 신령에게 음식을 올리고 정성을 표하는 예절의
의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순서, 형식을 총칭하기도 한다.

제례는 곧 조상숭배제의(祖上崇拜祭儀)이며,
조상숭배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조상을 기리는 관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가신신앙(家神信仰)으로까지 승화된 것이며
이러한 조상숭배는 곧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 이하 친족, 친지가 슬픔 속에서 장사를 지내고
조상의 은덕을 추모하여 정성으로 기념하는 것이 제사이다.


제례는 복잡한 형식보다 그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현대 문물에 의하여 조상에 대한 현대인들의 공경심이 희박해진 결과라 할 것이다.

나를 낳아 길러주시고 돌봐주신 부모님들이나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끔 해주신 조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고 예로써 모시는 것이 자손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생활이 복잡하고 일에 쫓기는 현대인일지라도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일(忌日)만이라도 보은의 뜻으로 예를 지켜야 할 것이다.

예는 마음의 정성(精誠)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특히 제례에 있어서는 더하다.

이에 대한 김장생(金長生)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사계 김선생이 일찍이 향리에 있을 적에 사람이 찾아와서 묻기를,
"오늘 집안의 개가 새끼를 낳아 불결하니 제사를 지내지 않은즉 괜찮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괜찮습니다" 했다.

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묻기를,
"집안에 애를 낳은 일이 있는데 제삿날입니다.
그러나 예를 폐할 수 없는 일이니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또한 불가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괜찮습니다" 했다.

(모시고 있던)사람이 그 말을 의심스러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앞 사람은 정성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내고자 하지 않았고,
이 사람은 정성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이다.
예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

沙溪金先生嘗在鄕里 有人來問曰 今日 家狗生子不潔 不祭亦可乎 先生曰可

又有一人 來問曰 家有産故而當祭日 禮不可廢 雖祭之亦無不可乎 先生曰可

人疑之 先生曰 前人無誠 不欲祭 此人有誠故 欲祭之 禮不在儀式 有在於誠




사계의 말을 참조할 때 제사에 있어서 정성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옛 사람의 방식 그대로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정성껏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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