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지방의 이황의 다른 제자들

 

이 절에서는 위의 3개 문파(김성일,유성룡,정구)를 제외한 이황의 제자들 가운데 안동과 예안 출신으로 후학들에게 전수하였거나, 가학을 통하여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친 학자들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1)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오 천칠군자(烏川七君子)는 김부인, 김부필, 김부신, 김부의, 김부륜, 금응협, 금응훈을 말하는데, 이들 7인은 형제ㆍ4촌ㆍ내외종간의 관계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그 중에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 1512~1584)이 가장 연장자이다. 그는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예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늦게야 무과에 합격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검소하여 송당 박영(松堂 朴英)과 비교됐다. 저서로는 『상례문목(喪禮問目)』11조가 있다.
후조당 김부필(後凋堂 金富弼, 1516~1577)은 가학을 계승한 위에 이황을 찾아 도학에 심취했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 번이나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한 번은 이황이 관계에 진출할 것을 권하는 글을 보내오자 김부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답했다. “산 위의 구름에게 한 말을 부쳐 보내니/무슨 마음으로 산골짜기에 모습이 가려지고 또 하늘 높이 떠오르는가/구름이 말하기를 자신의 모습을 펼쳐내고 거둬 들임은 비록 나에게서 비롯되지만/역시 신비로운 것은 용의 변화 가운데에 있다.(爲向山雲寄一語, 何心藏壑又升空, 雲言舒捲雖由我, 亦在神龍變化中).” 이를 통해 김부필이 벼슬을 뜬 구름같이 여겼음을 알 수 있다. 李珥도 禹性傳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부필의 사람됨을 “후조선생을 도산에서 뵙고 며칠 동안 도학을 토의 하였던 바, 그의 의리는 정통하고 인설(仁說)은 완숙하여 정밀하였다. 이제 그분이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사도(斯道)가 윤상(淪喪)하고 정의는 인몰될 염려가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심경문목(心經問目)』이 있다.
양정당 김부신(養正堂 金富信, 1523~1566)은 김부인의 친동생으로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황은 김부신이 유학에 뜻을 돈독히 한 것을 칭찬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일찍이 죽었다. 읍청정 김부의(挹淸亭 金富儀, 1525~1582)는 김부필의 친동생이다. 그는 형보다 앞서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닦는 가운데서도 생각과 행동이 성현의 법도에 맞으니 이황은 그점을 항상 칭찬하였다. 어떤 이가 이황에게 “부의는 어릴 때 부터 과거에 응하지 않으니 어찌된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이황은 “그 사람은 아주 독실한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역동서원을 처음 창설할 때, 산장(山長)이 되었다.
설월당 김부륜(雪月堂 金富倫, 1531~1598)은 김부인의 막내 동생이다. 16세 때 글을 읽다가 중국의 정명도가 16세 나이로 주렴계와 더불어 도학을 논했다는 대목에 크게 깨우침을 받고 이황 문하에 입문하였다. 김부륜이 독서유감시(讀書有感詩)를 짓자 이황이 비평해 이르기를 “스스로 힘씀이 이와 같아서, 읽으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고 눈을 밝게 한다”하며, 시에 화답하여 뜻을 붙였다. 또한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와 『계몽전의(啓蒙傳疑)』를 베껴써서 의심나는 곳을 여쭈니 이황이 매우 칭찬하였다. 그가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제수되었을 때 정구가 옛 원으로 있다가 장차 돌아가면서, 복인이 된 것을 축하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진 원을 만났다’하였다. 김부륜은 녹봉으로 800여권의 책을 구입하여 가난한 지방선비들에게 대여하는 등 학문을 적극 권장하였다. 매년 농번기에는 몸소 들로 나가서 농사를 권면하기를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사모하였고,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다.
일휴당 금응협(日休堂 琴應夾, 1526~1596)은 일찍 이황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황이 중히 여겼다. 그래서 손수 편지하기를 ‘일휴’로 그 당호를 삼으라고 하였다. 또 ‘야기잠(夜氣箴)’ 좌우명을 써 주어 공부의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류성룡은 제자들에게 금응혐을 평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소학의 실행인을 보려면 금응협을 보라. 그 사람이 소학 그대로다”고 말하였다. 또 류성룡은 그를 가리켜 “그의 일언일행이 가히 후세에 모범이 될 것이니 용모의 단정함과 자품의 순수함 그리고 재학의 뛰어남이 내가 본 바로는 그가 제일이다”고 평했다. 이준은 금응협의 「행장」에서 “대개 그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고, 그 용모의 바름과 자품의 순수함, 재주와 학문의 아름다움은 내가 본 바로는 한 사람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으리오 마는, 그 오래도록 지조를 지킨 것과 다만 듣고 본 위대함은 노나라에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 사마시에 합격, 천거되어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낙천사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심경질의(心經質疑)』가 있다.
면진재 금응훈(勉進齋 琴應壎, 1540~1616)은 금응협의 동생이다.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 올라 한서암 옆에 집을 짓고 독실하게 배움에 힘썼다. 이황은 손수 면진(勉進)이란 두 글자를 써서 그 집을 명명해 주었다. 사마시에 합격하자 정탁의 천거로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하였다. 두번 현감을 맡았는데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또 의흥현감에 제수하였는데, 이 때 퇴계문집 간행을 시작하였다. 류성룡과 조목 등이 공사의 감독이 금응훈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이 일을 감독하였다. 이황의 『사서석의』를 교정 간행하였다.
이준(李埈)이 쓴 그의 묘갈명을 보면 “당시 이황 문하에서 뛰어난 재주로 덕행을 닦고 학업을 수련한 사람이 많았으나 만약 후대인이 깊이있고 정확한 지식과 진실된 학문을 가진 사람을 의논한다면 공을 추대하여 앞줄에 세울 것이다”라고 했다. 정경세도 주역과 계몽편을 가지고 그와 더불어 토론한 후 그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했다고 한다. 낙천사(洛川社)에 제향하였다.
오천 군자들의 학문은 근시재 김해를 통하여 외내 김씨 가학(家學)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는 임난 때 예안의병장으로서 국난의 극복에 힘을 쏟은 의사(義士)였다.

2) 백담 구봉령
백 담 구봉령(柏潭 具鳳齡, 1526~1586)이 이황을 찾은 것은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였다. 구봉령을 본 이황은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깊고 넓은 학식을 칭찬하고, “들으니 공은 널리 배운지가 오래 되었다던데 내가 어찌 감히 스승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하였다. 구봉령은 “천학한 소생이 능력이 없어 거두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를 과대평가하여 박대한다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가르쳐 달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이렇게 이황 문하에 들게된 그는 도리를 강론함에 요점을 많이 얻었다. 제자백가에 널리 통했으며, 육경에 능통하여 말을 하면 곧 글이 될 정도로 대가가 되었다.
21세에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뒤이어 대과 급제한 뒤에 벼슬을 시작하여 1564년에 홍문관부수찬지제교겸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에 이르렀는데, 당시는 외척 윤원형이 발호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봉령은 직언으로 상소하기를 “기강을 세우고, 명령대로 시행하며, 염치를 장려하고, 뇌물을 막고, 과중한 세금을 물리치고, 약탈을 금지하며, 사치를 억제하고, 큰집을 허물며, 관작을 중히 여기고, 쓰고 버리는 것을 잘 살피며, 내외를 엄격히 하고, 사기를 기르며, … 형벌을 남발하지 말며, 학교를 일으키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을 아뢰었다. 그가 성균관 대사성에 재직하였을 때는 유생들의 교풍을 바로 잡고 도리로 훈도하여 학문을 성취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것을 본 조정대신들은 왕에게 “선비의 학습 태도가 진보되지 않는 것은 스승의 도가 서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제 진정한 사표를 얻었으니 오래 맡기어 학문이 융성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아뢰었다고 한다. 이러한 구봉령의 인품에 대하여 류성룡은 “비록 세상의 도가 어지러워 염려가 있었으나 오직 공을 믿어 두려움이 없었다”고 찬양하였다.
구 봉령은 이황이 제작한 「성학십도」를 바탕으로 「혼천의기설(渾天儀記說)」을 지었다. 혼천의기설은 혼천의(渾天儀)를 내세워 천도를 밝히고, 천도는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또 용산서당을 세워 제자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뒷날 그의 제자들은 구봉령의 서당에 학도묘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뒷날 사액서원인 주계서원의 전신이다. 구봉령은 61세에 졸하였으며, 그의 문하에는 이황의 문인이기도 한 권춘란(權春蘭)과 홍석기(洪錫箕)가 있다. 문집은 『백담집(柏潭集)』이 있다.

3) 월천 조목
월 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은 15세 되던 가을에 이황의 문하에 들었다. 이후 평상시에도 늘 모시고 있어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다. 거처하며 공부하던 집을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 불렀으며, 이황이 손수 쓴 네 글자를 액자로 받들어 걸었다. 또 그 협실(夾室)을 시재(是齋:옳은 집)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나날이 바르게 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맺은 사제의 연은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가 80이 넘어 더이상 강학을 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도산서원에서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81세), 그것마저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상덕사에 배알하였다. 이황의 훈도로 출발한 그는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황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세로 일관했다.
조목의 학문 활동을 대략 정리하자면, 그가 40세 때 퇴계 선생(당시 70세)을 옆에 모시고 역동서원에서 행한 『심경』강의를 위시하여, 자신의 월천서당에서 한 강학(56, 76세), 도산서원에서 강학(57세)과 다시 역동서원에 의한 강경(58세)과 『심경』강의(71세)가 있었다. 다른 한편 그가 남긴 「퇴계선생언행총록(退溪先生言行總錄)」(49세), 「이학통록발(理學通錄跋)」(53세), 『주서초(朱書抄)」(57세),『잡록(雜錄』(57세), 『개 표주역구결(改標周易口訣)』(73세, 전하지 않음), 『곤지잡록(困知雜錄)』(57세) 등의 저술이 있었다.『곤지잡록』은 성리학에 관한 그의 학설을 전개한 저술로 선학(禪學)의 성격을 띤 양명학은 유학을 그르칠 병통이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조목이 경서 연구에 관심을 갖고 이황에게 질의하게 된 것은 27세 때부터였으나, 도학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 된것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명종 15년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이후의 일이다. 그리하여 39세 때 심경에 관한 질의가 처음 나온 이래 4~5년간 이황과 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圖)라든가 심경부주(心經附註)ㆍ대학장구, 정민정(程敏政)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에 대한 질의와 문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조목은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이후 장수(藏修)와 독행(篤行)으로서 온축(蘊蓄)을 쌓아간 것으로 보인다.
조목은 문장에도 뛰어나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은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자네의 글은 장장의 대하(大河) 같으며 한퇴지(韓退之)에 밑지지를 않겠다”고 하였다. 정온은 조목의 신도비에서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였다. “선생의 미질(美質)은 퇴계를 스승으로 모심으로서 성취될 수 있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제자로 거둠으로서 빛나게 되었도다. 선생이 아니라면 어찌 퇴계의 마탁(磨琢)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었다면 어찌 선생의 깨우침을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인가”
조목의 존재가 중앙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선조 6년 삼공(三公)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ㆍ정인홍ㆍ최영경ㆍ김천일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였다. 그는 다섯 인물가운데 수천(首薦)이었으며 단번에 參上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에 종2품인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차례에 걸쳐 혹은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사직하고, 소명에 응한 것은 몇 차례에 불과했다.
조목은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쉽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조 17년 영덕현령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갑신 사직소와 강화에 반대해 올린 갑오 진정소 그리고 정탁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 및 삭(朔)ㆍ촉(蜀)ㆍ낙(洛) 3당시비론을 통해 그 일면을 찾아볼수 있다. 갑진년의 「사직소」에서 그는 호우겸병(豪右兼倂)과 간리농법(奸吏弄法)은 엄격히 단속해야 옳지만 너무 지나쳐 혹 횡리원사자(橫罹寃死者)가 있을지 모르므로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조목의 이같은 건의는 향촌활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당시 향촌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녔다. 두번째 조목은 이탕개난(泥湯介亂)을 계기로 왕이 국방력을 강화하고 군사를 양성하려는 정책을 취하려는데 대해 민심이 한번 흩어지면 다시 수습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민심안정을 우선하면서 민심과 관련된 내치를 튼튼히 하는 고본(固本)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조목의 이 주장은 후일 사림 정치에서 표방되던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의 선구를 보인 것으로 주목된다.
그의 「문도록」에는 권춘란, 이산해, 이준, 금경ㆍ금업ㆍ금개ㆍ금각의 4형제가 돋보인다. 이황의 수 많은 제자 중 유일하게 도산서원에 종향되었다.

4) 성성재 금난수
성 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1530~1604)는 임천서당(臨川書堂)에서 강학하던 청계 김진(靑溪 金璡)에게서 수학하였다. 금난수는 이곳에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고 이들과 함께 독서한 내용을 서로 강론하여 마침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터득하였다. 21세에 이황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이기변(理氣辨)」을 지어 선생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마음을 잘 다스려 항상 깨어 있도록 하라(惺惺主人, 不失照管)”는 말씀이 있게 되었다. 또한 동계(東溪) 위에다 성성재(惺惺齋)를 신축하였는데, 이황은 손수 성재라는 편액과 임경대(臨鏡臺), 풍호대(風乎臺), 총춘대(總春臺), 활원당(活源塘) 등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다.
일찍이 이황이 정한 온계동약(溫溪洞約)을 직접 베끼고 몇 조목을 첨가하여 동중향약(洞中鄕約)을 만들고, 수시로 동네 사람들을 모아 거듭 깨우치고 가르쳤다. 봉화현감이 되었을 때 향약의 시행을 도모했는데, 고을에 첩(帖)을 내려 말하기를, “퇴계선생께서 고향에 향약을 세우심이 어찌 비단 우리 한 고을 만의 화목을 돈독히 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온 나라 안의 향리에 널리 퍼뜨려 지키고 시행한다면 실로 국가에 교화가 두터워지는 큰 행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고, 벼슬이 익위(翊衛)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듭 본읍을 지키라는 첩문을 받고, 명나라 장졸들이 길을 나누어 남하할 때에 보급이 차단되어 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공이 다방면으로 주선하여 그 비용을 조달하였다.
그는 조목과 함께 계문(溪門)의 고제로서 사문의 학문과 언행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하였고, 아울러 후학들을 무실(務實)의 학문세계로 인도하는 일 역시 보람있는 일로 생각하였다. 이덕홍, 남치리, 구찬록 등은 모두 그로부터 감화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전란의 공훈으로 좌부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5) 송암 권호문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은 약관의 나이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3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탄식하기를 “뜻을 굽히고 과거를 본 것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무엇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황은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하는 일은 이미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일찍이 여기에 대해 판단을 내려 자기의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옮을 것이다. 마음먹기를 평소부터 이같이 한다니 심히 선하고 심히 아름답다”고 하였다. 정탁과 구봉령 등이 여러번 관직에 추천하였으나, 권호문은 「한거록(閒居錄)」을 내보이며 은거하려는 뜻을 나타내었다. 김성일은 “노선생(퇴계)의 고요하고 묵묵하며, 온화하고 아담한 기상은 오직 그 만이 간직하고 있다”하였고 류성룡도 백세의 사표라고 칭송하였다. 평생 청성산에 살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집의 남쪽에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송암(松巖)이라 하였다. 권호문은 이곳에 한서재(寒棲齋)를 지었다. 문인은 정연(鄭淵)과 안여옥(安汝沃)이 있으며, 저술은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6) 회곡 권춘란
회곡 권춘란(晦谷 權春蘭, 1539~1617)은 14세 때 구봉령의 문하에서 배운 뒤에 이황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구류백가(九流百家)의 서적을 두루섭렵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주역에 능통했다. 학문과 산수를 지극히 사랑하여 숲속에서 글을 읽고, 도를 강조한 그는 효행과 우의도 아주 깊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드려 한달 만에 낫게 하였다고 한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지평 등의 내직과 여러 고을의 수령직을 맡았다. 예문관 검열겸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뒤에 옥당에 들어갔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청렴결백한 관리로써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영천군수시절에는 “정민심, 선풍속(正民心, 善風俗)”하는 일을 행정의 목표로 삼아 마을의 노인들을 모셔다가 술과 음식을 잘 대접하여, 마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봉양하는 의리를 깨우치게 하였다. 또한 그는 그 지방의 주민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를 숭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단호한 철폐령을 내렸다. “귀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앞으로 계속 이 같은 괴이한 풍속을 따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후 영주지방의 해괴한 풍속은 자취를 감추었다. 더불어 그의 방 벽에는 “평이근민(平易近民)”이라는 4자를 써붙이고 책상 위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두어 공무의 여가에 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을 싫어한 그였지만 그는 분연히 일어나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용전분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뒤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 말년에는 류성룡과 함께 서미동(西美洞)에 모여 강학과 토론을 하였다. 을사년(1605)에는 크게 훙수가 나서 여강서원이 떠내려가자, 다시 건축할 것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또 홍수가 있을까 근심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서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춘란은 “퇴계 선생의 남긴 발자취가 여기에 있으니,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하였다. 스승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고, 결국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문을 교정하여 『백담집』을 완성하였다. 저술로는 「진학도(進學圖)」, 「공자언인록(孔子言仁錄)」이 있다. 뒷날 용산(龍山) 백담사(栢潭祠)에 배향 되었다.

7) 간재 이덕홍
간 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1541~1596)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의 종손(從孫)이다. 그의 나이 18세 되던 명종 13년(1558년) 가을에 금난수에게서 고문을 수업하기 시작하면서 학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이황에게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명종14년이다. 이황은 그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뜻이 두텁고 말씨와 행동이 온화함을 가상하게 여겨 이름을 덕홍이라 지어 주었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측근에서 늘 그와 함께 생활하였다. 이덕홍이 이황과 긴밀한 관계였음은 『퇴계언행록』에 이덕홍과의 질의 응답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독서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소주(小註)나 자잘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이덕홍은 전형적인 재지사족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학문에 침잠하였지만, 출사의 기회를 결코 기피하지는 않는 유형의 선비였다. 그는 과업(科業)에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부거(赴擧)한 사실은 없었다. 그러했기에 그가 거친 관직은 참봉ㆍ봉사ㆍ직장ㆍ부졸 등 한직과 외직의 현감이 전부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10여 년간 그의 측근에 늘 머물었던 그의 흔하지 않는 제자 중의 하나였다. 그의 출사도 스승이 죽고 난 여러 해 뒤였는데, 이 또한 스승의 출처관과 현실대응자세를 체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는 출사 후 현실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그것에서 발휘된 그의 관인으로서의 역량보다는 그가 끼친 학문적 성과가 훨씬 컸다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조선왕조의 사대부는 그 능력이나 출처 및 현실대응의식 등에 따라 대개 다음의 몇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시부(詩賦) 등 사장(詞章)에 능한 자, 전술과 전략에 일가견을 가진자, 성리학과 예학에 일가견을 가진자, 경세술과 행정실무에 능한자, 즉 문ㆍ무ㆍ학〔哲〕ㆍ이(吏才) 등 네 부류가 그것이다.(이수건,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학파」, 『한국의 철학』 23) 이에 근거하여 보면, 이황의 문인들도 그 학문적 수준 및 성향, 출처관, 학문과 관직의 연계성, 현실 대응 의식 및 자세 등 여러 측면에서 몇 부류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덕홍은 그의 장년기에 출사하여 일정 기간 관리생활을 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생애에서 지니는 무게가 그다지 크지 않음은 이미 논급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위 네 부류 중 학[哲]에 속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관에만 매달리던 권척 세력이나 학문보다는 사환에 더 기울고 있던 사림계 일부 인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위학(爲學)ㆍ수기(修己)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치인(治人) 곧 출사를 완전히 배격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했기에 그의 학문적 성과는 상당한 질량으로 그의 문집 속에 남아, 그의 사상 체계와 이황 문도 내에서의 위상, 나아가서 영남학파 내에서의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덕홍은 성리학 뿐 아니라 우주천체에 대한 자연과학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30세때 이황의 명을 받아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도하던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하였다. 특히 그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구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다. 유림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덕홍이 제작한 거북선의 설계도는 류성룡에게 넘어가 이순신에게 보내졌다는 설과 이황의 문인이며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을 통해 이순신에게 전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이덕홍은 이황의 언행을 조목조목 빠짐없이 적어 두었다가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이라 이름지었으며, 『중용』ㆍ『심경』ㆍ『가례』등의 주석이 있다. 그의 문집에서 논어질의ㆍ맹자질의ㆍ중용질의ㆍ대학질의ㆍ주역질의ㆍ심경질의ㆍ고문전집질의ㆍ고문후집질의ㆍ가례주해 등 그의 학문체계를 보여주는 저작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중에 『심경질의』는 뒷날 왕명으로 국가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에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8) 비지 남치리
비지 남치리(蕡趾 南致利, 1543~1580)는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이웃 마을에서 일컬어 말하기를 “어린아이의 공부가 남씨집 아이 같다면 어찌 가르칠 수 없음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6세에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다음, 21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그가 28세 때 스승인 이황의 타계하는데, 이황의 문하 제현들이 그를 상례(相禮)로 추대하여, 20대의 젊은 나이에 남치리는 스승의 장례를 예법에 맞추어 이끌어 가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일찍이 “사람이 배움에 있어서 배고픈 자가 음식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리오”라고 하였다. 가난과 곤궁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여 당시에 이황 문하의 안자(顔子)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그는 이황이 타계한 뒤에 더욱 분발하고 추앙하여 착실하게 독서하였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돈독하게 선사를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라고 하였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효종 4년(1653)에 사림들은 그가 살던 고림촌(高林村)에 세운 노림서원(魯林書院)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비지집(賁趾集)』이 있다.

9) 송소 권우
송 소 권우(松巢 權宇, 1552~1590)는 그 부친 인재 권대기(忍齋 權大器)와 함께 부자가 모두 이황의 문인이었다. 19세에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배우고, 위기지학에 힘썼으다. 이황으로부터 금매헌(금매헌)이 쓴 『주역대전(주역대전)』을 받았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학문에 힘쓰고자 14년 동안 향리에 머물러 있었으나 1586년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복상중인 1587년 왕자사부(王子師傅)의 명을 받아 나아갔다. 선조가 경서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왕자를 통하여 물었을 때 조리있게 풀이하여 답변하였다. 권우는 태극도, 통서, 서명, 정주의 성리서에 융통하였고 논맹용학등의 경서에도 아주 밝았다. 나아가 의학, 산학, 사기에도 정통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조목을 사사(師事)하였고, 남치리, 김해, 이덕홍 등과 교분이 있었다. 또한 류성룡, 김성일, 구봉령, 권호문등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승지에 추증되었다. 『송소집(松巢集)』이 있고, 경광사(鏡光祠)에 제향되었다.

9) 기타 제자들
이밖에 이황의 문인록과 개인문집에 이황과 사승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안동ㆍ예안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눌 재 김생명(訥齋 金生溟, 1504~1577)은 1543년 봄에 이황을 도산에서 배알하였으며, 재실을 짓고 이황의 뜻에 따라 눌재로 편액하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동호 변영청(東湖 邊永淸, 1516~1578)은 이황 문하에서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 1519~1592)은 일찍 급문하였으며, 암서헌(巖棲軒) 가까이에 낙익정(樂益亭)을 짓고 살면서 『주자서절요』와 『심경』을 애독하였다. 『매암집(梅巖集)』이 있다. 청암 이원승(靑巖 李元承, 1518~1572)도 일찍 문하에 들어와 이황과 주고 받은 서찰이 있다. 『청암유고(靑巖遺稿)』가 있다.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1522~1585)은 약관의 나이에 등문하였다. 『약봉집』이 있다.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은 김극일의 동생이다. 유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천거로 찰방에 보임되었다. 『연방세고(聯芳世稿)』가 있다.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1534~1570)은 김극일의 동생이다. 청교(請敎)와 질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방세고』가 있다.
매헌 금보(梅軒 琴輔, 1521~1584)는 퇴계 문인록에는 20세에, 개인 문집에는 26세에 각각 수업을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헌집』이 있다. 춘당 오수영(春塘 吳守盈, 1521~1606)은 16세에 등문하였다. 이황이 손수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써 주었다. 지산 김팔원(芝山 金八元, 1524~1569)은 먼저 주세붕에게서 배웠다. 후에 이황에게 등문하였다. 1555년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문과에 붙었다.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계모의 상에 너무 몸을 상하게 하여 회복하지 못하고 46세에 죽었다. 『지산집』이 있다. 약포 정탁(藥圃 鄭琢, 1526~1605)는 어려서 중부(仲父) 정이흥에게 배웠으며, 자라서는 이황과 남명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황의 문하에 든 것은 그의 나이 16세(1542) 되던해 였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도정사(道正祠)에 향사하였다. 『약포집』이 있다. 창균 김기보(蒼筠 金箕報, 1531~1588)은 먼저 성수침(成守琛)에게 배웠다. 후에 이황에게 배웠다. 『창균일고』가 있다. 문봉 정유일(文峯 鄭惟一, 1533~1576)은 일찍 등문했으며, 류성룡, 김성일, 구봉령이 높이 평가 했다. 경연(經筵)에서 평하기를 역사상 진학사(眞學士)라 칭하였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고, 『문봉집』이 있다. 임연재 배삼익(臨淵齋 裵三益, 1534~1588)은 이황 문하에서 『심경』, 『시경』의 강의를 들었다. 해서지방에 기근이 들어 방백을 몰색하는데, 조정에서 배삼익이 아니면 안되다고 하였다. 임지에 이르러 백성들이 그를 믿고 소생하였다. 임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임연재집』이 있다. 파산 유중엄(巴山 柳仲淹, 1538~1571)은 문인록에 유문했다 기록되어 있다. 서애의 삼촌으로 『파산일고』가 있다.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은 약관의 나이에 김성일과 함께 배알하였다. 김성일의 동생이다. 『연방세고』가 있다. 송간 이정회(松澗 李庭檜, 1542~1612)은 이황의 종손(從孫)이다. 개인 문집에 “안으로는 이황이 조부로서 경계하고 밖으로는 김성일이 외사촌으로서 경계하였다”고 적고 있다. 『송간집』이 있다. 학천 이봉춘(鶴川 李逢春, 1542~1625)도 이황문하에 등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성일, 우성전, 정사성 등과 강론하였다. 퇴계문집을 교감, 간행하였다. 『학천유집』이 있다. 지헌 정사성(芝軒 鄭士誠, 1545~1607)은 7세에 김언기에게서 배웠으며, 구봉령에게서도 배웠다. 17세에 이황문하에 등문하였다. 조성당 김택룡(操省堂 金澤龍, 1547~?)은 먼저 조목에게서 배우고, 후에 이황 문하에서 유문하였다. 『조성당집』이 있다. 삼성재 손흥례(三省齋 孫興禮, 1548~1578)는 11세에 구봉령에게 수학하였다. 16세에는 김언기에게 종학하였고, 20세에 이황 문하에 등문하였다.『삼성재일고』가 있다. 낙금헌 이정백(樂琴軒 李庭柏, 1553~1600)은 5, 6세 때 이황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칭찬하고 학문을 권면하였다 한다. 김성일(이정백과는 내외 종간), 남치리와 도의를 강마하였고, 퇴계문집을 교정, 정서하였다. 『낙금헌집』이 있다.
<안병걸 : 안동대 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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