霽 山 先 生 年 譜
      (諱 聖鐸, 字 振伯, 號 霽山, 숙종 10(1684) - 영조 23(1747))


肅宗大王十年甲子八月十二日丑時先生生于英陽縣靑杞里第 先生先世居安東府臨河縣之川前里六代祖靑溪公有別業在靑杞先處士公初年寓居焉


숙종대왕 10년 갑자(서기1684년): 팔월 십이일 축시,선생께서 영양현 청기리 집에서 태어나시다. 선생의 선대께서는 안동부 임하현의 천전리(내앞)에 사셨으나 육대조 청계공(휘 璡)께서 청기에 딴 농장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선생의 아버님 처사공(휘 泰重)께서 초년에 그곳에 사셨다.


十一年乙丑 先生二歲 姿貌淸泂如氷玉照映


11년 을축(선생 2세, 1685): 태도와 모습이 맑고 깨끗하여 얼음같은 옥에 빛이 비친 것 같았다.


十二年丙寅 先生三歲 與群兒遊戱庭中一兒匍匐阽危地先生扶持不能止則口不能言疾聲啼號長者聞之往救得不墜聞者異之


12년 병인(선생 3세, 1686): 여러 아이들과 뜰 가운데서 노시다가 한 아이가 낭떠러지 위험한 곳에 기어가므로 선생은 붙잡아 멈출 수도 없고 말씀도 할 수 없을 때인지라 크게 소리질러 우시니 어른이 듣고 가서 구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이를 기이히 여겼다.


十三年丁卯 先生四歲


13년 정묘(선생 4세, 1687)


十四年戊辰 先生五歲


14년 무진(선생 5세, 1688)


十五年己巳 先生六歲


15년 기사(선생 6세, 1689)


十六年庚午 先生七歲 始受學 聰敏穎悟絶出等夷一經耳目輒不忘


16년 경오(선생 7세, 1690)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시다. 총민하시고 깨닫는 것이 남달리 뛰어나시어 한번 듣고 보신 것은 매번 잊어버리지 않으셨다.


十七年申未 先生八歲


17년 신미(선생 8세, 1691)


十八年壬申 先生九歲 十二月還臨河 祖考進士公喪出臨河寓舍先生隨侍處士公于喪次


18년 임신(선생 9세, 1692): 12월에 임하로 돌아오시다. 할아버님 진사공(휘 邦烈)의 상행이 임하의 집을 나가실 때 선생은 상차에서 아버님 처사공을 따라 모셨다.


十九年癸酉 先生十歲 隨處士公還川前里


19년 계유(선생 10세, 1693): 처사공을 따라 천전리로 돌아오시다.


二十年甲戌 先生十一歲 受學于從叔父適庵先生 諱台重德行文章重一世於諸子姪中特鍾愛先生常曰此兒天資近道又曰孤寂中某兒至則如得明珠良玉心目自然開明云 有畵鷹詩一絶云海上孤巖百尺危北來霜鶻幾年斯雄心欲擊南圖翼肯向平原覓雉爲


20년 갑술(선생 11세, 1694): 종숙부 적암선생께 학문을 배우시다. 휘는 태중이시고 덕행과 문장으로 일세에 드러나셨다. 여러 자제와 조카들 중에서 특별히 선생을 사랑하시어 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의 천연자질이 도에 가깝다.” 하시고 또, “외롭고 적적하다가도 아무개가 오면 밝은 구슬이나 좋은 옥을 얻은 것 같고 마음의 눈이 환히 열린다.”고 하셨다. 매를 그린 그림이 있어 시 한 절구를 읊으시되, “바닷가 외로운 바위 백척이나 솟았는데, 북에서 온 서리매 어느 해에 왔던가. 웅대한 마음은 남쪽을 치려 나래를 펴고 있는데, 즐겨 저 평원에 꿩 따위를 찾아 향할까.” 하셨다.


二十一年乙亥 先生十二歲 適庵公欲試才一日課授盡西都賦明朝背誦無滯公喜曰此賦所載人物物産臺亭名號錯亂最難誦此兒無一字差誤雖古所稱聰敏者無以過矣


21년 을해(선생 12세, 1695): 적암공께서 재질을 시험하고자 하여 하루는 서도부를 다 가르치시고 이튿날 아침에 보지 않고 외게 하셨다. 막히는 데가 없으니 공이 기뻐 말씀하시기를, “이 노래에 실려 있는 인물과 물산과 대루와 정자의 이름들이 섞이고 혼란스러워서 가장 어려운데 이 아이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비록 옛날의 총민하다 일컫는 사람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二十二年丙子 先生十三歲 自是進止有度儼若成人不待課督自知力學家人或失其所在輒在書樓中端坐觀書


22년 병자(선생 13세, 1696): 이때부터 나아가고 머무름에 법도가 있어 엄연하시기가 어른과 같으셨다. 공부는 독촉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스스로 알아서 하셨으며 집안 사람들이 그 계신 곳을 알지 못하여 찾아보면 늘 책방에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고 계시었다.


二十三年丁丑 先生十四歲


23년 정축(선생 14세, 1697)


二十四年戊寅 先生十五歲 遊虎溪書院 從多士肄擧子文累居前列


24년 무인(선생 15세, 1698): 호계서원에 가시다. 여러 선비를 따라 과거한 사람의 글을 익히시는데 여러번 앞줄에 서셨다.


二十五年己卯 先生十六歲


25년 기묘(선생 16세, 1699)


二十六年庚辰 先生十七歲 請學于葛庵李先生之門 時李先生自晞陽謫所放還講道于錦水四方學子坌集先生以適庵公命往拜焉李先生一見甚愛之因講大學令自發問疑難輒許獎之曰此子資稟絶異見識精明將來成就未可量也 一日與門下諸人燕語密庵公栽曰願聞諸君之志諸人次第對先生獨不言密翁曰君何不言對曰志大而行不及恐無實故不敢對密翁以告先生先生曰童子已見大意


26년 경진(선생 17세, 1700): 갈암 이선생(諱 玄逸)의 문하에서 학문을 청하시다. 이때 이선생은 희양의 귀양지로부터 풀려나 돌아와 금수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사방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선생은 적암공의 명으로 가서 뵈었다. 이선생은 한번 보고 매우 사랑하여 이에 대학을 강하고 스스로 의심나거나 어려운 곳을 물으라 하고는 매번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자품이 남다르고 소견과 지식이 정밀하고 명쾌하니 장래의 성취를 미처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루는 문하의 여러 사람들과 쉬면서 대화하는데 밀암공 재가 말하기를 “원컨대 그대들의 의지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차례로 대답하였으나 선생이 홀로 말하지 않으니 밀암이 말하기를, “그대는 왜 말하지 않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뜻은 크고 행동은 미치지 못하여 실속이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고 하여 밀암이 이 말로써 선생에게 아뢰었다. 선생은, “그 아이가 이미 큰 뜻을 알았구나.”고 하였다.


二十七年申巳 先生十八歲 春陪李先生賞花菊巖 次先生詩曰洞裏風和宿霧收步尋溪路得意遊興來不覺山醪盡手折巖花揷滿頭 嘗侍坐適因事左右皆笑先生獨正色若無覩李先生頻頻目視之後語人曰此人多才而內守有餘他日成就必有大過人者 聘夫人務安朴氏 武毅公毅長孫通德郞震相之女 始冠往拜李先生先生問曰備禮而冠乎對曰未也先生曰昔吾外翁敬堂公見人之不行禮而冠者與之往其家設席爲禮吾不能然擧三加祝中語申申敎詔


27년 신사(선생 18세, 1701): 봄에 이선생을 모시고 화국암을 완상하시다. 선생의 시에 차운하시기를, “골짜기 속 따뜻한 바람이 묵은 안개를 걷어가니, 계곡 길 걷고 걸어 마음껏 노니노라. 흥겨워 산중 음식이 다한줄도 몰랐었네, 바위 위의 꽃을 꺾어 머리 위에 꽂았으니”라 하셨다. 일찍이 일이 있어 이선생을 모시고 있을 적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선생만 홀로 남달리 정색을 하고 있는 것을 웃었다. 이선생은 그런 일을 자주 보고 뒤에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재주가 많고 속에 넉넉히 지킴이 있으니 다른 날 성취가 반드시 남을 크게 앞지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 무안박씨를 맞으시다. 무의공 의의 장손인 통덕랑 진상의 따님이시다. 처음 갓을 쓰시고 이선생께 가 뵈었더니 이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예를 갖추어 행하고 갓을 썼는가?” 하셔서, “아직 못했습니다.”고 하자 선생이, “지난 날 내 외조부 경당공께서 어떤 사람이 행례하지 않고 갓을 쓴 것을 보시고 그와 함께 그 집에 가시어서 자리를 펴고 예를 행하셨는데, 나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삼가축(관례에서 세번의 절차와 그에 따른 축복)의 말을 들어 신신 가르쳐 알리리라.” 하셨다.


二十八年壬午 先生十九歲 隨處士公移居于汾浦 時適庵公先卜居于此先生朝夕就見習聞家世遺範及君子立身行己之道


28년 임오(선생 19세, 1702): 처사공을 따라 분포로 옮겨 사시다. 이때 적암공이 먼저 이곳에 자리잡고 사셨는데 선생은 조석으로 나아가 뵙고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규범과 군자 입신 행기의 도리를 배웠다.


二十九年癸未 先生二十歲 冬往留錦水 時同門諸人適散歸先生獨留講學每講論之際李先生曰君他日必見用於世凡經國之事格君之說當留念也 間與先生之孫之燔講究朞三百布筭法後有註解


29년 계미(선생 20세, 1703): 겨울에 금수에 가 머무르시다. 이때 동문의 여러 사람들은 마침 흩어져 돌아갔는데 선생만 홀로 남아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매번 강론할 때마다 이선생이 말씀하기를, “그대는 다음에 반드시 세상에 쓰일 것이니 무릇 나라 일을 경영할 때는 그대의 말을 바르게 실천할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끔 선생의 손자가 셈가지로 계산하는 삼백포산법을 강하는 데 함께 했다. 뒤에 주해가 있다.


三十年甲申 先生二十一歲 正月往參錦陽壽席 是月十一日李先生晬辰也子弟設酌邀賓友酒半先生特呼先生曰吾二人相見雖晩意寄不淺今日相與之意君其識之因告學者入道次第 十月哭李先生 先生以登門未久遽失依歸常痛恨焉


30년 갑신(선생 21세, 1704): 정월에 금양의 환갑잔치에 가 참석하시다. 이달 십일일은 이선생의 환갑이라 자제가 술자리를 베풀고 멀리 손님과 벗들을 청했다. 술이 반쯤 되었을 때 이선생이 특별히 선생을 불러 말씀하기를, “우리 둘이 만나기는 비록 늦었지만 뜻이 맞기는 얕지 않다. 그대는 이것을 아는가?”하고 이어서 학자의 입도하는 차례를 일러주었다. 시월에 이선생을 잃으시다. 선생은 문하에 오른지 오래지 않아 문득 기댈만한 곳을 잃게 되어 늘 통한하셨다.


三十一年乙酉 先生二十二歲 隨處士公還川前之雨谷


31년 을유(선생 22세, 1705): 처사공을 따라 내앞 빗골로 돌아오시다.


三十二年丙戌 先生二十三歲


32년 병술(선생 23세, 1706)


三十三年丁亥 先生二十四歲 有隨見漫錄


33년 정해(선생 24세, 1707): ꡔ수견만록ꡕ이 있다.


三十四年戊子 先生二十五歲 子晉行後改樂行生 陪適庵公校瓢隱集于陶淵 時適庵公與權蒼雪斗經李密庵諸公會校 有酬和諸詩


34년 무자(선생 25세, 1708): 아들 진행(뒤에 낙행으로 고침)이 나시다. 적암공을 모시고 도연에서 표은집을 교정하시다. 이때 적암공과 창설 권두경 공,이밀암 공 등 여러 분이 모여서 교정하셨다. 주고 받으신 여러 시가 있다.


三十五年己丑 先生二十六歲


35년 기축(선생 26세, 1709)


三十六年庚寅 先生二十七歲 秋中鄕解


36년 경인(선생 27세, 1710): 가을에 향시에 뽑히시다.


三十七年申卯 先生二十八歲 二月中進士三等十三人 三月哭適庵公 有祭文後撰言行錄 書許荷谷朝天錄後 在集中 秋哭外祖秋潭金公 諱如萬 後撰行錄


37년 신묘(선생 28세, 1711): 이월에 진사 삼등 삼십삼인에 뽑히시다. 삼월에 적암공의 상을 당하시다. 제문이 있으며 뒤에 언행록을 찬하셨다. 허하곡의 조천록에 후발을 쓰시다. 문집 속에 있다. 가을에 외조부 추담 김공의 상을 당하시다. 휘는 여만이시며 뒤에 행록을 찬하셨다.


三十八年壬辰 先生二十九歲


38년 임진(선생 29세, 1712)


三十九年癸巳 先生三十歲 子兌行生 有才性年十二而夭先生甚傷惜之有祭文


39년 계사(선생 30세, 1713): 아들 태행이 나시다. 재주와 품성이 있었으나 열 두살에 돌아가니 선생은 이를 매우 아까워 하셨으며 제문이 있다.


四十年甲午 先生三十一歲 冬赴省試報罷 與顧齋李公槾同行在道止舍處輒講討名理


40년 갑오(선생 31세, 1714): 겨울에 성시에 가시다가 소식을 듣고 파의하시다. 고재 이만 공과 동행하시다가 도중에 멈추셨는데 사처에서 늘 명리를 강토하셨다.


四十一年乙未 先生三十二歲 題霽峯漫錄 見集中 會講于陶淵 適庵公嘗就陶淵建書堂聚講門子弟至是先生與再從兄雨溪命錫臥溪聖欽追續舊規有次雨溪詩


41년 을미(선생 32세, 1715): ꡔ제봉만록ꡕ을 제하시다. 문집 속에 있다. 도연에서 회강하시다. 적암공께서 일찍이 도연에 가시어 서당을 세우시고 집안의 자제들을 모아 강론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께서 재종형 우계공(휘 명석) 와계공(휘 성흠)과 더불어 옛 법도를 좇아 이으셨다. 우계공의 시에 차운한 시가 있다.


四十二年丙申 先生三十三歲 子霽行生 冬訪表兄鄭塤叟萬陽篪叟葵陽兄弟于橫溪 講論經旨多所辨析


42년 병신(선생 33세, 1716): 아들 제행이 나시다. 겨울에 고종형 훈수 정만양 공과 지수 정규양 공 형제분을 횡계로 방문하시다. 경서의 뜻을 강론하시고 변석하신 것이 많았다.


四十三年丁酉 先生三十四歲 答李密庵書 論中庸論語疑義及渚宮梅花詩義 先生自師門易簀之後痛失依歸以密翁得家學之傳一意尊嚮書疏論辨殆無虛時


43년 정유(선생 34세, 1717): 이밀암선생께 답서를 보내시다. 중용과 논어의 의의처와 저궁매화시의 뜻을 논하셨다. 선생께서는 사문의 스승을 잃으신 뒤부터 의귀하실 곳을 잃음을 안타까워 하시고 밀암선생이 가학을 얻으셨다 하여 한 뜻으로 높이시고 글로써 토론하시고 변해하시어 헛되이 보내신 시기가 거의 없었다.


四十四年戊戌 先生三十五歲 構雨谷草堂 名曰可軒有記文 課授學子有學令


44년 무술(선생 35세, 1718): 우곡초당을 지으시다. 가헌이라 이름하셨으며 기문이 있다. 배우는 자제들을 가르치셨으며 학령이 있다.


四十五年己亥 先生三十六歲 立春書門橌曰學當日新行當日競至於當貴以竢天命 春赴增廣試 歷拜同鄕一長老有友人偕長老授關節二紙友人正色裂其紙先生笑而受之到江上投其紙而去及見屈屛谷權公榘喜曰某之見屈吾儕可相賀也


45년 기해(선생 36세, 1719): 입춘에 문간에 쓰시기를, “배움은 마땅히 날로 새롭게 할 것이요, 행함은 마땅히 날로 힘쓸 것이며, 귀하게 되면 이로써 천명을 기다릴 것이다.”하셨다. 봄에 증광시에 응하시다. 가시다가 동향의 한 어른을 뵈었는데 벗과 함께였다. 같은 어른이 관절(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보내거나 부탁하는 편지) 두장을 주자 벗은 정색을 하고 그 종이를 찢어버렸는데 선생은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강 위에 이르러 던져 버리고 가셨다.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시자 병곡 권구선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이 사람이 급제하지 못한 것은 우리 모두 함께 축하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四十六年庚子 先生三十七歲 六月 肅宗昇遐


46년 경자(선생 37세, 1720): 6월 숙종이 돌아가시다.


景宗大王元年辛丑 先生三十八歲 春與同門諸人爲李先生訟寃治疏入京 李先生己巳初以國子司業赴召至廣州聞坤宮不安之報卽因辭疏引漢光武宋仁宗故事備陳愼始敬終之道而見阻喉司其秋因應旨疏復申之爲一邊人所構捏名在丹籍未蒙昭雪者幾三十年至是有還給職牒之命而因臺論還收門下諸公爲擧幡而不得呈徹 秋赴省試至忠州以痘忌還 時江左權公萬在京以先生有從姪喪措語呈禮曹出送陳試公文先生以爲國法非朞服不許陳試今以小功爲朞服是欺君也後竟不赴


경종대왕 원년(선생 38세, 1721) 봄에 동문 여러분과 더불어 이선생의 원통함을 밝히려 상소를 준비하여 서울로 가시다. 이선생은 기사년 초에 국자사업의 벼슬로 부름에 응하여 광주에 이르렀을 때 왕비가 불안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사직하는 상소를 내면서 한나라 광무제와 송나라 인종의 고사를 인용하여 삼가로운 시작과 공경하는 마침의 도리를 진술하였다. 그러나 후원(승정원)에 의해 의사가 막힘을 당하고 그 가을에 응지소로 회복하려 했으나 한갓진 사람들이 억지로 꾸민 바 되어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있고 깨끗이 해명되지 못한 지가 거의 삼십년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직첩을 되돌려 주라는 명이 있었으나 대간의 논의로 인해 도로 거두어졌다. 문하의 여러분이 위하여 의사를 표했으나 글을 올리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가을에 성시에 응하러 충주까지 가셨으나 천연두를 꺼려 되돌아오시다. 이때 강좌 권만 공이 서울에 있었는데 선생이 종질의 상을 당한 것으로 인하여 예조에 글을 보내어 진시(사정에 의해 다음 기회에 시험에 응하는 것)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국법에 기복(1년 복상)이 아니면 진시를 허락하지 않는데 지금 소공(5개월 복상)을 기복이라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라 하셨고 뒤에 마침내 과거에 응하지 않으셨다.


二年壬寅 先生三十九歲 春奉處士公避痘于錦水 日就密庵公質問經義密庵歎曰每見某不覺心開眼明又曰爲學如某足矣 哭克齋申公 益愰有輓詩


2년 임인(선생 39세, 1722): 봄에 처사공을 모시고 금수에서 천연두를 피하시다. 날마다 밀암공께 나아가 경서의 내용을 물으시니 밀암공이 감탄하시기를,“매번 이 사람을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열리고 눈이 밝아진다.”고 했으며 또,“공부는 이 사람처럼 하면 족하다.”라고도 했다. 극재 신공을 잃으시다. 익황이며 만시가 있다.


三年癸卯 先生四十歲 春又爲師門設疏入京 伏閤累日竟不得徹 次蒼雪齋楮谷三勝韻 楮谷卽存齋李先生棲息之所有雷澤葛川玉川三勝


3년 계묘(선생 40세, 1723): 봄에 또 스승을 위하여 상소를 만들어 서울로 가시다. 대궐 앞에 엎드려 여러 날을 지났으나 마침내 올리지 못하였다. 창설재 저곡 삼승운에 차운하시다. 저곡은 곧 존재 이선생이 사신 곳인데 뇌택과 갈천과 옥천이 세 명승이다.


四年甲辰 先生四十一歲 與密庵書 時弄淸權公相一稟經義於密庵密庵答書中有可疑處故先生以書質問之 是年知府朴公師洙來訪求見先生所述文字先生辭以方業擧子文出示科策一篇 八月景宗昇遐


4년 갑진(선생 41세, 1724): 밀암선생께 글을 보내시다. 이때 농청 권상일 공이 밀암공께 경서의 뜻을 물었을 때 밀암공의 답서 중에 의문나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글로써 이를 물으셨다. 이해에 부사 박사수 공이 찾아와 선생이 지으신 글을 구하여 보고자 했다. 선생은 하향의 공부중인 사람의 글이라고 사양하시고 과책 한 편을 내어 보이셨다. 8월에 경종이 돌아가시다.


英宗大王元年乙巳 先生四十二歲 正月丁處士公憂 居喪一遵禮制以太碩人在堂有或勉循而至於飮食之節嚴飭家人毋得近草木之滋神觀日漸嬴瘠弔者皆爲先生憂之密庵亦貽書而戒之 三月葬處士公于老萊山 在靑松府西 方求葬地戒地官以無占他人害處樸齋柳公錫斗聞曰當喪求山而先立是心雖古君子亦所難也 十一月爲文祭葛庵先生 自申石移奉內林時


영종대왕 원년 을사(선생 42세, 1725): 정월에 처사공 상을 당하시다. 거상에 모두 예제를 따르시고 어른으로서 집에 계시면서 때로 타이르시고 살피시며 음식의 절도에 이르러는 집안 사람을 엄하게 신칙하시어 가까운 초목의 맛도 얻지 않으려 하시니 신관이 날로 수척해지시어서 조문하는 이들이 다 선생을 위하여 걱정하고 밀암공도 글을 보내어 경계하였다. 삼월에 처사공을 노래산에 장사하시다. 청송부의 서쪽에 있다. 바야흐로 장지를 구하실 때 지관더러 남에게 해로운 곳을 차지하지 말 것을 경계하셨다. 박재 유석두 공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상을 당하여 산을 구하는데 먼저 이런 마음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군자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십일월에 글을 지어 갈암선생을 제사하시다. 신석으로부터 내림으로 옮겨 모실 때이다.


二年丙午 先生四十三歲 六月哭季弟命鐸 資稟俊異文學早成而不幸短命先生甚痛惜之 冬與鄭篪叟書 論太極圖疑義 十二月奉遷處士公于靑杞


2년 병오(선생 43세, 1726): 유월에 막내 동생 명탁을 잃으시다. 자질과 성품이 남달리 뛰어나시고 문학이 일찍 성취되셨으나 불행히 단명하시니 선생이 매우 슬퍼하고 아까워 하셨다. 겨울에 정지수 공에게 글을 보내시다. 태극도의 의의를 논하셨다. 십이월에 처사공을 청기로 천장하시다.


三年丁未 先生四十四歲 三月服闋 爲文祭蒼雪齋權公 夏避痘瓢谷 與柳瓠窩顯時柳樸齋柳慵窩升鉉從姪敏行日觴詠講討子晉行從姪宇漢從


3년 정미(선생 44세, 1727): 삼월에 삼년 상기를 마치시다. 글을 지어 창설재 권공을 제사하시다. 여름에 표곡에서 천연두를 피하시다. 과와 유현시, 박재 유석두, 용와 유승현, 종질 민행과 더불어 날마다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셨는데 아드님 진행과 종질 우한이 모셨다.


四年戊申 先生四十五歲 二月御史朴公文秀來訪 朴公素聞先生名至是來訪仍問嶺南人才先生辭謝不對 先生雖在布衣聲聞上徹後因逆變屛谷權公入鞫廳上問所與交對曰李栽金聖鐸上曰可謂取友必端矣 三月赴別試會試中路聞賊變卽還 與松泉子李公萬寧同行至慶安驛聞麟亮逆變起湖西路梗不得前進由間路歸 到家卽赴倡義所 本府章甫齋會鄕校倡起義兵先生白于母夫人卽赴會商議討賊方略推慵窩柳公爲主將先生以參謨從事馳檄列邑將剋期行軍已而罷陣報至遂罷歸 七月與顧齋李公講近思錄于虎溪書院 有詩及序


4년 무신(선생 45세, 1728): 이월에 어사 박문수 공이 방문하였다. 박공은 평소에 선생의 명성을 들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찾아 왔다. 그리고는 영남의 인재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은 사양하며 대답하지 않으셨다. 선생은 벼슬이 없으셨으나 명성은 위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뒤에 역변으로 병곡 권공이 국청에 들어갔을 때 임금이 더불어 사귄 사람을 묻기에 대답하기를,“이재와 김성탁입니다.”하자 임금이, “벗을 취하는 데에 바르다고 할 만하다.”고 했다. 삼월에 별시회시에 가시다가 중로에서 역적의 변을 들으시고 곧 돌아오시다. 송천자 이만녕 공과 동행하시다가 경안역에 이르러 인량의 역변이 일어난 것을 들으셨다. 호서 길이 막혀 나아가실 수 없으므로 사잇길을 따라 돌아오시었다. 집에 오시자 곧 창의소에 가시다. 본부(안동)의 유생들이 향교에 모여 의병을 창기하였다. 선생은 모부인께 아뢰고 모임에 가시어 역적을 토벌할 방략을 의논하시었다. 용와 유공을 주장으로 하고 선생은 참모종사로서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고 장차 날을 받아 행군을 하려 하는데 싸움이 끝났다는 소식이 이르렀으므로 이에 군을 파하고 돌아오시었다. 칠월에 고재 이공과 함께 호계서원에서 근사록을 강하시다. 시와 서가 있다.


五年己酉 先生四十六歲 春與訥隱李公 光庭 遊虎溪書院 舟中次退陶先生泛月濯纓潭韻


5년 기유(선생 46세, 1729): 봄에 눌은 이광정 공과 호계서원에 가시다. 배를 띄우고 퇴계선생의 범월탁영담운에 차운하시었다.


六年庚戌 先生四十七歲 夏哭密庵公 有輓詩及祭文 答監司豊原君趙公 顯命 書 趙公書有執贄請學之語先生辭謝還其所送紙物 七月與族兄伊湖公 世鏞 書 論南賁趾先生年譜改正事 哭塤叟鄭公 有哀辭及祭文 八月除英陵參奉 先是按覈使吳公光運疏薦之且曰今方從事科業不待釋褐爲先調用云云至是御史李公潝又別薦故有是命 九月肅謝 先生以特恩不敢不謝出肅旋卽辭歸


6년 경술(선생 47세, 1730): 여름에 밀암공을 잃으시다. 만시와 제문이 있다. 감사 풍원군 조현명 공께 답서하시다. 조공의 편지에 집지(제자가 스승께 폐백을 드리고 배움을 청하는 예의)하여 청학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선생은 사양하시고 그 보내온 종이등의 예물을 돌려보내시었다. 칠월에 족형 이호공 세용께 글을 보내시다. 남분지선생의 연보를 개정할 일에 대해 논하셨다. 훈수 정공을 잃으시다. 애사와 제문이 있다. 팔월에 영릉참봉에 제수되시다. 이보다 앞서 안핵사 오광운 공이 상소로 천거하면서 지금 과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과거에 급제할 때를 기다릴 것 없이 우선 벼슬에 등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사 이흡 공이 특별히 천거하였으므로 이 임명이 있었다. 구월에 숙배하고 사은하시다. 선생은 특별한 은총이므로 감히 사은하러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은하고 돌아서서 곧 사양하시고 돌아오시었다.


七年辛亥 先生四十八歲 同顧齋訥隱諸公講選士于鄕校 時豊原君有興起儒敎之意以先生及二公爲本府訓長選儒生會鄕校講西銘太極圖說及先賢箴銘 答豊原君書 先是豊原君來訪因論大學絜矩章疑義及太極圖說中精粗本末之說先生縷縷辨析及還營復書申前說先生往復至七八幅 答篪叟書 篪叟以豊原君往復書有所難疑先生又推明之 次存齋李先生紅蓮庵詩 見集中


7년 신해(선생 48세, 1731): 고재 눌은 등 여러분과 함께 향교에서 선비들을 가르치고 뽑으시었다. 이때 풍원군이 유교를 흥기할 뜻이 있어서 선생과 두분을 본부 훈장으로 삼아 유생을 뽑아 향교에 모으고 서명과 태극도설 및 선현의 잠명을 가르치게 하였다. 풍원군에게 답서를 보내시다. 이보다 앞서 풍원군이 찾아와 대학 혈구장의 의의처와 태극도설중 정조 본말의 설에 대해 논하였는데 선생은 곡진하게 설명하고 분석해주셨다. 감영에 돌아가 다시 글을 보내어 선생께 전의 말을 거듭 물어서 선생과 글이 왕복하기를 일여덟 폭이나 되었다. 지수공께 답서를 보내시다. 지수공은 풍원군과의 왕복서 속에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선생이 또 더 밝혀 주시었다. 존재 이선생의 홍련암시에 차운하시다. 문집 속에 있다.


八年壬子 先生四十九歲 編知非錄 其序略曰昔蘧伯玉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余今年四十九故取而名之也自今年爲始每日云爲及或思慮所得歌詠所發無鉅細悉錄于簡庶幾異日考檢已往是非懲勉化革以爲修慝徙義追蹤前哲之地云 與兒晉行講絜矩義 諺解及陶山釋義皆以以矩絜之解之玉川趙公德隣因朱子答江德功書所謂絜矩者度物而得其方也而以爲絜矩者謂絜而方之也顧齋李公亦從之先生爲說以辨之 與族子宇漢書 論陳同甫義利雙行王覇幷用之說 見集中 夏校正退溪先生言行通錄于鄕校 蒼雪權公嘗衰集溪門諸公所記言行文字爲通錄豊原君以爲此便是一部論語給工費使刊于安東先生與同志諸人校正 移書通錄刊所 時以通錄校正事論議不一先生以爲此書一入剞劂不但爲一邑一家之私藏而已必將流布一國傳之久遠若於其間或不免有毫髮可議者則豈非未安之甚者乎遂錄其可疑處數十餘條送于刊所又有擬與李而靜書 見集中 哭篪叟鄭公 有輓詩 撰密庵公行狀 校葛庵先生文集 跋錦翁同居雜儀 先生族父錦翁公學培嘗草同居雜儀中經喪禍多放失錦翁公之子伊湖公請先生編次有跋語 九月除靖陵參奉 先是豊原君薦先生其狀曰金聖鐸溫恭謙退務自韜晦而文學之該博識解之精明當爲嶺上之翹楚其年紀雖少而名譽之盛前次已除職而一番收用之後更不撿擧揆以搜剔明揚之道已極慨然自今勿循前套不住撿用不必侈其禮數如經筵官之例以益其引分難進之端或除該司相當職或除守令郵官使道臣守令敦勸以起時時召見或講問經旨或詢訪治道如明宣故事則謙退之士易於承當而庶有旁招之實效矣上命書先生姓名於殿柱仍命該曹斯速授職至是月初九日左相趙公文命引對時請收用書名留中人上曰予以此屢勅銓郞而尙不擧行何也銓長趙相慶對曰曾已付職而不肯出仕故不果注擬矣上怒命推銓長至十一日政有是命 十月肅謝 十一月呈辭歸 豊原君白上曰頃者金聖鐸爲靖陵參奉上來謝恩若引見優待則好矣而今聞金聖鐸以有老母之病呈遞下去云如此之人只授齋郞豈爲激勵之道乎 校適庵公遺集


8년 임자(선생 49세, 1732): ꡔ지비록ꡕ을 엮으시다. 그 서문의 약에 가로되,“옛날에 거백옥이 나이 오십에야 지난 사십구년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했는데 내 금년 사십구세라서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올해부터 시작하여 매일 말하는 것과 혹은 생각하여 도달한 것이나 시로 읊어진 것이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종이에 적어 다른 날 이왕의 시비를 살펴보고 변화와 발전에 힘쓰려 한다. 이로써 나쁜 것을 다잡으며 의로운 데로 따라가서 지난날 성현의 발뒤꿈치를 따르고자 한다.”고 하셨다. 아드님 진행과 더불어 혈구의를 강하시다. 언해나 도산석의는 다 이를 법도로써 묶어 이끈다고 풀었다. 옥천 조덕린 공은 주자의 답강덕공서에 따라 이른바 혈구라는 것은 사물을 따져 그 떳떳함을 얻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혈구라는 것을 묶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재 이공이 또한 이 설을 따르므로 선생은 설명하여 이를 풀이하셨다. 족자 우한에게 글을 주시다. 진동보의 의리 쌍행과 왕패 병용의 설에 대해 논하셨다. 문집 속에 있다. 여름에 퇴계선생 언행통록을 향교에서 교정하시다. 창설 권공이 일찍이 퇴계문하의 여러분이 기록한 언행문자로 통록을 모았다. 풍원군이 이것을 논어의 한 부분처럼 여기어 공비를 주면서 안동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뜻이 같은 여러분과 더불어 교정하셨다. 통록간행소로 글을 보내시다. 이때 통록 교정의 일로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이 책이 일단 한번 새겨지면 다만 한 고을이나 한 집안에서 사사로이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국에 유포되어 유구히 전해질 것인데 그 속에 혹 터럭만큼 의심나는 곳이라도 있게 되면 어찌 심히 미안한 일이 아닐까고 하셨다. 마침내 그 의심스러운 곳 수십여 조목을 기록하여 간행소에 보내시고 또 이이정에게 보내신 것 같은 글도 있다. 문집 속에 있다. 지수 정공을 잃으시다. 만시가 있다. 밀암공행장을 찬하시다. 갈암선생문집을 교정하시다. 금옹선생의 동거잡의에 발문을 쓰시다. 선생의 족부이신 금옹공(휘 학배)은 일찍이 동거잡의를 초하셨으나 초상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금옹공의 아드님 이호공이 선생께 편차를 부탁했는데 발문을 지으셨다. 구월에 정릉참봉에 제수되시다. 이보다 앞서 풍원군이 선생을 추천하였는데 그 글에,“김성탁은 온공하고 겸퇴하며 잘하는 일을 스스로 겸손히 감추고 있으나 문학의 해박함과 지식과 해석의 정밀하고 명석함은 마땅히 영남의 윗자리라 할 것입니다. 그 나이가 비록 많지는 않으나 그 명성은 이미 성한데 이전에 이미 직을 제수했으나 한번 수용한 후에 다시 찾아 쓰지 않았으니 수척하고 명양하는 도리는 이미 극진하지만 생각건대 이제부터 지난 방법만 따르지 말고 찾아 쓰기에만 머물지 말되 그 예의의 횟수를 꼭 드러나게 하실 것도 없습니다. 경연관의 예처럼  그 분수에 따라서 나아오기 어려운 사정을 참작하시고, 혹은 그 관청의 상당한 직을 제수하시거나 혹은 수령이나 우관을 제수하시거나, 도신과 수령으로 하여금 돈독히 권하여 일어나게 하시면 될 것입니다. 때때로 불러 보시고 혹은 경서의 뜻을 강문하시거나 혹은 다스림의 도리에 대해 찾아 물으시기를 명선고사처럼 하시면 겸퇴의 선비들이 벼슬자리에 나아오기 쉬울 것이고 거의 인재를 불러 모으시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명하여 선생의 성명을 써서 궁전의 기둥에 붙여놓게 하시고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속히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달 초구일에 좌상 조문명 공이 임금을 뵈올 때 이름을 써서 남겨둔 사람을 수용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내가 이 일로 여러번 이조의 관리에게 칙명했는데 아직 거행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냐?”고 했다. 이조판서 조상경이 대답하기를,“일찍이 직을 주었으나 나아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노하여 이조판서에게 책임을 물으라 했으며 십일일 정원에서 이 임명이 있었다. 시월에 숙배하고 사은하시다. 십일월에 사직소를 내시고 돌아오시다. 풍원군이 임금께 아뢰기를,“지난번에 김성탁을 정릉참봉으로 삼으시자 사은하러 올라왔는데 만약 불러보시고 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들으니 김성탁이 노모의 병이 있다면서 체임을 청하고 내려간다고 하는데 이만한 사람을 겨우 재궁의 벼슬 정도에  제수하는 것이 어찌 훌륭한 사람을 격려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고 했다. 적암공유집을 교정하시다.


九年癸丑 先生五十歲 四月答顧齋書 論天命之性及合理氣爲心等說 六月除龍驤衛副司勇 本道監賑御史李宗白別薦嶺儒三人而先生居首及還朝上問曰金聖鐸李槾成爾鴻前後褒薦者多果是何如人也宗白對曰三人俱是一道望士其學識行誼爲一道之所共許聖朝搜剔收攬之道宜先檢用不必過施優禮以益其難進之義依漢家勅州郡勸駕之規先付軍職令道臣守令敦勉上送使之出入筵席俯詢嶺外士風民俗時或引接於召對之時則似好矣上曰承宣儒臣之意以爲如何參贊官李宗城曰如金聖鐸等三人是嶺南望士而若遽以遺逸待之則當之者亦必不敢當矣宜令付軍職使道臣勸諭上送好矣上曰以前後道臣狀聞觀之可知其人宜付軍職令道臣上送而以諭欲一見之之意可也十八日備局堂上引見時因左副承旨李宗城所啓下道臣有旨依漢家勅州郡勸駕之例勸諭上送 七月呈辭狀于本府仍答方伯書 方伯金始炯以上敎馳書勸起先生以不敢當之意爲答 校密庵公文集


9년 계축(선생 50세, 1733): 사월에 고재선생께 답서를 보내시다. 천명의 성과 합이기위심 등의 설에 대해 논하셨다. 유월에 용양위부사용에 제수되시다. 경상도 감진어사 이종백이 특별히 영남의 선비 세분을 추천하면서 선생을 맨 위에 들었다. 그가 조정에 돌아가자 임금이 묻기를,“김성탁과 이만과 성이홍은 앞뒤로 칭찬하고 천거한 사람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과연 어떤 이들이냐?”하자 종백이 대답하기를,“세사람이 다 한 도의 명망있는 선비이며 그 학식과 행의가 그 지방이 함께 기대하는 바입니다. 전하의 조정에서 인재를 찾아 뽑아쓰는 도리로 보면 마땅히 앞서 구해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우대하는 예를 베푸실 것은 없고 그 나아오기 어려운 의리를 참작하시고 한나라에서 주와 군으로 하여금 수레를 권했던 규례(한나라 고조가 지방의 덕망있는 선비에게 수레를 보내어 초빙했던 고사)에 따라 먼저 군대의 직을 주시어 도신과 수령들로 하여금 돈독히 권하여 올려보내게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경연에 출입하게 하여 영외의 사풍과 민속을 굽어 살피실 수 있게 하시고 소대하실 때에 때때로 불러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임금이,“승선 신하들의 의사는 어떠한가?”고 묻자 참찬관 이종성이 말하기를,“김성탁과 같은 세사람은 영남의 명망있는 선비이므로 만약 유일(벼슬하지 아니하는 덕망높은 선비)로 보아 이들을 대우하면 당하는 사람은 감히 다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군대의 직책을 주어 도신으로 하여금 권하고 올려보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고 했다. 임금이,“앞뒤 도신의 장계를 듣거나 본 바,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마땅히 군대의 직책을 주어 도신으로 하여금 올려보내게 하고 더욱이 한번 보고싶어한다는 뜻을 전하여 알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 했다. 십팔일에 비국 당상을 인견하는데 좌부승지 이종성의 장계에 따라 도신에게 임금의 뜻을 주어 한나라에서 주군이 권가했던 예에 따라 권하고 알려 올려보내게 했다. 칠월에 사임하는 장계를 본부에 보내고 방백께 답서를 보내시다. 방백(경상도 관찰사) 김시형이 임금의 교서에 의해 글을 보내어 일어나 나오시기를 권했으나 선생은 감히 당하지 못하시겠다는 뜻으로 답하시었다. 밀암공문집을 교정하시다.


十年甲寅 先生五十一歲 五月有旨趣行 八月哭三弟正鐸 十月除司畜別提 下諭道臣勸駕 呈辭不許 十一月初五日詣闕肅謝卽命入侍 上問履歷家世及嶺南風俗因問曰爾於經學必有所見試言學問之要先生辭謝不敢對上笑曰爾言太謙矣嶺南自先正以後必有遺訓傳授者爾其勿辭以達也先生於是起伏而對曰臣聞人君之學雖與韋布不同至於大學一部工夫則初無異同自格物致知至平天下八條目苟欠一節工夫則非聖學矣大學之說先儒發明已盡以聖學之高明豈有所未得領會者乎但其下工夫要切處則似不出誠敬二字上又問政事之要先生對曰臣於事務尤所昧昧然嘗讀古書孟子於時君問政必以發政施仁省刑罰薄賦斂爲對孔子論政以君君臣臣父父子子爲言以此論之則政事之要莫先於立紀綱正名分及愛民矣當今紀綱頹廢名分紊亂而生民之困瘁已極聖上若於此三事留神焉則誠幸矣而臣之愚妄之說豈敢望有槪於聖心乎 初七日承命入侍 進講訖上問知行二字有先後必知之旣盡然後乃始行之耶對曰以序言之則先知後行固當然矣但非生知之聖安能盡天下義理而了得於一日之間哉以常人之資而必知之盡然後行之則是無踐行之期也必須纔有所知則行其所知使知行幷進以至於究竟之地可也 初九日承命入侍 上曰爾以痘患將歸矣惟以爾所欲陳者陳之對曰臣伏聞宋時有人以誠意正心人主所厭聞勸朱子勿復以此告君朱子曰平生所學只此四字臣以爲此雖學者常談而聖學工夫無過此四字四字之說聖上知之盡矣有益加聖意有實踐工夫則是社稷之福臣民之幸也上又問曰小學比大學輕重緩急何如對曰以規模之大節目之廣言之則大學非小學之比然小學是作聖基址苟能於小學上一一體行則聖賢樣子已至十之七八矣大學不過就此點化出精彩恢拓其規模克廣其事業而已以此言之小學尤爲學者之急務上曰果然矣因下敎曰爾旣上來若無痘忌則可以講中庸近思錄等書而草草入侍有所不暇今將歸矣待痘患淨熄有召命則上來好矣聞爾有老親以臘藥四種賜爾此乃所及於經幄之臣者也因手賜承旨承旨奉授先生起拜謝恩 十日辭歸 旣出闕門外豊原君送書曰起自草澤蒙不世之殊恩今當還歸宜以一疏論君德與時務以答上恩先生答書曰微末小臣猥陳章疏不但於私分未安纔蒙許歸恩命復有所云云不無煩瀆之嫌故未奉敎意云 十二月除司僕寺主簿呈辭 時銓判以南臺擬先生豊原君曰如是則此人必不安心不如循例轉遷之爲宜 哭顧齋李公 先生自哭密庵傾慕公甚至至是卒先生甚痛之有祭文


10년 갑인(선생 51세, 1734): 오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팔월에 셋째 동생 정탁을 잃으시다. 시월에 사축별제에 제수되시다. 임금이 도신에게, 나아오시기를 권하라는 말씀을 내렸다. 사양하시는 글을 보내었으나 허락되지 않으시다. 십일월 초오일에 대궐에 들어가 숙배하고 사은하시자 곧 입시하도록 명하다. 임금이 지내온 이력과 집안의 내력과 영남의 풍속을 물은 뒤에 다시 묻기를, “그대는 경학에 대해 반드시 견해가 있을 터이니 학문의 요체에 대해 말해보라.” 하였으나 선생은 사양하고 감히 대답하시지 않았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지나치게 겸손하다. 영남은 지난 날의 성현 이후 반드시 유훈을 전수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겸사하지 말고 다 말하라.”하였다. 선생은 이에 일어났다 엎드려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의 배움은 비록 궁달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대학의 한 부면을 공부하는 데 이르러는 처음부터 같고 다른 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학의 격물 치지로부터 치국 평천하의 팔조목에 이르면 다만 한 구절의 공부만 빠져도 진실로 성스런 배움이 아닙니다. 대학의 설은 이미 앞선 학자들이 밝혀놓은 것이 충분하거니와 전하의 고명하심으로 어찌 그 중요한 부분을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아래의 중요한 곳을 공부하신다면 성과 경 두 글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또 정치의 요체에 대해 묻자 선생이 대답하시기를, “신은 사무에 있어서는 매우 캄캄한 형편입니다. 일찍이 옛 책을 읽었는데 맹자는 그때의 임금이 정치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정치를 펼 때 인정을 베풀고 형벌을 살피며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으로 대답을 삼았습니다. 또 공자는 정치를 논할 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아들은 아들답게로 중요한 말을 삼았습니다. 이로써 말씀드리면 정치하는 일의 요체는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 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습니다. 요즈음 기강이 퇴폐하고 명분이 문란하며 백성의 곤궁함이 이미 지극하오니 성상께서 이 세 가지 일을 마음에 두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고 망녕된 말이 어찌 감히 성심에 감개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 하셨다. 초이레에 명을 받들어 입시하시다. 진강을 마치자 임금이 묻기를,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는 선후가 있는 것인가? 반드시 아는 것이 다 끝난 뒤에 비로소 행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인가?” 하자 선생이 대답하시기를, “차례에 의해 말씀드리면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이 나중인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다만,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아는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능히 천하의 뜻과 이치를 하룻새에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의 자질로 반드시 아는 것이 다 끝난 뒤에 행한다면 아무 실천도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겨우 아는 것이라도 그 아는 만큼 행하여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나아가게 해야 구경의 입장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셨다. 초아흐레에 명을 받들어 입시하시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천연두를 근심하여 장차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라.”하였다. 선생이 대답하시기를, “신이 엎드려 듣사오니 송나라 때의 어떤 사람이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誠意正心)으로써 다른 사람과 임금의 흡족한 바 되었더니 주자에게 권하여 이 일로써 다시 임금에게 고하지 말게 하였는데 주자가 평생에 배운 바가 다만 이 넉 자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것이 비록 학자들의 상식이기는 하지만 성학을 공부하는 데 이 넉 자를 지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넉 자의 내용은 성상께서도 이미 다 아시는 바입니다만, 성상의 뜻에 더욱 실천공부를 더하시면 이것은 사직의 복이며 신민의 다행일 것입니다.”고 하셨다. 임금이 또 묻기를, “소학이 대학에 비하여 경중과 완급이 어떠한가?”고 하자 대답하시기를, “규모의 큼과 절목의 넓음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대학은 소학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소학은 성학의 기틀과 터를 닦는 것이므로 소학에 있는 것을 일일이 행할 수만 있으면 성현의 모습에 십중 칠팔은 이른 것입니다. 대학은 다만 여기에서 나아가 그 정채로움을 드러나게 하고 그 규모를 크게 여는 것이며 그 사업을 확고히 넓히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소학이 도리어 학자의 급무가 될 것입니다.”고 하셨다. 임금이 과연 그러하다고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대가 이미 올라왔으니 만약 천연두의 근심만 없다면 중용이나 근사록 등의 책을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초초히 입시했다가 머물지 못할 사정이 있어 이제 장차 돌아가게 되었구나. 천연두의 근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부르는 명령이 있을 터이니 곧 올라오면 좋겠다. 들으니 그대에게 늙으신 어버이가 있다는데 납약 네 종류를 그대에게 주니 이는 경연의 신하에게 거의 미치는 것이다.”하시며 손으로 직접 승지에게 주니 승지가 받들어 주었다. 선생은 일어나 절하고 은혜에 사례하였다. 십일에 사임하고 돌아오시다. 이미 관문 밖에 나오셨을 때 풍원군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 풀밭 가운데서 일어나 세상에 없을 각별한 은혜를 입고 지금 돌아갈 때에 당했으니 마땅히 한 상소를 올려 임금의 덕과 시무에 대해 논하여 임금의 은혜에 답하시지요.”라 하자 선생은 답하시기를, “보잘 것 없는 소신이 외람되이 상소를 늘어놓는 것은 개인으로서도 넘치고 불안한 일입니다. 겨우 돌아갈 허락을 얻은 때에 다시 부르실 것이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임금을 번거로우시게 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므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셨다. 십이월에 사복시 주부에 제수되시다. 사직소를 올리시다. 이때 이조판서가 남대(덕망이 뛰어나 사헌부에 추천할 사람)로 선생을 지목하자 풍원군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마음에 미안하게 여길 것이므로 전례를 따르는 것만 못할 것이니 벼슬을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고재 이공을 잃으시다. 선생은 밀암선생을 잃으신 때부터 이공을 경모하시기가 매우 지극하셨다. 이때 돌아가시니 선생은 매우 슬퍼하셨다. 제문이 있다.


十一年乙卯 先生五十二歲 正月除丹城縣監呈辭 將肅謝至延豊以痘忌呈遞而還 二月行曾祖考瓢隱公焚黃 前冬先生以別提入侍時豊原君進達曰金聖鐸先祖是榲當丙子難隱居不仕自號崇禎處士嶺南人至今稱道其在聖朝崇獎節義之道不可無褒贈之典上曰崇禎處士之名可嘉特贈司憲府執義 閏四月及第出身 先生早有廢擧之志至是上眷愈隆除命日下先生辭避無路踧踖不安不得已而應擧蓋不欲以遺逸自居也 除司饔院主簿 上以唱榜前城中經過爲難有特命 陞成均館典籍 放榜日特命入侍 上命戴花入侍親製詩一節手書以賜之詩曰昨日嶺南貢擧人今辰頭上桂花新豈徒於爾爲親喜爲我金門文學臣仍命於前席次韻以進先生次進詩云自是遐荒賤末人不堪今日聖恩新許歸寵渥尤殊絶萬殞難酬愧小臣滿朝皆以爲別恩也 陞司憲府持平上疏辭不許 批曰省疏具悉栢府新命意非偶矣爾何過讓頃許榮覲之後縻於本職尙在京洛予欲更見爾勿過辭其卽肅謝入侍講筵則予當遂初許由矣 入參晝講 自朝至午命牌三至大臣諸宰皆責以未安故不得已入肅參晝講榻前承許由之命 入直憲府吏請出禁亂先生曰名爲禁亂反有侵暴之弊勿出也自此吏不敢弄奸市井莫不頌德 五月初至家上疏辭持平不許 疏略曰臣聞天下之事不可以殫論而惟人主一心爲萬事之根本天下之善不可以盡擧而惟誠之一字爲萬善之樞要誠者眞實无妄之謂也在天爲實理在人爲實心天有實理故日月之代明四時之運行風雨霜露之變化莫不實然而無僞惟人則不然苟非生知之聖卽不能無氣質之蔽物欲之累故其於吾心實有之理鮮能眞知而實體其所作爲終不免金鐵之相雜未能止於至善之域者皆不誠之致也臣竊觀漢唐以來所謂英君誼辟莫不欲云云而其於修己治人之道發政制事之方率不能以眞實之心加眞實之功而不免爲流俗功利之說所撓奪故上下數千年間終未見有追蹤三五之盛軌者豈不惜哉臣伏惟我殿下有聰明睿知之姿有寬仁溫恭之德有神武不殺之威而至於近來蕩平之政尤是百王之高節歷代之罕聞則雖使治升大猷光被四表蔑不可矣而夷考符驗乃反有不然者臣竊惑焉蓋典學莫如殿下而正心修身之功猶未臻極儉德莫如殿下而浮費濫用之弊未能盡革延納謨猷莫如殿下而拂士之言或寢於推行之際愛恤民生莫如殿下而惻怛之惠未究於蔀屋之下至於綱紀之欲其振而下凌上替之習日以益甚風俗之欲其正而禮義廉讓之行殆於掃地夫以殿下之明聖居得致之位操可爲之柄而事不後志治未從欲是豈無所有而然乎傳曰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又曰誠之不可揜如是蓋誠於中必形於外意者殿下於此一誠字或有未盡凡所施措云爲或未脫於應文備數之套而不能一出於純心至誠歟一念一事之未誠似若無甚大害而其於阻聖德之進而累聖治之成非少病矣臣猥以無似前後五被引對竊覵聖學高明有非群下所及則凡天下義理之所在聖賢經傳之遺訓帝王爲治之大要皆殿下之所已知不待愚臣一二贅陳而臣之所恐者獨恐殿下不能眞切體得樸實做去苟且牽補之習勝而直截純篤之意少因循歲月卒未克大有所爲使後之視今者亦猶今之視漢唐之君也 六月有旨趣行 七月赴召至丹陽上疏辭 疏陳十條一曰早諭元良以建國本二曰愼擇守令以行仁政三曰甄拔賢才以淸仕路四曰崇獎廉恥以抑奔競五曰振擧綱維以勵風俗六曰節約財用以寬徭賦七曰明愼賞罰以恢公道八曰改紀軍政以紓民怨九曰申明禮法以防僭踰十曰旌別淑慝以樹風聲疏入上嘉納批略曰所陳十條俱爲切實其當勉焉爾其勿辭 八月遞本職付副司直 十一月拜司諫院正言上疏辭遞 十二月復拜正言 連下諭道臣勸駕黽勉赴召到廣州以痘忌辭遞


11년 을묘(선생 52세, 1735): 정월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셨으나 사임의 글을 올리시다. 장차 숙배하고 사은하시려 연풍에 이르셨으나 천연두를 꺼리어 체직을 청하시고 돌아오셨다. 이월에 증조고 표은공의 분황(관직이 추증되었음을 고하고 신위에 관직을 고침)을 행하시다. 지난 겨울에 선생이 별제로 입시하셨을 때 풍원군이 진달하기를, “김성탁의 선조 김시온은 병자년의 치욕을 당하자 숨어 살면서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숭정처사라고 호를 지었습니다. 영남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가 명나라에 대한 감사와 절의의 도리에 있었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포상하고 추증하는 은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임금이 숭정처사라는 호가 충분히 좋으니 특별히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라고 하셨다. 윤사월에 급제하시어 출신(벼슬에 나섬)하시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를 보지 않으실 뜻이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사랑이 점점 두터워지고 벼슬에 제수하는 명령이 거의 날마다 내리니 선생은 사양하고 피하였으나 공손히 삼가고 사양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과거에 응하신 것이니 유일(학덕이 있는데 은거하는 선비)로 자처하시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사옹원 주부에 제수되시다. 방을 붙이기 전에 (아무 벼슬이나 용무가 없이) 성중에서 경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특별히 임금이 이 임명을 하였다. 성균관 전적으로 승차하시다. 방을 붙이던 날 특명으로 입시하시다. 임금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입시하시게 하고 몸소 시 한 수를 지어 손수 써서 주셨다. 시에, “어젯날 영남에서 온 과거보던 선비, 오늘 아침 머리 위에 계수나무 꽃 새롭구나. 어찌 다만 그대의 어버이께만 기쁘랴, 나에게도 금마문 문학하는 귀한 신하.”라고 했으며 그 앞에서 차운하여 올리라고 했다. 선생이 차운하여 올린 시에, “이전부터 저 먼 시골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오늘날 성은이 새로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 어버이를 뵙게하신 은총은 더욱이 특별하신데, 만번 죽어도 갚을 수 없는 부끄러운 신하입니다.”라고 하셨다. 온 조정이 다 특별하신 은총이라고 했다. 사헌부 지평으로 승차하시다. 상소하여 사임하셨으나 허락되지 않으시다. 임금의 답에 가로되, “상소를 살펴보니 사헌부를 새롭게 하려는 의지가 잘 갖추어져 있기가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어버이께 돌아가 영화롭게 하라고 허락한 뒤로 본직에 얽매여 아직 서울에 있는가. 나는 그대를 다시 보고 싶으니 그대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곧 사은 숙배하고 강연에 입시하면 내 마땅히 처음 말미를 허락하던 것을 이루리라.”하였다. 주강에 들어가 참여하시다. 아침부터 낮까지 부르시는 명령이 세번 이르니 여러 재상들이 미안한 일이라고 재촉하므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주강에 참여하시고 어전에서 말미를 허락하시는 명을 받으시었다. 입직했던 사헌부 관리가 금난(공인하지 않은 상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낼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이름이 금난이지 도리어 민간을 침탈하는 횡포의 폐단이 있으니 내지 말라.”하시니 이로부터 관리들이 시정에서 감히 농간하지 못하였다. 덕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월 초에 집에 이르러 상소하여 지평을 사임하셨으나 허락되지 않으시다. 상소의 요약에 이르되, “신이 듣기로 천하의 일이 충분히 논의하지 않을 것이 없거니와 생각건대 백성과 임금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만사의 근본이  됩니다. 천하의 좋은 일을 일일이 다 들 수가 없지만 정성(誠) 한 글자는 모든 일의 중심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진실로 속임이 없는 것을 이름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있으면 실리가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실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실리가 있으므로 해와 달의 바뀌어 밝음과 사시의 운행과 비바람 눈서리의 변화가 실제로 나타나고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진실로 나면서 아는 성인이 아니라면 기질의 폐단과 물욕의 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실제로 있는 이치가 되어 진정하게 알고 실제로 체득하게 되기가 드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행위가 마침내 금철의 뒤섞임을 면치 못하고 지극한 선의 영역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다 정성스럽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이 그윽히 보오니 한나라 당나라 이래 이른바 영명한 임금은 그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등의 말을 물리치고 다스렸으며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와 정령을 발하고 사태를 제압하는 방법에 있어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공력을 보태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세상 풍속이 이익을 다투는 말들 속에 뒤섞이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하 수천년간 마침내 옛 성군들 때의 성황을 볼 수 없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총명 예지의 자품이 있으시고 관인 온공의 덕망이 있으시며 신무 불살의 위엄이 있으신데 요사이 탕평의 치에 이르러 더욱이 백왕의 고절이시니 역대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이것은 비록 크고 높은 계획으로 광피사표(성덕이 사방에 미침)하도록 다스리게 한다고 하여도 못할 것입니다만 지금 전하의 관리들을 살피건대 도리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신이 그윽히 의혹되는 것은 대개 그들이 경전 공부함이 전하와 같지 못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이 지극하지 못함이며, 검소한 생활의 덕이 전하와 같지 못하여 부비를 남용하는 폐단이 없어지지도 않고 납세를 미루는 일이 개혁되지도 못한 것이며, 일을 도모하는 지혜가 전하와 같지 못하여 선비의 말을 물리치는 것이 혹 사람을 찾아 쓰는 데에 이르기도 하며, 민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김이 전하와 같지 못하여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가 저 오막살이 속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강을 떨치려 하는 데 이르러는 아랫사람이 능멸하고 윗사람이 억누르는 풍습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며, 풍속을 바르게 하려는 데 있어서는 예의와 염양의 도리가 거의 땅에 쓸리게 되었습니다. 무릇 전하의 밝고 성스러우심으로 지존의 위에 계시면서 만사의 중심자루를 잡으시었는데, 일은 전하의 뜻을 따라오지 않고 다스림은 전하의 소망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연유가 없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이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성을 이처럼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은 대개 성이 속에 내재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뜻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이 성(誠) 한 글자에 있어서 혹은 무릇 모든 조치를 베푸심에 있어 미진하실 수도 있고, 혹은 글자에만 얽매이거나 숫자에 구애되시는 옛 투를 버리지 못하시어 순전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일관하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마음쓰기와 한 번 일하시기에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 대체로 무슨 큰 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성덕의 진보하심과 성스러운 치세를 이룩하심에 장애가 되는 정도는 결코 작은 병이 아닙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전후 다섯 번 불러 보시는 은혜를 입고 그윽히 살피건대 전하의 학문이 고명하심은 여러 아랫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으므로, 무릇 천하 의리의 소재와 성현 경전의 유훈과 지난 제왕들 다스림의 요체들은 다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 것이라 어리석은 신의 한두 번잡한 아룀을 기다리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전하께서 진절하게 체득하여 실제를 찾고 실천해 나가시지 못하시고 구차히 이끌고 보좌하는 습성을 가지시고 순독하신 뜻을 그때그때 대충대충 분변하시면서 하는 일 없이 잠시만 세월을 보내시면 마침내 크게 뒷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는 바 될 것이며 요사이 사람은 오늘날에도 오히려 한나라 당나라의 임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칠월에 부름에 따라 가시다가 단양에 이르러 상소를 올려 사임하시다. 상소는 열 가지 조목을 진술하였는데, 첫째는 원자를 일찍 가르쳐 나라의 근본을 세울 것, 둘째는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여 어진 정치를 행할 것, 셋째는 재능에 따라 어진 인재를 뽑아 벼슬길을 맑게 할 것, 넷째는 염치를 아는 도리를 장려하여 벼슬을 따라 협잡하는 일을 억제할 것, 다섯째는 기강과 도리를 떨치게 하여 풍속을 면려할 것, 여섯째는 재무의 용도를 절약하여 세금과 부역을 관대히 할 것, 일곱째는 상과 벌을 밝고 신중하게 하여 공변된 도리를 회복할 것, 여덟째는 군정을 개혁하여 백성의 원한을 풀어줄 것, 아홉째는 예법을 펼쳐 밝히어 참람되이 벗어나는 것을 막을 것, 열째는 정숙함과 간특함을 바르게 구별하여 풍속과 교화를 세울 것 등이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즐겨 납득하시고 내린 대답을 요약하면, “말한 바 열 가지 조목은 다 절실한 것들이니 마땅히 힘쓸 수밖에 없다. 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팔월에 본직을 갈고 부사직에 임명되시다. 십일월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시자 상소하여 사직하시어 갈리시다. 십이월에 다시 정언에 임명되시다. 도신에게 수레를 권하여 억지로 권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잇달아 내려왔다. 부름에 응하여 가시다가 광주에 이르러 천연두를 꺼리어 사임하시자 체직되셨다.


十二年丙辰 先生五十三歲 正月復拜正言上疏辭不許 疏末論朝廷黨論之沈痼鄕曲士習之不正生民飢困之狀賦稅濫重之弊及慶尙監司閔應洙農時築城之事 二月遞本職 擬應旨求言疏未上 勉君德陳時弊累萬言 夏付副司果有旨趣行 七月有旨趣行 八月以親病呈于監司 九月有旨趣行 十月以親病及儒疏後情地難安呈于監司 十一月有旨趣行 十二月與諸生講啓蒙


12년 병진(선생 53세, 1736): 정월에 다시 정언에 임명되시자 상소하여 사임하셨으나 허락되지 아니하시다. 상소의 끝에서, 조정에 당파싸움이 깊은 병처럼 된 것과, 시골에 선비들의 풍습이 바르지 못한 것과, 백성들의 배고프고 곤궁한 모양과, 부역과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운 폐단 및 경상감사 민응수가 농사철에 성을 쌓은 일 등을 논의하셨다. 이월에 이 직에서 갈리시다. 임금의 뜻에 응하여 언로를 구하는 상소를 준비하셨으나 올리지 않으시다. 임금의 덕을 면려하고 당시의 폐단을 말씀하신 수만언이다. 여름에 부사과에 임명하면서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칠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팔월에, 어버이의 병으로 감사에게 글을 보내시다. 구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시월에 어버이의 병과 선비들의 상소 이후 입장이 편치 않으시다는 글을 감사에게 보내시다. 십일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십이월에 여러 학생과 더불어 계몽을 강하시다.


十三年丁巳 先生五十四歲 正月有旨趣行 三月拜工曹佐郞兼知製敎 四月詣闕謝恩 以兼春秋入侍召對 入侍時上顧筵臣曰此兼春秋有叩問應對如流小無窒礙處雖幽經僻書亦然眞可謂經學之士矣 以親病呈辭歸 五月陞弘文館副修撰赴召至本府上疏辭 疏末曰臣於前年因辭司諫院正言疏附陳區區愚見而略論近來黨論之沈痼士習之不正大爲一邊人所憎惡湖儒李海老等斥臣以陰秘兇巧嶺儒申金憲 等目臣以詖言誣說其所構毁侵攻殆無餘地醜詆之辱又及於臣師臣李玄逸至與昏朝賊臣仁弘比倂爲說噫臣之受誣不必辨白而至於玄逸則戴盆之寃已至四十餘年之久矣今又緣臣一疏遭此無限詬辱在臣生三事一之義亦豈忍泯黙而已耶玄逸之至今名在罪籍者以己巳秋應旨疏中一句語而若以其全疏本意觀之則實欲爲聖母致尊安之道爲先大王盡處變之意也己卯之賜環辛巳之全釋辛卯庚子之復官或行或寢而旣蒙天鑑之下燭又有相臣之平反則其本情之無他於此亦可見矣況玄逸當己巳初遠在鄕邑其以司業被召在於四月行到廣州爲坤宮陳疏而見阻喉院不得呈徹則其謂之主張兇論者不亦寃乎臣知殿下於己巳事付之先天而竊自痛以臣故而辱及師門不避猥越冒犯忌諱伏乞聖明憐其情而察其實焉時上眷非常佇待甚重一邊媢嫉之徒晝夜傍伺謨所以傾陷前年辭正言疏已見忤時輩而繼以嶺儒有斥享疏於是李海老申金憲 等爲對擧疏謂嶺疏皆是先生指囑侵辱詆斥無所不至以及於師門先生以爲人之爲言旣如此不可不引嫌遂因辭疏略附數語因縣道上送 陞校理 前疏未及登徹有此除 二十五日拿命至 二十二日疏入承旨柳儼入啓曰卽者校理金聖鐸辭職上疏自縣道上來而臣觀其措語則因向來儒疏伸辨其師李玄逸玄逸罪犯關係至重其名尙在罪籍則何敢肆然陳疏曲爲營護乎至於己巳事付之先天之語極爲兇悖無倫渠亦今日臣子安敢以此等語陳之於殿下之前乎如此之疏不可以時任玉堂之疏循例捧入而亦不可不一經睿覽以俟處分故不得已捧入之意敢啓上下備忘記卽命設鞫 二十八日入鞫廳 鞫庭以己巳事付之先天爲問目蓋故修撰李萬維疏批中有付之先天之敎儒紳間互相傳誦以爲己巳事付之先天七字是聖批中語先生亦嘗聞之故疏中有此語自上取考政院日記則有丙申事付之先天七字而無己巳字卽以傳聞之誤供對其後不復擧論於問事中 自此至七月初七日六次設鞫中間屢有酌處之命而爲尹陽來徐命珩等沮搪還收 有一時輩曰吾以問事郞見金某裄楊之下眉睫不動可謂天下極難之人也若使此人當難則足以伏節死義云 七月十五日豊原君趙顯命上疏伸救 疏末云金聖鐸以妄言將抵於死是其自取故不足惜然其實則李玄逸乃根本也聖鐸乃枝葉也根本之玄逸死於牖下枝葉之聖鐸斃於裄楊則其於本末輕重之倫果何如也況朝廷初不以逆律勘玄逸而以護逆責聖鐸不幾於罔民者乎先朝與當宁事體雖曰不同聖鐸與玄逸輕重不亦有間乎必欲以護逆誅聖鐸則追行孥籍於玄逸而後可也不然則金石之典自有次序護逆之律不可以輕施於聖鐸也明矣至於先天之說亦豈有別般隱情可以限死鞫問者而朝廷之名論太勝王獄之議언失平惜乎殿下之廷曾無一介張釋之耶云云於是委官金在魯趙尙絅金聖應等相繼引嫌上下嚴旨還給疏削職 八月豊原君復職復上疏曰臣前疏所論不過法律輕重非敢干於名義耳名義雖嚴豈可捨法律而求之哉只緣臣文辭拙直不能爲婉遜委曲之語致令見者駭愕聲討森嚴徜非天地父母旻覆而曲庇之則性命幾乎不全滄浪之取尙誰咎哉然臣於此竊有所未曉者昔在辛巳夏故相臣李畬以判義禁請放李玄逸甲辰冬嶺人羅學川上應旨疏顯訟李玄逸載在記注書者可按覆也前後一玄逸也而學川訟之則獎用之聖鐸言之則誅戮之請放玄逸如故相臣則見推爲領袖略論聖鐸如顯命者則不免爲護逆臣未知名義有時而輕重法律隨人而低昻也云云 九月停啓 司諫吳彦冑停啓 判義禁徐命均箚論過重之意 閏九月初七日有酌處之命安置濟州旌義縣 初八日出獄 初九日發謫行 有謫路記行詩 二十三日到江津 留六日候風 聞從姪敏行訃 敏行主宗祀與先生平日相仗甚重患難以後憂傷添疾至七月喪出而子弟不忍痛獄中至是始以實告 二十九日發船 子樂行從仲弟警鐸季子霽行自船頭將歸拜辭之際涕泣不自勝先生以愼旃行李慰諭之怡然登船無幾微見於色 十月初三日泊濟州 有詩一絶 初四日到旌義 島中無士人家藏書冊者惟心經一部及韓碑文一冊隨行父子相對終日講討不知謫居牢騷之苦惟以太夫人年迫九耋歸侍無期爲痛心有詩發於吟詠有我有歌反哺烏述懷諸篇


13년 정사(선생 54세, 1737): 정월에, 나아오라는 임금의 말씀이 있으시다. 삼월에 공조좌랑 겸 지제교에 임명되시다. 사월에 대궐에 들어가시어 사은하시다. 춘추관의 일을 겸하셨으므로 입시하실 때 임금이 불러 대면하시다. 입시하신 때 임금이 경연의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 사람은 춘추관의 일을 겸하였는데 불러 묻는 게 있으면 응대하는 것이 물 흐르는 것과 같아 조금도 막히는 데가 없고 경전의 귀퉁이나 희귀한 책이라도 또한 그러하니 이른바 경학의 선비라 할 만하다.”라고 했다. 어버이의 병으로 사임상소를 올리시고 돌아오시다. 오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차하시고 부름에 응하여 본부에 이르시어 상소를 올려 사임하시다. 상소의 끝에, “신은 지난 해에 사간원 정언을 사임하는 상소에 붙여 구구하고 어리석은 의견을 늘어놓은 바 있습니다. 요약건대 근래 당론이 병처럼 깊어가는 것과 선비들의 풍습이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어떤 지방 사람들에게는 크게 미워하는 바 되었습니다. 호남의 선비 이해로 등은 음흉하고 은밀하며 흉악 공교한 말로써 신을 배척하였으며, 영남의 선비 신헌 등은 신을 근거없는 말과 헐뜯는 설로 지목하니 그들의 거짓으로 얽고 못살게 침노하는 것이 거의 여지가 없이 되었습니다. 또한 추악하게 비방하는 욕설이 신의 스승 신 이현일에게 미치고 심지어 저 어지러운 조정 광해조의 역적 인홍의 경우와 비견하여 함께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아, 신이 모함을 받는 것은 변명하고 밝힐 것도 없습니다만 현일에 이르러는 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원통함이 이미 사십여년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또 신의 한 상소로 인해 이처럼 무한 후욕을 당하니 신으로서 세 분을 하나같이 섬기는 의리에 어찌 차마 못들은 것처럼 묵묵할 수 있겠습니까. 현일이 이제까지 그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있게 된 것은, 기사년 가을에 한 응지소 중 한 귀절 때문인데 만약 그 상소의 전문에서 본뜻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실로 국모를 존안에 이르게 하고 선대왕께는 처변의 의리를 다하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묘년의 사환과 신사년의 완전 석방과 신묘년 경자년의 복관이, 혹은 행해지고 혹은 하늘이 밝히 내려다보심을 입었사오며 또 재상인 신하의 평반도 있었으니 그 본래의 마음이 이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현일은 기사년 초에 멀리 향읍에 있으면서 맡은 일로 인하여 사월에 부르심을 입고 오다가 광주에 이르러 중전을 위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방해를 받아 임금께까지 올리지 못하였던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 흉론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알기에 전하께서는 기사년의 일을 완전히 지나간 일로 처분(己巳事付之先天)하셨다는데 그윽히 스스로 통탄하기는 신으로 인해 욕이 사문에 미치고 외람되고 참월함을 피할 수 없으며 두려워 기휘하는 바를 감히 범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의 밝으심으로 그 뜻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실제를 살펴 주십시오.”라고 하셨다. 이때 임금의 사랑이 예사롭지 않고 가까이 대우하시기를 매우 중히 하시니 한 구석의 투기하는 무리들이 밤낮으로 옆에서 기울거나 빠질 곳이 없는가고 꾀하였다. 지난해 정언을 사임하는 상소가 이미 당시 무리들의 미워함을 당했는데 계속해서 영남 선비들의 배척하는 상소로 이어졌다. 이에 이해로 신헌 등이 서로 대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영남 상소라는 것은 선생을 지칭하여 침욕하고 배척하기에 못할 것이 없었으며 이로써 욕이 사문에 미쳤다. 선생은 이미 사람들에게 말이 되기를 이와 같다면 불가불 책임을 지고 사퇴하시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사임하는 상소의 끝에 몇마디 말을 붙여서 공도를 따라 올려보내셨다. 교리로 승차하시다. 앞의 상소가 아직 임금까지 올라가지 않았으므로 이 제수가 있었다. 이십 오일에 체포의 명령이 이르다. 상소가 들어가자 승지 유엄이 들어가 아뢰기를, “지난날 교리 김성탁의 사직 상소가 공도를 따라 올라왔는데 신이 그 말을 쓴 것을 보니, 지난번 선비들의 상소에 대해 그 스승 이현일을 힘써 변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일이 죄를 범한 관계는 매우 중하여서 그 이름이 아직도 죄인의 명부에 있는데 어찌 감히 이런 상소를 늘어놓아 옹호하기를 꾀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기사년의 일은 선천에 붙이셨다는 말은 극히 흉악하고 패역하며 윤리가 없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따위 말을 전하의 앞에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소는 현임 옥당의 상소라 할 수 없으니 전례에 따라 받들어 들이며 또한 한번 왕세자께서 열람하시고 이에 따라 처분이 계셔야겠기에 부득이 받들어 들인다는 뜻으로 감히 아뢰옵니다.” 고 했다. 임금이 비망기를 내리고 곧 명하여 국청을 설치하였다. 이십팔일에 국청에 들어가시다. 국청에서는 ‘기사사부지선천’의 말로 문초의 제목을 삼았다. 고 수찬 이만유의 상소에 대한 비답 중에 ‘부지선천’이라는 하교가 있어서 선비들 사이에서는 서로 전하고 외었다. ‘기사사부지선천’ 일곱 자는 임금의 비답 중에 있는 말로 선생도 또한 일찍이 이를 들었으므로 상소 중에 이 말이 있었다. 임금으로부터 정원일기를 가져다 보라는 말이 있어 보니 ‘병신사부지선천’이라는 일곱 자는 있고 ‘기사’자가 없으니 전문의 착오였다. 서로 맞추어 본 그 뒤로는 문초하는 일 중에 다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칠월 초칠일까지 여섯 번 국청을 설치했는데 중간에 여러번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윤양래, 서명형 등이 억지로 막아서 도로 거두어졌다. 그때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문사랑이면서 김모가 형벌 아래서 눈썹도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가히 천하에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이라. 만약 이런 사람으로 국난을 당하게 한다면 충분히 절개를 다하고 의에 죽을 사람이다.”라고 했다. 칠월 십오일 풍원군 조현명이 소를 올려 애써 구하다. 상소의 끝에, “김성탁이 망녕된 말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것은 그가 스스로 초래한 일인만큼 족히 아까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인즉 이현일이 근본이며 김성탁은 그 지엽입니다. 그런데 근본인 현일은 자기 집 방안에서 죽고 지엽인 성탁은 형벌 아래서 죽는다면 그 본말과 경중의 윤리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조정에서 처음에 역적의 율로 현일을 처벌하지 않았으면서 성탁은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로 다스리려 하니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선조(지난 임금)와 당저(지금 임금)의 일과 형편은 비록 다르다고 하겠지만 성탁과 현일의 경중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역적을 옹호했다 하여 반드시 성탁을 죽이려면, 현일에게 역적인 노예의 명부에 올리는 일을 행한 뒤에 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연하고 불변하는 법전에 차례가 다 있는 만큼, 역적을 옹호했다는 법률을 가볍게 성탁에게 시행하지는 못할 것임이 명백합니다. ‘선천’의 말에 이르러서는, 어찌 별반 숨긴 마음이 있겠습니까. 죽이기로 한하고 국문하는 것으로 보아 조정의 명분과 논의가 죄와 벌에 대한 금부의 의논을 크게 압도하고 있어 형평을 잃고 있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전하의 조정에서는 일찍이 한 사람도 저 한나라 때의 명관 장석지같은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등의 말을 했다. 이에 책임맡은 관리 김재로와 조상경, 김성응 등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임금이 엄한 명령을 내려 풍원군의 상소를 돌려주라 하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팔월에 풍원군이 복직하자 다시 상소하기를, “신의 지난번 상소에서 논의한 것은 법률의 경중에 관한 것일 뿐 감히 명분과 의리에 간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분과 의리가 비록 엄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법률을 버리고 구할 것이겠습니까. 다만 신의 글투가 졸속하고 곧으며 완곡 공손하게 구부려 말하지를 못하여 보는 사람이 놀라고 삼엄하게 성토하게 되었으니 이미 천지 부모의 하늘같이 덮어 감싸시는 것이 아닐 바에야 목숨인들 어찌 부지하겠습니까. 제 말을 책임지는 것이 온전하지 않다고 한들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이제 혼자 아무래도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신사년에 고 재상 신 이여가 판의금으로서 이현일을 석방할 것을 청할 때 영남사람 나학천이 응지소를 올려서 이현일을 드러내고자 다투었다는 기록은 기주서에 실려 있으니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후에 같은 현일인데 학천이 변송하면 장려하여 등용해주고 성탁이 말하면 죽이려 하며, 현일의 석방을 청하기는 고 재상과 같으니 영수로 추대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탁을 현명과 같이 논의한다면 역적을 옹호하는 법을 면할 수 없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 명분과 의리에 때가 있고 법률의 경중도 사람에 따라 높고 낮음이 있는 것입니까.” 등의 말을 하였다. 구월에 정계(전계 가운데 죄인의 이름을 지움)하다. 사간 오언주가 정계하였다. 판의금 서명균이 차자를 올려 지나치게 무겁다는 뜻으로 논의하다. 윤구월 초칠일 참작하여 처분하라는 명령이 있어 제주 정의현에 안치되시다. 초팔일에 출옥하시다. 초구일에 귀양길을 나서시다. 적로기행시가 있다. 이십삼일에 강진에 다다르시다. 바람을 기다려 엿새를 머무르셨다. 종질 민행의 부음을 들으시다. 민행은 종가의 제사를 주관하면서 선생과 평소에 서로 의지하기를 매우 소중히 했다. 환난이후 근심이 병에 보태어져 칠월에 이르러 초상이 났으나 자제가 차마 옥중에 아뢰지를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실대로 아뢰었다. 이십구일 발선하시다. 아들 낙행은 따라가고 가운데아우 경탁과 작은아들 제행은 뱃머리로부터 장차 돌아가게 되어 절하고 헤어질 때에 눈물과 울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선생은 길차림을 다독이며 그치라고 달래시고 위로하여 기꺼이 헤어지셨다. 배에 오르셔서도 안색에 아무 기색도 나타내지 않으셨다. 시월 초삼일에 제주에 정박하시다. 절구 한 수가 있다. 초사일에 정의에 도착하시다. 섬 가운데는 양반의 집이 없어 책을 가진 사람이 겨우 심경 한 부와 한비문 한 책 뿐이었다. 수행하신 부자분이 서로 대하시어 종일을 강토하시며 귀양살이의 갇힌 괴로움을 잊으셨다. 다만 태부인의 연세가 구십에 가까우신데 돌아가 모실 기약이 없음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이 마음이 때때로 읊은 시로 드러났는데 「아유가」와 「탐라오」와 「술회」 등 여러 편이었다.


十四年戊午 先生五十五歲 六月上因旱災疏決命量移光陽縣 是月晦日撤圍有感恩賦懷四絶 七月初二日發行至濟州北禾里 留十日候風有次望洋臺詩 十二日發船 十四日出陸 晦日到光陽之蟾津 初葛庵先生自鍾城移配于此地其時所住宅舍尙在卽所謂葛隱里先生時時往來盤桓不勝追感有感懷詩諸篇 時丹晉宜咸士子請學者曰至先生以名在罪籍謝遣之間有誠心願學者隨其才品授四書及朱子書家禮等書數年之間頗有進益南俗多諼詐先生無論貴賤以誠信相接人以小陶山稱之 先生寄子樂行書曰近日神氣稍平欲看近思錄歲前了此工夫則爲行來此之後看朱子學的幾於成誦而往往因客來未免間斷且易於遺忘念前頭歲月雖得稀年不過十五春秋聰明精力日覺減損而所當看之書所當爲之事尙不及一二日暮途遠雖歎無及年在少壯政宜加勉云云 哭畸軒朴公 有哀辭 讀心經 有感吟 答族子翼溟啓蒙問目 十一月族子宇漢來謁 留月餘屢呈詩先生有次韻及歸有贈行詩


14년 무오(선생 55세, 1738): 유월에 임금이 가뭄 재앙에 따라 형량을 줄여 다시 결정하도록 명하여 광양현으로 이배되시다. 이달 그믐날에, 둘러쌌던 가시울타리를 걷어내니 은혜에 감동하여 심회를 읊으신 절구 네 수가 있다. 칠월 초이일에 떠나 제주 북화리에 이르시다. 바람을 기다려 열흘을 머무르셨는데 망양대시에 차운하신 시가 있다. 십이일 배를 띄우다. 십사일 배가 육지를 떠나다. 그믐날 광양의 섬진에 이르시다. 처음에 갈암선생이 종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이배되시어 그때에 살던 집들이 아직도 있으므로 이른바 갈은리라 하였다. 선생은 때때로 오가시며 서성거리시며 추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시어 감회시 여러 편을 지으셨다. 이때 단성 진주 의령 함안의 선비 자제들이 배우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선생께서 오시니 비록 죄인의 이름으로 오셨으나 사견지간(임금이 보내신 기간 - 귀양오신 동안)에 성심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하였다. 그 재품에 따라 사서와 주자서 가례 등의 책을 주시니 수년간에 매우 진보가 있었다. 남쪽 풍속에는 신분을 바르게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께서 귀천을 따지지 않으시고 성실과 신의로 서로 대접하셨다. 사람들이 선생을 소도산이라고 일컬었다. 선생께서 아들 낙행에게 글을 보내시어 가로되, “요사이 신기가 조금 편하니 근사록을 보고 싶은데 세전에 이 공부를 끝내면 다행이겠다. 이곳에 온 뒤로 주자를 읽어 거의 욀 수 있게 되었는데 종종 손님이 와서 가끔 끊어지기를 면치 못하고 이것도 잊어버리게 되는구나. 앞날의 세월을 생각하면 비록 칠십을 산다 한들 겨우 십오년이 남았구나. 총명과 정력은 나날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지는데 보아야 할 책이나 해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구나. 해 저물고 갈 길은 멀어서 한탄한들 무엇하겠느냐. 나이 젊고 기운 장할 때에 마땅히 더욱 힘쓸 일이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기헌 박공을 잃으시다. 애사가 있다. 심경을 읽으시다. 느낌을 읊으신 시가 있다. 집안 조카 익명의 계몽문목에 답하시다. 십일월에 집안 조카 우한이 와서 뵙다. 월여를 머무르면서 여러번 선생께 시를 올렸다. 차운한 시와 돌아갈 때에 주어보내신 시가 있다.


十五年己未 先生五十六歲 和李訥隱泉聲岳色引山中恨解諸篇 五月族子江漢來謁請學 留五十餘日講庸學西銘感興詩諸篇先生嘉其堅苦刻厲臨歸作序以贈之 撰從祖考芝村公墓碣銘 秋雨溪臥溪二公委訪 留十數日唱酬之樂無異在家時 李冷泉 猷遠 來訪 與伊湖兄書 論卒哭後行祔事儀節


15년 기미(선생 56세, 1739): 이눌은의 천성악색인 산중한해 여러 편에 화답하시다. 오월에 집안 조카 강한이 와서 뵙고 배움을 청하다. 오십여일을 머무르면서 용학 서명을 강하고 감흥시 여러 편이 있다. 선생은 그가 굳은 태도로 열심히 애쓰는 것을 가상히 여기시어 돌아갈 때에 서문을 지어 주셨다. 종조고 지촌공의 묘갈명을 찬하시다. 가을에 우계공과 와계공 두분이 찾아오시다. 십수일을 머무르면서 시를 지어 주고 받으시는 즐거움이 집에 계실 때와 다름이 없으시었다. 냉천 이유원 공이 찾아오시다. 이호형께 드리는 편지를 쓰시다. 졸곡 이후에 부사를 행하는 의절을 논하셨다.


十六年庚申 先生五十七歲 秋權琅軒 모 內弟金時天 起浩 來訪 冬柳陽坡 觀鉉 來訪 蟾江近地有方丈岳陽君山之勝先生勸柳公遊賞公曰今行專爲窮道故人而來無意選勝也先生曰用賓可往而不往余欲往而不得遂相與賦詩以致慨恨之意 十二月丁母夫人金氏憂 用遺衣設位朝夕攀號


16년 경신(선생 57세, 1740): 가을에 낭헌 권모 공, 내종제 시천 김기호 공이 찾아오시다. 겨울에 양파 유관현 공이 찾아오시다. 섬진강 근처에 지리산이 있는데 여러 산의 경치가 좋았다. 선생이 유공께 유람하며 완상하기를 권하니 공이, “이번 행보가 온전히 궁벽한 처지가 된 옛 벗을 위하여 온 것으로 경치를 즐길 뜻이 없노라.”고 하셨다. 선생은, “손님은 가볼 수 있는데 안 가고, 나는 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하는구려.” 하시고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으시며 개탄과 한탄의 뜻을 나타내셨다. 십이월에 모부인 김씨의 상을 당하시다. 남기신 옷으로 신위를 설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붙잡고 호곡하셨다.


十七年辛酉 先生五十八歲 二月奔哭至家 子霽行呈書相府乞歸葬左相宋寅明上達蒙許 四月葬金夫人于靑杞 移先處士公墓合窆于舊壙之上 虞祔畢卽還配所 冬以痘忌寓龍仙庵 十二月遇祥日設遺衣行事 練變以成服日行之 移寓黃龍寺北庵


17년 신유(선생 58세, 1741): 이월에 분곡(부음을 듣고 울면서 달려 옴)하여 집에 이르시다. 아들 제행이 상부에 글을 올려 돌아와 장사지낼 수 있기를 빌었더니 좌의정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을 입었다. 사월에 어머님 김부인을 청기에 장사하시다. 아버님 처사공의 산소를 옮기어 구 산소의 위에 합폄으로 모셨다. 우사와 부사를 마치시자 곧 귀양지로 돌아가시다. 겨울에 천연두의 근심이 있어 용선암에 계시다. 십이월에 소상을 맞아 남기신 옷으로 행사하시다. 소상에 옷을 마전하는 일은 성복일에 행하셨다. 황룡사 북암으로 옮겨 계시다.


十八年壬戌 先生五十九歲 正月移寓龍仙庵 二月移寓黃龍寺 四月還蟾津 十二月遇祥日設衣行事如練祥儀 變除日有告文 聞族兄伊湖公訃 後有輓詞祭文


18년 임술(선생 59세, 1742): 정월에 용선암에 옮겨 계시다. 이월에 황룡사에 옮겨 계시다. 사월에 섬진으로 돌아오시다. 십이월에 대상을 맞아 옷으로 설위하고 행사하시기를 소상 때와 같이 하시다. 상복을 변제하는 날에 고하신 글이 있다. 족형 이호공의 부음을 들으시다. 뒤에 만사와 제문이 있다.


十九年癸亥 先生六十歲 二月服闋 三月族子宇漢再來謁 五月答權江左書 江左公嘗與李大山象靖書謂學者用功當以經書爲先而次及於朱書大山不以爲然往復至累牘不已至是江左公以書質之先生折衷兩家而答之 著啓蒙質疑辨 子樂行上質疑書先生作辨以解之


19년 계해(선생 60세, 1743): 이월에 삼년 상기를 마치시다. 삼월에 집안 조카 우한이 다시 와서 뵙다. 오월에 권강좌 공께 답서를 보내시다. 강좌공이 일찍이 대산 이상정 공에게 글을 보내어,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경서로 공부하는 우선을 삼고 다음으로 주서에 미칠 것이라 했으나 대산공은 그렇다고 하지 않아서 오간 편지가 여러번이었다. 이때에 강좌공이 편지로 이를 물으니 선생은 양가의 생각을 절충하여 답하셨다. ꡔ계몽질의변ꡕ을 지으시다. 아들 낙행이 질의서를 올리자 선생은 변서를 지어 이를 설명하셨다.


二十年甲子 先生六十一歲 證訂中庸疑義 江左公晩讀中庸有記疑一冊子樂行嘗箚錄其可疑處質于先生先生逐條證解


20년 갑자(선생 61세, 1744): ꡔ중용의의ꡕ를 고증하고 고치시다. 강좌공이 늦게 중용을 읽고 의문나는 곳을 적은 책자가 한 권이었다. 아들 낙행이 일찍이 그 의문나는 곳을 기록하여 선생께 질문하자 선생은 조목조목 고증하고 풀이하셨다.


二十一年乙丑 先生六十二歲 十月移配海南縣薪智島 子樂行痛念二親千里相隔奉朴夫人往從蓋據柳眉巖北遷時夫人隨往有三從義重一身輕之句也因此院啓又發有移配之命 二十八日發光陽宿順天 有再宿順天府感賦詩一絶 十一月初六日到薪智島寓東古之村 樂行奉母夫人北遷霽行在鄕未及還侍惟學子五六人從之 島逼近大海春夏交東南風起海濤聲如崩山轉石氣象可怖而先生不以爲意安之若命 先生寄子樂行書曰異域孤寄之中有此蒼黃分離之境此皆汝父窮命使然可悲可歎然萬事莫不由天雖慽慽只自傷損而已幸各自排遣無至傷生吾死生禍福已付之於無可奈何卽今心境坦然無忉怛之意自量氣力反勝於前勿慮也


21년 을축(선생 62세, 1745): 시월에 해남현 신지도에 이배되시다. 아들 낙행이 두 어버이께서 천리를 서로 떨어져 계신 것을 통한으로 여겨 모친 박부인을 모셔 오니 대개 유미암이 북천했을 때의 일을 따른 것이었다. 부인이 따라 가실 때에 삼종의 의리는 중하고 일신은 가볍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지방의 역원에서 장계가 있어 또 이배의 명이 있게 되었다. 이십팔일 광양을 떠나 순천에 숙박하시다. 순천부에 다시 묵는 감회를 읊으신 절구 한 수가 있다. 십일월 초육일 신지도에 이르러 동고지촌에 계시다. 낙행은 모부인을 모시고 북으로 가고 제행은 고향에 있어 돌아와 모시지 못했으므로 다만 배우는 아이 오륙인이 따랐다. 섬은 바다에 아주 가까이 있어, 봄 여름으로 동남풍이 엇갈려 일어나고 바다의 파도는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돌을 뒤집을 듯한 기상에 겁이 날 정도였으나, 선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셨으며 뜻을 편안하게 하시기가 천명인 것 같았다. 선생이 아들 낙행에게 주신 글에 가로되, “이역에 외로이 몸을 붙이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창황하고 헤어지는 지경이 되었으니 이것은 다 네 아버지의 궁벽한 운명이 시킨 일이라 슬프고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만사가 하늘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으니 비록 슬퍼하고 근심한다 하여도 다만 스스로 다치고 손상될 뿐이거늘 다행히 각자 밀고 보내어 생명이 다치기에는 이르지 않았구나. 내 생사와 화복은 이미 무가내하(어쩔 수 없음)에 붙였으니 지금 심경은 평탄하여 근심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다. 스스로 헤어보건대 기력이 전보다 도리어 나으니 근심하지 말아라.”라고 하셨다.


二十二年丙寅 先生六十三歲 正月停啓 大司諫鄭彦燮停啓 二月還配光陽 撰族祖敬窩公行狀 諱烋有德行文章 夏聞慵窩柳公訃 先生深痛惜之寄子樂行書曰此令地位人望足爲吾嶺領袖吾平生相信相愛無間骨肉而今遽失之此莫非吾之不幸云云


22년 병인(선생 63세, 1746): 정월에 정계하다. 사간 정언섭이 정계하였다. 이월에 광양으로 환배되시다. 집안 할아버지 경와공의 행장을 찬하시다. 휘는 휴이시고 덕행과 문장이 있으셨다. 여름에 용와 유공의 부음을 들으시다. 선생은 매우 통탄하고 아까워하시며 아들 낙행에게 글을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에게 지위가 있었으면 족히 우리 영남 선비의 영수가 되었을 것이다. 내 평생에 서로 믿고 사랑하기를 골육과 다를 바 없었는데 이제 문득 그를 잃으니 나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二十三年丁卯 先生六十四歲 春寓黃龍寺讀易 謂子樂行曰吾今年始窺得易義矣 四月三十日己丑以疾終于縣北龍仙庵之寓舍 先生患難以後重爲水土瘴癘所傷牀第累月猶不廢看書疾革命童子誦古書於前易簀前一日作詩十絶與子樂行皆勉勵家學之意也臨終命侍者安靜以俟更無一語及家事 蟾江上有魚臺石亭之勝先生時與學徒逍遙其上諸生築一屋子爲陪遊請敎之所名之曰函丈臺及喪歸之後改其名曰景慕臺 六月奉櫬從水路舟行七月到家 十月二十八日乙酉葬于府南祈靈山梨峴卯向之原 會者數百餘人


23년 정묘(선생 64세, 1747): 봄에 황룡사에 계시면서 주역을 읽으시다. 아들 낙행에게 이르시기를, “내 금년에야 비로소 주역의 뜻을 조금 알았다.”고 하셨다. 사월 삼십일 기축 우환으로 현북 용선암의 우사에서 돌아가시다. 선생은 환난 이후 풍토병의 독기에 손상되신 바가 심하셔서 자리에 계시기가 여러 달이었으나 오히려 책 읽으시기를 폐하지 않으셨다. 우환이 급해지시자 동자에게 명하시어 앞에서 고서를 외게 하셨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절구 열 수를 지으셔서 아들 낙행에게 주셨는데 다 집안의 학문을 면려하시는 뜻을 담고 있었다. 임종하실 때에 모신 사람들에게 안정할 것을 명하시고 기다리시되 집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 말씀도 없으셨다. 섬강의 위에 어대와 석정의 경치가 있었는데 선생 때에는 학도들과 더불어 그 위에서 소요하셨다. 여러 생도들이 선생을 모시고 가서 배움을 청하는 장소로 한 집을 짓고 이름하여 ‘함장대’라 했다가 선생의 상행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 이름을 고쳐 ‘경모대’라 했다. 유월에 관을 모시고 물길을 따라 배로 행하여 칠월에 집에 이르시다. 시월 이십팔일 을유 부남 기령산 이현 묘향지원에 장사하다. 모인 사람이 수백여 인이었다.


二十四年戊辰 春因疏決有全釋之命


24년 무진(1748): 봄에 상소에 의해 완전히 석방하는 명이 있었다.


二十六年庚午 特命給牒 爲臺啓所繳還


26년 경오(1750): 특명으로 직첩을 돌려주었다. 대간의 장계에 의해 모두 돌려보내게 되었다.


正宗大王十九年乙卯 十月特命復官 孫始全輦路鳴寃自上命蕩滌特下判付以諭之判付若曰安東金始全段今年大赦歲抄也只知歲抄所載文蹟乙仍于事係先朝處分不敢輕易語到其後更考文蹟始覺其果合蕩滌是如乎渠祖聖鐸自在釋褐之前屢被先朝獎拔之恩渥以一命筮仕待以隱逸之禮至命下諭道臣勸駕上送及其登筵特除百里及當乙卯慶科賜第又賜御詩二句擢除玉堂而朝廷之上別無爭執之論後因對辨辭職之章有一承宣忽地論啓轉成葛藤事端層生而竟被昭釋之澤罪則咸宥名在歲抄逢今年念科名其所闊狹豈待渠籲然事有關於義理則不可以此忽彼而奉覽先朝處分取見故相箚語尙未蕩滌於歲抄而若踰今年則是豈念科名之意乎歸田人故校理金聖鐸別無捧傳旨之事只以罪名分揀之意其矣處分付渠祖行誼厚被先朝恩數而渠父行誼亦所籍稱未及收用於生前此爲欠事此意幷以渠處曉喩爲良如敎 領相蔡濟恭奉敎書判付以遺之 十二月焚黃改題 會者千餘人


정종대왕 19년 을묘(1795): 특명으로 복관되시다. 손자인 시전이 임금의 가마가 가는 길가에서 원통하게 우니 임금으로부터 죄명을 씻어주라는 허가가 특별히 내림으로써 위유하였다. 판부에 이르기를, “안동 김시전은 금년 대사면한 세초(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조관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에서 가리어졌으나 다만 세초에 실린 문적이 지난 임금때의 처분과 관계된 일이라 감히 가볍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다시 문적을 살펴 보고는 그것이 과연 죄를 씻어주기에 합당한 것임을 깨달았도다. 그의 할아버지 성탁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여러 번 지난 임금께서 장려하고 뽑아쓰시는 은혜를 입었으며 한 목숨을 바쳐 벼슬에 종사하였다. 은일의 예로 대우하여 임금의 명이 이르고 도신에게 일러 수레를 권하여 올려보내게 하였다. 그가 경연에 오르자 특별히 중요한 자리에 제수하였고 을묘년 경과에 당하여는 급제를 내리고 임금의 시 두 구절을 내렸으며 옥당에 뽑아 썼으나 조정에서는 별로 다투는 논의가 없었다. 뒤에 대변하고 사직하는 글로 인하여 한 승선랑이 문득 전계를 논하면서 갈등이 일어나고 사단이 층층이 생겼으나 마침내 밝히 풀어주시는 은택을 입게 되었다. 죄는 다 사해졌으나 이름이 세초에 있으니 금년을 당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의 활협한 바가 어찌 이 사람의 부르짖음을 기다릴 일인가. 그러나 일은 의리에 관계있는 것이니 이렇게 경홀할 수는 없다. 지난 임금때의 처분을 받들어 살펴 옛 재상이 올린 말을 찾아 보되 아직 세초에서 씻어지지 않았는데 금년을 넘기면 이것이 어찌 과거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뜻이겠는가. 벼슬을 빼앗은 고 교리 김성탁은 따로 전지를 묶어 올리는 일이 없이 다만 죄인의 명부에서 분간하려는 뜻으로 그리 처분한다. 이 사람의 할아버지는 행동이 떳떳하여 지난 임금의 은혜를 두터이 입기를 자주 하였고, 이 사람의 아버지도 또한 행동이 떳떳하여 널리 일컫는 바 되었으나 생전에 받아들여 등용되는 데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뜻을 함께 이 사람에게 주어 효유하라.”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이 교서를 받들어 허락을 받아 주었다. 십이월에 교서를 받들고 신위에 관직을 고치다. 모인 사람이 천여 인이었다.


純宗大王元年辛酉 文集成 子樂行收拾遺文將淨寫一本而未及焉歲庚子從子道行與南澗柳公道源東巖柳公長源校勘爲八冊至是始刊行


순종대왕 원년 신유(1801): 문집이 이루어지다. 아들 낙행이 남기신 글을 수습하여 장차 한 본을 깨끗이 베껴 두려 하였으나 다하지 못하였다. 경자년에 조카 도행이 남간 유도원 공과 동암 유장원 공과 함께 교감하여 여덟 책을 만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간행하였다.


三十年庚寅 十一月初六日庚申改조于眞寶縣南丙甫午向之原 移淑人朴氏墓合祔會者八百餘人


30년 경인(1830): 십일월 초육일 경신 진보현 남쪽 병보 오향지원으로 산소를 옮겨 모시다. 숙인 박씨의 묘도 옮겨 부장하였다. 모인 사람이 팔백여 인이었다.



[補]보유


哲宗大王二十一年庚申 附錄刊行 年譜遺事墓碣銘輓祭合爲一冊


철종대왕 21년 경신(1860 - 註): 부록을 간행하다. 연보, 유사, 묘갈명, 만제를 합하여 한 책이 되었다. (註 - 조선 철종은 1849년(기유)에 즉위하여 1850년(경술)을 원년으로 하였으며 왕 14년 1863년(계해)까지 재위하였으므로 왕 21년은 없다. 그러므로 이 연보의 철종 21년은 왕 11년 1860년(경신)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착오가 있을 것이 두려우므로 첨기만 해 둘 뿐 다른 분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今上十六年己卯 十月十三日墓道竪碣 蔡樊庵濟恭所製 會者六百餘人


지금 임금(고종) 16년 기묘(1879): 시월 십삼일 묘도 비석을 세우다. 번암 채제공이 지은 것이다. 모인 사람이 육백여 인이었다.


三十年癸巳文集重刊 辛巳冬景山齋舍火災冊板不保至是始重刊


30년 계사(1893): 문집을 중간하다. 신사년(1881) 겨울에 경산 재사의 화재로 책판을 보전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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