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파
<東人>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맞섰다.
명 칭은 후배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 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15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 지도자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의 내부적 입장 차이가 이때 서인에 대한 공세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었다.
 
<南人>
조선 중 ·후기 동인(東人)으로부터 북인(北人)과 함께 분파된 정파.
1588 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에 타격을 가한 서인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지킨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적극적인 서인 배격을 주장한 정인홍(鄭仁弘) ·이발(李潑) 등의 북인과 맞섰다.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 중에 서인 ·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강력한 주전론의 비판을 받아, 전란 말기에 실세하였다.
광 해군 때에는 북인의 독주에 대해 서인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취하다가, 인조를 추대한 서인의 정변(인조 반정)을 인정하고 이원익(李元翼) ·정경세(鄭經世)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몇몇 쟁점에서 서인과 대립하기도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서인 일반과 손잡고 공신세력의 권력독점과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공신과 서인세력에 눌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기호지역 출신인 허목(許穆) ·허적(許積)과 북인의 후예인 윤휴(尹?) 등이 크게 진출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기호 출신과 영남 출신은 입장에 차이를 보이면서, 중앙 정치에서의 활동과 새로운 사상의 탐구에 기호 남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왕실 상례를 둘러싼 논쟁[禮訟]에서 왕가의 특수성을 주장하여 상복 기간을 길게 잡는 이론으로 서인과 대립하던 중, 1674년의 2차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종 말기와 숙종 초년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대거 숙청되고, 9년 뒤 정국을 뒤집었으나, 다시 5년 만에 서인에 밀려 실세하였다. 그 뒤로는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 아래에서 오광운(吳光運) ·채제공(蔡濟恭) 등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한 적도 있으나, 서인 ·노론이 주도하는 정치판도를 뒤집지는 못하다가 정조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대체로 국왕권의 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업적에는 광범위한 개혁론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실세한 시기가 많은 데서 기인한 강렬한 현실비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이 화폐 유통을 대한 것, 적서차별 철폐에 대한 소극적 입장, 신분제 극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복고적인 입장도 강하게 나타난다. 한편, 새로운 사상에 대한 탐구는 천주교(天主敎)를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北人>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내에서의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
<西人>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서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철이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곧 실세하였다. 그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 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
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인조반정].
인 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후 현종대 왕실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김집·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
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정파(政派).
<노론>
소론(少論)과 함께 앞시기의 서인(西人)에서 갈라져 나왔다.
17 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는 정치운영 방식, 훈신(勳臣)·척신(戚臣)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南人)에 대한 처리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거기에 지도자인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파를 이루어 남구만(南九萬)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론과 대립하였다. 숙종대에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정쟁(政爭)의 축을 이루었으나, 남인이 중앙정국에서 몰락한 뒤 경종대와 영조대에는 소론과 대립하면서 중앙정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경종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인 연잉군(延?君:뒤의 영조)을 후원한 것이 반대파인 소론에게 반역으로 몰려,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는 사건[辛壬史禍]을 겪음으로서 소론과의 융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 소론을 반격하여 소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고, 소론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뒤로는 조정에서 확고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蕩平策)으로 붕당을 깨고 국왕의 국정운영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점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전통적인 붕당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18세기 말에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높이는 데 찬동하는가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파(時派)와 벽파(僻派)가 대립하였다. 그것은 노론 자체의 분기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지만, 남인과 소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이후 노론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시파와 벽파는 노론 내부의 분열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에 의한 결집이었다. 노론의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존속하였으나, 정권을 잡아 정부를 운영하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론의 사상은 대개 이이(李珥)를 거쳐 김장생(金長生)·송시열에 의하여 조선식으로 소화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였고 이단을 적극적으로 배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원에서 명(明)나라의 멸망으로 끊어진 천하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정치이념에서는 사족(士族)의 정치주도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파를 군자가 모인 군자당(君子黨)으로 여기고 반대당을 소인당(小人黨)으로 규정함으로써 반대파의 숙청과 권력독점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념은 남인과 소론 등에 의하여 비판받았고, 내부에서도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北學派)가 성장함으로써 극복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정책은 대상인과 대지주의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공리공담에 빠져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저버린 채, 낡은 질서와 기득권의 유지에 집착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근래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던 힘과 논리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소론>
조선 후기 서인(西人)에서 분파되어 노론(老論)과 함께 성립된 정파(政派).
서 인 내부에서 정치적 입장의 분화는 이미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講和) 여부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나타나며,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정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때는 훈신·척신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에 대한 처리 방안 등에서의 이견과 지도자인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를 배경으로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 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정점으로 한 노론과 대립하였다.
특히 경종대에는 왕위 계승문제를 직접적 정치 쟁점으로 하여, 국왕의 동생 연잉군(延?君:영조)을 후원한 노론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숙청하였다(辛壬獄事).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의 반격을 받아 '소론사대신(少論四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제거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남인과 연계하여 무력으로 봉기하다 진압되었다(李麟佐의 亂).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아래에서 일부 구성원이 정부에 참여하며,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계승되지만 권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지는 소론의 사상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거치면서 확립된 성리학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는 노론과 같으나, 병자호란 때 청에 대한 항복을 주관한 최명길(崔鳴吉)과 효종대의 대청관계를 담당한 이경석(李景奭)의 자세를 계승하여,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었다고 평가된다. 노론과의 대립 초기에는 훈신 및 척신과 제휴한 송시열 등의 정치 행태를 격렬히 비판하여 사림정치의 본령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정제두(鄭齊斗) 등의 학자는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해 가던 성리학의 한계를 양명학(陽明學)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현실에 대한 혁명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 등을 중심으로 성립된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이종휘(李鍾徽)·이건창(李建昌)을 거쳐 정인보(鄭寅普)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전통을 유지해왔다.

<시파>
조선 후기 정조 때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붕당 간의 대립 속에서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
벽 파(僻派)와 대칭되어 쓰였다. 정조는 영조 말 이후로 비대해진 탕평당(蕩平黨) 계열의 정국주도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위상을 자신의 지향대로 설정해야 하는 2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영조는 숙종 이후 심화되었던 노론과 소론 사이의 시비를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통해 절충하고 노 ·소론의 주요인물들을 외척화하여 이를 안정화하려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영조 말 노론계의 의리론이 재확인되고 그 속에서 탕평당이라는 이름으로 비대한 세력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정조는 즉위 후 외조(外祖)인 홍봉한(洪鳳漢) 계열과 반(反)홍봉한 계열을 포함한 탕평당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노론청류를 등용하고 규장각(奎章閣)과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등을 통해 친위세력을 키워 나감으로써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노론청류뿐만 아니라 채제공(蔡濟恭)과 같은 남인 ·소론계 일부 등을 중용하였다. 기존의 노론 탕평당 계열은 영조 말에 이미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홍봉한 계열[扶洪派]과 반홍봉한 계열[攻洪派]로 분열되어 있었다. 정조는 왕권강화의 토대를 닦은 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상권을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임오의리(壬午義理)는 이미 공홍파와 부홍파가 분열하였던 것처럼 영조 말 이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임오의리를 둘러싼 논란을 억제하면서 왕권 강화를 달성한 다음, 재위 12년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위상을 자신의 의향대로 설정해 나갔다.
이 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정조 주도하의 정국에 참여하였던 계열이나 그 대척에 서 있던 벌열(閥閱)세력 등의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보다 심화되었다. 채제공 등 소수 남인으로서는 이 문제가 노론중심의 정국운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소재였으므로 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문제에 대한 정조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가 벽파로 결집되어,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부류를 시류에 편승한다는 의미로 시파라 하여 배척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정조가 사도세자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심화되었다. 임오의리와 정조의 정책을 둘러싼 시 ·벽의 대립은
순조 초년 경주김씨와 안동김씨가 대립하게 되는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벽파>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莊獻世子) 또는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영조의 세자가 폐위(廢位) ·아사(餓死)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당파싸움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黨派). 이 파의 주류는 노론(老論) 계열인데, 조선시대 중엽의 당파싸움은 주로 노론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었다. 벽파에 대립하여 싸우는 당파인 시파(時派)도 또한 남인이어서 시파 ·벽파의 싸움은 결국 남인과 노론의 싸움이었다. 남인, 즉 시파는 장헌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세자를 동정하였다.
그러나 노론, 즉 벽파는 세자가 광패(狂悖)하여 폐세자(廢世子)의 변을 자초하였으니 조금도 동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자가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나라를 망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각 당파가 표면에 내세운 명분일 뿐 사실은 두 파가 주장하는 대로가 아니었다.
숙종 때에 몇 번이나 되풀이된 남인 대 노론의 당파싸움이 경종 때를 거쳐 영조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파싸움을 막으려 했지만 자신도 결국은 그 싸움에 말려든 셈이다. 시파 ·벽파의 싸움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순조 때에도 되풀이되었다.
<강화학파 [江華學派]>
조선 후기에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양명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한 학파.
1709 년(숙종 35) 정제두는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소론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강화도로 물러나은거하였다. 이후 그의 친인척들과 이광사(李匡師), 이광려(李匡呂), 신대우(申大羽), 심육, 윤순(尹淳) 등의 소론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익히거나 혈연관계를 맺어 200여 년 동안 학맥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설을 따르고 이기론(理氣論)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으며, 이(理)와 기(氣)를 체용(體用:사물의 본체와 그 작용)과 본말(本末:일의 처음과 끝)로 이해하였다. 또한 왕수인(王守仁)의 양지학(良知學)과 심학(心學)을 토대로 하여 사학(史學)과 정음(正音), 서예와 시문을 발전시켰다. 실학파와도 손을 잡았는데 특히 북학파는 강화학파의 양명학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 가운데 이종휘(李鍾徽)는 역사를 양지사관(良知史觀)에 기반을 두고 공평을 원칙으로 삼아 주체적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사관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子之過)》,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나랏말인 정음의 연구에도 힘써, 이광사의 정음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정동유(鄭東愈), 유희(柳僖)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서예에서도 백하(白下) 윤순 이후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가 창조되었고, 이긍익, 정문승(鄭文升) 등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문장에서는 명나라 이지(李贄)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公安派)의 성령문학(性靈文學)을 토대로 하여 이광려, 이긍익, 이건창 등이 과거의 형식이나 시세(時勢)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표현세계를 이루었다. 이들은 당시 주요한 사상
적 흐름이던 실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상학(李象學), 신작(申綽) 등이 실학을 연구하였고 이건방(李建芳), 이충익 등의 진가(眞假) 논리도 실학자들이 표방하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강화학파는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강화로 낙향하였던 이건창과 식민지 시대의 국학진흥에 힘썼던 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그 인맥을 이어갔다. 이밖에도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김택영(金澤榮) 등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北學派>
영조 정조대 이후 청(淸)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
북 학을 하자는 주장은 북학론(北學論)이며, 북학을 하였던 학자들의 학문내용과 현실인식 지향성 등 사상 전반을 종합적으로 지칭할 때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이라고 한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文公章句)〉에서 진량(陳良)과 같은 남만(南蠻)의 지식인이 '주공공니지도(周公孔尼之道)', 곧 유학(儒學)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1778년 박제가(朴齊家)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한 이후, 북학은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中華)의 선진문물을 배운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하게 된다.
인 조대(仁祖代)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당한 이후 조선에서는 오랑캐 청에 대해 복수하고자 '북벌(北伐)'을 주장하고 북벌대의론(北伐大義論)을 내세워 청의 문물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영정조대 서울의 일부 학자들은 조선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의 문물이 바로 선진 중화(中華)문화임을 인정하여 그를 받아들이자는 '북학'의 주장을 폄으로써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모색하였다.
이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이하 박제가·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서형수(徐瀅修)·서유구(徐有?) 등 서울의 경화사족(京華士族) 학자들이 국제질서와 조선구사회 내부의 변화에 부응하여 민생을 이롭게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학풍을 추구하였던 결과였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과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그리고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구체화된 이들의 북학론은 처음에는 청의 문물 가운데 유용한 것을 받아들이자는 선택적인 문물 수용론이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차츰 북학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서구 ·서유구 등은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학풍을 유지 발전시키며 청조의 문학과 고증학도 수용하는 과도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순조대 이후로는 이를 토대로 정약용(丁若鏞)·신작(申綽)·성해응(成海應) 등 많은 학자들이 북학론의 개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북학을 하고, 청의 문물 뿐 아니라 청의 학술인 고증학(考證學)과 예술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이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직접적 교류 위에 김정희(金正喜)·권돈인(權敦仁)·조인영(趙寅永) 등 정권을 담당하던 세도가들이 북학을 하면서 더욱 가속되었다. 이들은 실사
구시(實事求是)의 엄밀한 고증적 학문방법과 문화예술의 세련을 추구하여, 이용후생을 기치로 민생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던 앞 시기 북학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청 조 고증학풍이 서울에 유행하고 추사(秋史) 김정희의 새로운 서화예술이 풍미하면서 조선의 학풍과 문화도 변화하고 전통주자학의 권위도 크게 약화되었다. 한(漢)나라 훈고학(訓?學) 전통의 계승을 표방하며 새로이 대두한 고증학(考證學:漢學)과 기존의 정통 성리학(性理學:宋學) 사이에 학문적 우위논쟁이 학계에서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또한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우자는 북학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흥미를 느끼고 그 선진성을 인식하면서 서양과 직접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수용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박제가의 해외통상론을 발전시켜 이규경(李圭景)·최한기(崔漢綺) 등이 주장한 것으로 개
국론, 개화론의 선구를 이루게 된다. 북학론과 북학은 조선사회의 변화와 조선사상계의 발전과정 위에서 이런 단계적 과정을 거쳐 근대적 사상으로 전환하였다.
<성호학파 [星湖學派]>
조선 후기에 근기(近畿) 지방에서 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활동한 학파
근 기학파 또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라고도 한다. 이들은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여 실증과 실용에 기반을 둔 창조적, 비판적인 학풍을 일으켰다. 이익은 이황(李滉)의 성리학적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허목(許穆), 유형원(柳馨遠) 등의 학문경향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학문체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당시의 지주전호제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와 노론 중심의 전제정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므로 학문에서도 현실개혁적인 성향이 많이 나타났다. 서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천주학의 천주나 지옥 등의 교리에는 비판적이었으나 유교의 이념과 유사한 교리에는 동조하였다. 또한 정치에서는 법제를 갖추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여 과거제와 지주전호제의 혁파와 한전제(限田制)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역사에 관해서도 비판적, 고증적인 파악과 주체적 역사의식을 중시하였다.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후학들에게 이어졌는데, 그의 후손 가운데는 경제학을 연구한 이만휴와 천문학과 문학을 연구한 이용후, 경학과 사학 등의 이가환, 지리학의 이중환이 잘 알려져 있다. 제자로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쓴 사학의 안정복, 천문학을 한 황운대, 지리학의 윤동규, 문학의 신후담, 경학을 연구한 권철신 등이 유명하다. 성호학파는 경전의 해석방법과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태도에 따라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기도 하는데, 온건주의를 주장하는 보수파에는 안정복, 황덕길, 허전 등을 들 수 있고 급진적 소장층인 진보파로는 정약용, 권철신, 정약전 등이 꼽힌다.
<중농학파 [重農學派]>
조선 후기 실학의 한 분파로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중시했다
조 선 후기 실학의 한 분파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라고도 하며, 주로 상업발달과 기술개발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주장했던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계열의 학자들이 대표적인 중농학파였다.
이들 개혁론의 특징은 토지제도가 모든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파악한 점이다. 이들의 토지제도개혁론은 전통적 이상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기반으로 했지만, 과거의 경구(經句)를 나열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먼저 유교의 원전과 고제(古制)를 다시 연구ㆍ해석하여 개혁론의 이론적 당위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변화와 농업생산력 발전까지 수용하여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탐구했다.
유형원 의 균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은 모두 이러한 연구의 산물이다. 토지개혁을 달성하고 그 성과를 국가체제 전반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정치세력의 개편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관료제와 과거·교육·행정제도, 나아가 향촌사회 조직까지 새로 구상했으며, 이러한 체제를 기반으로 조세·군사·군현제 등을 합리적으로 개혁하고, 양반층의 특권과 신분차별의 원리에 입각한 각종 폐단을 제거할 것을 주장했다.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고,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하는 태도는 철학과 역사학에도 반영되었다. 이전처럼 자연세계의 법칙에서 만물에 공통된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사회의 원리를 분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실제적인 것에서 사실을 발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중세사상의 핵심적인 원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천문학·의학·수학 등 자연 과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이전에는 천시하던 자연개조와 기술개발에 대한 인식도 변했는데, 이 역시 신분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작용했다. 중국이 아닌 한국의 현실에서 방법론을 찾는 태도는 한국사 연구
와 역사지리 연구에도 적용되어 이 시기 이후로 많은 지리서와 지도가 편찬되었다.
<중상학파 [重商學派]>
조선 후기 실학의 한 분파로 상공업 발달을 중시하였다
이 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리는데 북학파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청나라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실학은 조선 후기 특수한 사회적·경제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사상으로서 공리공담이 아닌 실질적인 것,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그것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려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다. 나아가 실제 사회에 이용될 수 있는 이용후생의 학문이었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수록된 '이용(利用)'이란 백성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각종 기계나 운송수단 등을 말하며, '후생(厚生)'이란 의복이나 식량 등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18세기 이후 실학의 흐름은 이익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학파와 박지원·박제가·홍대용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 및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룩하게 된 실사구시학파로 대별된다. 그러나 이 세 유파가 제각기 학문분야를 달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당시의 관념적인 주자학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하여 실용과 실증을 창도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북학파의 개혁 상상은 농업에만 치우친 이상 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개화 사상의 등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북학파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으로는 조선 후기 사회의 상공업 발달과 청나라 문물의 수용, 그리고 서양 문물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등이 부국 강병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북학파 실학자들에 게 깨우쳐 주었다
<산림학파 [山林學派]>
정계를 떠나 산촌이나 농촌에 묻혀 글 짓고 책 읽는 것으로 낙을 삼던 선비들의 통칭(通稱).
그 기원은 고려 중엽 무신(武臣)이 정권을 잡아 일어서자, 문학을 향유하여 특권을 누리던 문신(文臣)들이 모두 산야(山野)로 추방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흔히 산림학파라 할 때는 연산군 이후의 무오(戊午)·갑자(甲子)년의 잇단 무오사화·갑자사화와 심해지는 당쟁을 피하여 깊은 산촌으로 숨어들어가 독서나 시작(詩作)에 몰두한 학자·문객(文客)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들의 문학적 성격은 한층 더 자연에 심취(深醉)하는 경향을 띠었다. 산림학파로 꼽히는 사람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이후 은퇴한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조식(曺植) 등이다.
<실학파>
조선 후기 실학파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은 다음과 같다.
① 제1기:한백겸(韓百:1551∼1615) ·류몽인(柳夢寅:1559~1623) ·이수광(李?光:1563~1628) ·허균(許筠:1568~1618).
② 제2기:유형원(柳馨遠:1622~73) ·박세당(朴世堂:1629~1703) ·김만중(金萬重:1637~92) ·정제두(鄭齊斗:1649~1736) ·이이명(李?命:1658~1722) ·정상기(鄭尙驥:1678~1752) ·이익(李瀷:1681~1763) ·이중환(李重煥:1690~1760)·유수원(柳壽垣:1694~1755) ·정항령(鄭恒齡:1700~?) ·신후담(愼後聃:1702~61) ·안정복(安鼎福:1712~91) ·신경준(申景濬:1712~81) ·위백규(魏伯珪:1712~98) ·홍대용(洪大容:1731~91) ·이긍익(李肯翊:1736~1806) ·이만운(李萬運:1736~?) ·박지원(朴趾源:1737~1805) ·이덕무(李德懋:1741~93) ·우하영(禹夏:1741~1812) ·유득공(柳得恭:1749~?) ·박제가(朴齊家:1750~?) ·성해응(成海應:1760~1839) ·정약용(丁若鏞:1762~1836) ·한치윤(韓致奫:1765~1814) ·유희(柳僖:1773~1837) ·
③ 제3기:김정희(金正喜:1786~1856) ·이규경(李圭景:1788~?) ·김정호(金正浩:?~1864) ·최한기(崔漢綺:1803~1879) ·이제마(李濟馬:1836~1900) 등이 흔히 손꼽혀 왔으며 시기별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이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주장의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①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②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 ③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게 된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경서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정약용을 이 3개 유파의 집대성자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실사구시 [實事求是]>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실사구시이다.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實事求是)”에서 비롯된 말로 청(淸)나라 초기에 고증학(考證學)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일삼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대진(戴震) 등을 들 수 있고 그들의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實學)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이 실학 사상은 조선 중기, 한국에 들어와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켰으며 이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이 땅에 실학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탄압을 받고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 때문에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방법론이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희(金正喜)이다. 그에 앞서 홍석주(洪奭周)는 성리학과 고증학을 조화시키
는 방향에 섰지만, 김정희는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실천을 역설하였다.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는 높이 평가된다.
<경세치용 [經世致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상(儒學上)의 주장
중 국 명(明)나라 말에서 청(淸)나라 초의 동림학파(東林學派)와 그들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등이 주창하였다. 명나라 중기 이후 유학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객관적 실증성을 떠난 주관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자 그에 반대하여 이 주장이 일어났다. 이것은 청나라 초기에는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으나 차츰 고증(考證)만을 위주로 하는 학풍에 밀려 안원(顔元) ·이공(李) 등의 학파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용후생 [利用厚生]>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는 용어
18세기 후반에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이 주장한 이념.
그 러나 이용·후생이란 말의 어원은 경서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해지는 《상서(尙書)》의 〈대우모大禹謨〉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유화(惟和)'란 구절에서 이미 나온 말이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정덕'은 빼고 이용·후생만 따온 점이다. 그것은 정덕이 중요시되어 온,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일관되어온 동양의 정치적 가치관에 일대 혁신임을 뜻하는 말이다. 정덕이란 부자·형제·부부간에 지켜야 할 유교적 윤리체계이며 이용과 후생은 국민의 풍요로운 경제 생활이다. 즉 윤리 우위의 정치가 아니라 경제 우위의 정치를 부르짓는 말로 변혁된 것이다. 이용후생의 정치 이론은 청나라의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주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고무되어 일어난 북학파에 의하여 체계 있는 이론으로 연구되었다. 북학파란 존주대의니 존화양이니 하는 명분론에서 벗어나서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정덕 이후에 이용·후생이 있다는 전통적 학설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들 이용후생학파(북학파)는 성리학(性理學)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연과학의 도입, 중소상공업의 육성, 기술혁신 해외 통상 증진 등 국민의 경제를 향상할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실학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 당시 특권층의 비호를 받고 결탁한 개성상인의 독점 상행위를 비판하고 영세 상인들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에서 "백성들의 이용과 후생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에게도 배우고 받아 들여다 한다"는 주장을 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론에 그치고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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