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향과 문호의 형성


 의성 김씨가 처음 안동에 입향하게 된 것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낸 김거두(金居斗)가 안동의 풍산현으로 낙향하게 되면서이다. 전서공의 웃대 태권(台權)은 벼슬이 문예부좌사윤으로 공민왕 12년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鏞)의 난에 여러 시종대신과 함께 희생되는데, 직후에 전서공이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어머니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증손녀로 그 집안이 풍산일대에 재지기반을 둔 여말 신진사대부였기 때문이다.

뒷날, 전서공의 아들 천(洊)은 나라의 운명이 기우는 것을 슬퍼하여 안동부 율세동 부근으로 이거하였다. 율세동의 옛 이름은 방적골인데 우거할 때에 “나라가 망하려 하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꼬(邦之革矣我安適歸)”라 한탄한 데서 붙여진 말이라 한다.


 낙향 이후 토성이족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출사(出仕)를 위한 향촌 기반을 구축한 후 선초 세종조(世宗朝)부터는 上京從仕하기도 하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 때 다시 낙향하여 그 때까지 어느 정도 공고해진 기반 위에서 마침내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말 이래 조선전기의 사회상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는 여말의 무신의 발호와 불교의 타락, 부원세력(附元勢力)의 권귀화(權貴化)와 모점(冒占) 등의 여러 사회문제로 기인한 극도의 혼란을 새로운 이념과 사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 사회적 주체로 부상하였던 신흥사대부의 정권이다.

독서유생인 사(士)와 전현직 관료인 대부(大夫)가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이 되어 초기의 정권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여말의 신흥사대부가 왕조교체를 계기로 집권사대부와 재야사대부로 나뉘어지고, 15세기 이후의 왕위찬탈 및 정정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분기되어 갔다. 내앞 김문의 선조 김거두와 아들 천이 안동부 풍산현과 부치 방적동에 우거하고, 세종 문종 조에 출사하여 청요직을 역임했던 김한계가 관직을 떠나 향촌에 은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또 입향 이후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배경에는 한편 사림세력의 성장 및 분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당시의 혼속과 재산상속제가 깊이 관계되어 있다. 여말까지는, 특히 지방 향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부자나 형제 사이에도 향리(鄕吏)와 관인(官人)이 공존하였고, 吏族도 의연히 고을의 한 지배세력으로서 과거나 군공을 통해 사환에 진출하였으니만큼 士族과 이족의 신분적 구별 자체가 희미하였다. 따라서 둘 사이에 빈번한 혼인관계가 맺어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 균분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낙향과 상경종사 모두가 처가 또는 외가를 통한 반연과 경제적 지원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특히 상경종사자가 낙향할 경우에는 토성인 안동권씨와의 인척관계 유무가 재지기반을 위해서 결정적이었다.


 내앞 김씨가 안동에 입향하게 된 배경은 바로 안동김씨와 권씨가 처향 또는 처의 외향으로 이미 향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성 김문은 이후에도 안동권씨를 비롯한 재지명문사족들과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한다. 우선 김천의 아들 영명(永命)은 문종(文宗)의 장인 권전(權專)의 사위였고, 그의 장자 한계(漢啓)는 문과를 거쳐 승문원 등 청환(淸宦)에 재직하였는데 세조 찬탈 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게 된 내력도 문종왕후의 인척이며 단종과 이종 간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한계의 장자 만근(萬謹)이 안동부 속현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졌던 오계동(吳季童)의 사위가 되어 비로소 내앞에 정착하게 되고, 다시 아들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靑溪) 김진(金璡)---극일(克一) 형제의 세대로 이어지면서 문호가 크게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안동 권씨 뿐 아니라 진성이씨와도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李繼陽)은 김만근의 아우 충순위 만신(萬慎)의 장인이고, 이계양의 아들, 곧 퇴계의 바로 윗어른 이식(李埴)은 김한계의 아우인 한철(漢哲)의 사위이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주촌(周村)(두루)의 참봉 이희안(李希顔)은 승지 김예범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계와 처남매부 간이며, 청계의 손자 운천(雲川) 김용(金溶)은 퇴계의 손서이기도 하다.


   2. 청계 김진과 문호의 창달


 흔히 선비의 고장으로서 안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내앞이라 하며, 그 이유는 안동을 대표할 만한 한 문헌의 집안이 십수 대, 오백여 년을 이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그 문헌의 집안을 말하면서 개창의 주인공인 청계 김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설명에 문헌이란 역사적 사실을 증험하는 데 필요한 문적과 현인을 뜻한다 하지 않았던가.


 김진(金璡)은 관향이 의성, 자는 영중(瑩中), 세칭 청계(靑溪)는 그 호이다. 연산군 6년 1500년 2월 내앞 본가에서 출생하여 1580년 영양 청기 흥림초사(興林草舍)에서 작고하니 향년 여든 하나였다. 의성김씨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군 석을 득관 시조로 하고 의성군 석으로부터 9세를 전하여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를 지낸 용비가 의성군을 습봉함으로써 그를 중시조로 삼는다. 다시 삼대를 내려와 위에서 언급한 바, 12세 고려 문예부 좌사윤 태권(台權)이 흥왕사에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는데 이 좌사윤공이 청계의 7대조이고 6대조인 전서공 거두(居斗) 때에 안동에 입향한다. 이후의 가계는 5대조 천(洊), 고조(高祖) 영명(永命) 증조(曾祖) 한계(漢溪) 조부(祖父) 만근(萬謹) 아버지 예범(禮範)을 거쳐 청계공에 이르는데 임하에 처음 기틀을 잡은 이는 조부인 망계(望溪) 만근(萬謹) 공이다.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종고모부 권간(權幹)에게서 수학하고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5대손 민세경(閔世卿)의 사위가 되었는데, 처숙 민세정(閔世貞) 공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바로 이 처숙을 종유하며 당대의 현사들과 사귐에 견문이 크게 진전되었다. 26세(1525)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각별한 친교를 맺고 각지에서 온 명사들과 사귀는 등 학업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 이후 곧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와 향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대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일을 경영하는데 천전을 기반으로 인근의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까지 반변천 중상류를 개척하여 가원을 삼았으며 나아가 중년에는 멀리 강릉 땅의 금광평을 입안 개척하였고 영양의 청기를 개척하여 별업을 삼았다.


 금광평은 현재의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어단리, 학산리 일대로서 당시 동서 십리, 남북 십리의 황무지였다. 청계는 이 땅을 입안 개척하여 후일 자손들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155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 청기에 들어가 미개지를 농경지로 개척하고 영양에서는 처음으로 서당을 세워 강학과 향림교화에 정열을 기울였다. 백년 대계의 초석이 될 경제적 기반을 마련코자 한 일이거니와 이는 16세기 재지사족의 새로운 농장개척, 집단촌락 형성 등 문호확장 사업의 선구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청계공의 사업이력을 연조에 따라 간추려 메모해 본다.


23세(1522년) : 맏아들 극일 출생

 26세         : 사마시 급제. 서울 태학에 유학.

 29세-39세   : 둘째 수일(守一), 셋째 명일(明一), 맏딸 유실(柳室), 넷째 성일(誠一) 출생.

 41세(1540년) : 부친 승지공의 상을 당함.

 42세         : 막내 아들 복일(復一) 출생

 47세(1546년) : 맏아들 약봉 문과(갑과) 급제.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 상을 당함. 이때부터 속현하지 않고 학봉(8세) 아래 남악(5세)과 젖먹이 딸들까지 모두 8남매를 직접 보살펴 양육함.

 48세        : 마을 건너 부암(현 백운정 아래)가에 독서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자제와 고을의 영재를 모아 교육함

 58세(1557년) : 귀봉의 장자인 손자 용(涌)(운천-雲川)이 출생함. 이 무렵 청기에 별업을 짓고 그 곳에 기거함.

 65세(1564년) : 위로 약봉, 귀봉이 대 소과에 급제하고 약봉은 벼슬길에 나아감. 아래 삼형제가 모두 진사회시에 동방급제함.

 67-69세     : 선유정(仙遊亭)을 지음. 학봉이 대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름. 이때쯤 귀봉에게 백운정을 짓게 함.

 71세        : 둘째 귀봉, 셋째 운암과 막내 남악이 대과 응시를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운암의 병세 악화로 운암과 귀봉은 귀향하고 막내 남악만이 대과에 응시, 등제함. 귀향길에 운암은 용인 금량역 부근에서 끝내 요몰함.

 73세         : 화공에게 진영을 그리게 하고 선유정 남쪽 벽에 걸게 함.

 77세(1576년) : 오토산 입석 발문을 짓고 묘역을 수축함.

 78세         : 1570년대 초반에 영양사림에 통지하고 영해부사 양사기공의 협력을 얻어 건립을 추진하였던 영산서원이 이 해에 완성됨.

 80세(1579년) : 팔순을 맞아 육남매와 대소가 친척들이 청기에 모임. 이 무렵 대과에 오른 세 아들, 사위 이봉춘李逢春 등의 네 문관이 영산서원의 향회에 참석함.

 80세(1580년) : 윤사월  신유, 청기 우사에서 돌아감. ‘나이 여든이 넘었으니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내게 내린 복이 이처럼 많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며 태연히 임종함.


 대강의 이력에서도 자세히 보이듯, 청계의 평생은 자손의 교도와 향리의 흥학양속으로 점철되었다. 시례(詩禮)를 자손의 장래를 위한 계책으로 삼아, 차례로 도산문하(陶山門下)에 집지(執贄)케 한 일이며,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덕목을 강조하여 제사를 성심으로 받들 것을 유훈으로 남긴 일, 친척인아(親戚姻婭) 간의 돈목(敦睦)을 몸소 실행하여, 재산의 분배에서 문권을 남기지 않아도 원망이 없도록 처사한 일이나, 멀고 가까운 친척과 이웃 사이에 한결같이 후박(厚薄)이 없도록 대우한 일, 고아가 된 외손이나 가난한 생질들을 거두어 자애로 육성하고 안돈시킨 일 등은 모두가 당장은 문호의 기풍을 두터이 하는 일이면서 결국은 향리의 습속을 두텁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중년부터 고향의 부암에 서당을 열어 마을 자제들을 훈도하고 만년까지도 그제껏 무무한 해읍의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양(英陽)(당시는 영해-寧海의 속현이었다)에 영산서당(英山書堂)을 발기하여 글 읽는 풍습을 이끌어내고 수많은 사류를 성립시킨 일들도 이러한 일의 연장에서 가능하였다.

 항상 강조하였던 바, ‘인신된 사람은 훌륭한 일을 하다가 명예롭게 죽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신명을 보전하여 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군자로서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살아남는다면 나는 오히려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는 말은 세전(世傳)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어 넷째 자제 학봉의 구국활동으로 구체화되었을 뿐 아니라 한말 이후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의 역사적 삶을 규정하는 제일의적 규범이 되었다.

 청계와 그 다섯 자제의 유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의 서문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하늘이 인재를 냄이 잦지 않아서 한 대를 걸러서 한 사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몇 대를 지나 한 사람을 내기도 하였다. 그 부자 형제가 발굽을 잇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일은 수백 대에 겨우 한 둘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중략---
우리 부자께서 언젠가 자천(子賤)(공자의 제자)을 두고 말씀하기를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품덕을 배웠겠는가’라고 하였거니와 이 말을 해설한 이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부형과 사우에 근본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지극히 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청계선생이 아버지로서 경사를 길러 음덕을 쌓는 일을 앞에서 하셨고 퇴계선생이 스승으로서 재덕을 이루고 창달하는 일을 나중에 해주셨으니 비록 오형제 분의 높은 자질과 품성은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훈도와 점염의 공은 부모와 스승의 도움에 바탕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청계와 그 다섯 자제가 대소과에 올라 한 가문의 문호를 일거에 크게 열어놓은 내력을 칭상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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