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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운정과 내앞의 산수     

     

 정자의 이름 ‘백운’은 당나라 초기의 현신 적인걸(狄仁傑)의 ‘등고산 망백운 사친재기하(登高山 望白雲 思親在其下)(높은 산 올라가 흰 구름 바라보니, 그리운 부모님 그 아래 계시다)’라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마루에 오르면 종택과 내앞 아래 웃동네가 한 눈에 보이며 서북편으로 개호송 너머 비리실(비리곡)에 계신 승지 예범(禮範-청계공의 웃대)공의 산소가 보인다. 적인걸의 시의(詩意)가 꼭 맞아 떨어지는 정명(亭名)이다.

정명 편액의 글씨는 미수(眉壽) 허목(許穆)이 썼다. 미수는 퇴계학맥의 한 갈래를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전수하여 성호(星湖) 이익(李瀷)에 이음으로써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선구가 된 바로 그 어른이다.

 헌함을 좌우의 주사로 들어가는 중문과 마루 동편에 각각 게시된 조양문(朝陽門) 이요문(二樂門)의 두 현판은 퇴계의 필적이다. 조양은 ‘봉명조양(鳳鳴朝陽)’의 준말로 시경(詩經) 권아(卷阿)의 시구에서 취의한 것인데, ‘어진 인재가 언젠가 때를 만나 일어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요는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의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의 두 ‘요자(樂字)’를 가져다 쓴 것이다. 산수를 좋아하여 늘 일정하며 쉬지 않는 그 지기를 배우라는 뜻이다.

 정자 내에는 역대 문내외 어른의 창수시가 무수한데 게판된 시는 청계의 원운(源韻)과 약봉 귀봉 학봉 운천 표은의 시판과 동악 이안눌 제공의 시편이다. 


 청계의 원운은 이러하다.


절벽을 깎아 정자 세운 푸른 산머리,                       鑿壁開亭翠巘頭

강산도 명미하다 사람 눈길 씻어 내네.                     江山明媚拂人眸

한낮의 맑은 물에는 물고기 무늬 얼비치고                 日臨鏡面魚紋動

구름 걷힌 하늘 가운데 기러기 떼 날아가네                雲掃天心雁字稠

고을 원님 노닐 곳으로 일찍부터 알려지니                 百里遊歌曾物色

정자 부근 풀꽃들도 아름다운 덕을 머금었다.               一區花草亦光休

술동이 앞 가없는 풍류 좋은 줄 알거니와                  知有樽前無窮樂

자손들이 유령劉伶처럼 취할까봐 걱정일세                 祗恐兒孫醉似劉

영가지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임하현의 북쪽 이리, 부암연 위에 있다. 증판서 김진 공이 지은 것을 아들 수일이 옛 제도에 더하여 개축한 것이다.
김진의 시는 이러하다.

鑿壁開亭翠巘頭
 
依然風景集雙眸

日臨鏡面魚紋動

風掃天心鴈字稠

百里遊歌曾勿色

一區花草亦光休

江山合是棲身地

祗恐兒孫醉似劉

 보다시피 수련의 대구와 함련의 기구, 미련의 기구가 게판된 내용과 약간의 출입이 있다. 용만龍巒이 처음 백운정 관련 기사를 등재할 때 익숙한 곳에 대하여는 송영하던 것을 기억하여 게재하였을 것이다. 항용 그렇듯이 기억은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이 오차가 1791년에 청성서원에서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와 원장 귀와龜窩 김굉金굉(土변의 宏)의 주도 아래 교정이 진행될 때나, 나중 그로부터 다시 백이십여 년이 지나서 간행될 때도 바로 잡히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김굉은 주지하다시피 청계의 방손이며, 더구나 이 때 교정의 도감은 바로 청계공의 7대손 우고雨皐 김도행金道行이었고 일기유사나 정서유사가 모두 문내 자질들이었다 (우고는 바로 갈암의 신원으로 유명한 홍문관 교리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질자이며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의 종제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영가지의 간행경과와 청계공 제백운정 원운이 실린 연방세고의 간행시기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이때 연방세고와 표은문집은 바로 우고와 포산匏山 김용보金龍普(운암의 8세 주손)의 편차에 의해 공간되어 있었으니 연방세고가 대산 이상정의 서문을 달아 간행된 것은 1785년이었다. 육년 전이다. 

 지금 판각 영인되어 유통되는 영가지는 이 때의 교정작업을 거쳐 거의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899년에 간행된 것이다. 이 간행작업 때도 실무를 담당한 김시락, 김대락, 김도화 등의 인물은 모두 청계의 본손이거나 방손이었다. 때문에 당시에 백운정 기사의 출입이 무지의 소치이거나 무관심의 결과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 따라서 아무래도 선현의 수적에 다소의 와오訛誤가 발견된 경우라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가르침에 따라 함부로 산삭하지 않는 당시의 풍토 때문이었으리라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재 게판된 시의 여러 주인공들 중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은 문내 본손이나 잦은 혼반으로 맺어진 연비간도 아니며 더구나 인근 지역에서 교유가 잦을 수 없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동악은 선초 해동강서파로 황진黃陳(송대의 문호 황정견과 진사도)을 배웠으나 답습의 흔적이 없이 완연히 자성일가하였다는 세평을 얻었던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증손이며 고문사대가로 유명한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재종숙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함께 선후를 다툴 만큼 당대의 천재로 유명한 시인이다.

동악의 시는 이러하다.


임하에서 일찍이 옛 나루 들머리 지나쳤는데          臨河曾過古津頭

오늘에야 병조兵曺영감을 뵙고 다시 눈을 닦네        今對兵曺更刮眸

정자가 오랜 가문을 좇아 내려오는데                 樹石摠從家世遠

풍월연파 노래한 시편도 많아라                      風煙偏入品題稠

백운이라 편액한 정자에 공이 장차 떠나려하니        白雲有扁公將去

벼슬살이 무심한 나도 따라 쉬고 싶네                朱紱無心我欲休

어찌하면 이웃하여 이로二老 될 수 있을까            安得卜隣成二老

삼은이 못되면 주류朱劉라도 좋겠네                  未容三隱數朱劉


 백운정에 게판된 이 시는 동악이 영해부사로 재임할 때 안동의 명승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계의 원운에 차운한 것이다. 

동시대에 문명을 떨쳤던 그의 재종질 택당 이식은 선대로부터 훈구벌열이었으며 인맥이나 친소관계로 본다면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과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 자신은 조정에서의 진퇴를 엄정히 하는 등 당론을 애써 멀리하고 중립을 지킨 이로 이름났다.


 다음은 택당澤堂의 글 해사록발海槎錄跋이다.

왜란이 처음 일어날 조짐을 보일 당시 우리 조야 또한 의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우리 쪽에서 사신을 보낸 것은 우선 저들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저들의 형세를 엿보기 위함이었지 서로를 진실로 믿고 교분을 두텁게 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저들이 바야흐로 업신여기고 한결같이 사납게 대하며 온갖 행태로 날뜀에 동행한 여러 사람들이 겁에 질려 지조가 흔들리자 저들은 점점 더 우리를 깔보았다. 선생이 일개 부사副使로서 그 사이에 꿋꿋하고 결단성 있게 대처하여 예로써 자신을 절제하고 꺾이지 않자, 오히려 저들이 두렵게 여기고 넋을 잃었다. 저들 스스로 자기들의 종을 죽여 사죄함을 보이는 데까지 이르니 당시 행중行衆은 오직 선생만을 의지하였다.

 사행을 마치고 복명할 때에 동행한 사신들은 저들에게 유약하고 나태하게 대처하다가 봉욕한 사실을 덮어 감추기 위해 적정의 급박함을 장황히 늘어놓았다. 선생은 그와 더불어 논란하다가 말이 좀 지나쳐 드디어 빌미를 잡힌 것이니, 요컨대 적의 실정에 밝지 못한 조정이 애당초 선생의 말씀 때문에 방비를 철수하고 도적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이상 그 형세가 기울고 사정이 긴박하여 미처 조처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선생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우리의 좋은 품성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의 풍성과 교화를 사모하여 다시는 지난날처럼 함부로 날뛰거나 능멸하지 못하였고, 그 이후 우리 사신들은 모두 선생의 행적을 표준삼게 되니 비록 인품이 혹 선생에게는 미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국명國命을 욕되게 하는 데에 이르지 않은 것은 한결같이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선생께서 ‘한 나라는 한 사람으로써 중重하게 되고, 한 사람은 말 한 마디로써 중하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하다. 아아, 군자는 정도에 거하면서 그 의리를 바르게 할 뿐이다.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미리 예측해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멀고 오랜 뒤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 어찌 한번의 계교로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후략----    

 당시 서인 집정의 조정에서 선조실록 개수 시에 학봉의 일본 사행시 행적과 녹훈이 걸맞지 않는다고 시비하자, 그 자신, 당론을 떠나 실정을 그대로 등재하여야 한다는 주장 아래 선왕시의 녹훈이 마땅하다는 조의를 정하는 데 앞장 선 바 있다. 이 사실과 함께 동악의 백운정 방문과 제영은 덕수 이문이 안동의 여러 문중, 특히 내앞과 시사를 보는 관점을 통하고 있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은 청계 김진의 장자로 특히 시에 뛰어 나, 퇴계 문하의 초기 제자들이 첫손으로 꼽았다. 영가지에 실린 시편만도 20여 수인데, 영가지의 시 편편이 해당 산수를 읊은 것으로 당시까지의 절창을 엄선한 것임을 감안할 때, 당대 사류들의 평가가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제백운정題白雲亭은 이러하다.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吾年過五十                 

고을을 네 번이나 지냈네                            四佩左魚章               

게다가 아버님 오래 사시고                          況復父兮壽             

인하여 아우들까지 건강함에랴                       因兼季也强         

솔바람은 잠자리에 부채질 돕고                      松風供扇枕         

흐르는 강물이 술잔을 권한다                        江水助添觴           

이제껏 얻은 바가 적지 않으니                       所得誠非淺         

한 곳에 머무름을 탓하지 말게                       休言滯一鄕         


온 집안 이끌고 피서를 와서                         全家來避暑            

날이면 날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았네                 日日坐松簷    

산비가 그쳤다가 다시 내리고                        山雨止還作           

물결은 줄었다가 다시 불어나                        江波減復添          

늙은 아내는 갈옷 마련에 공을 들이고                老妻工製葛   

어린 딸은 제법 어구를 엮을 줄 안다                 幼女解鉤簾    

시원한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오니                 萬里天風至    

맑고도 한가함을 나 홀로 겸하였네                   淸閒我獨兼     


오랜 가뭄이 오랜 장마 되니                         恒陽變恒雨            

높은 곳 정자도 어둡고 침침하다                     高閣亦昏霪        

작약꽃 이파리가 온통 젖으니                        花藥紅全濕           

거문고와 책들도 반나마 곰팡이라                    琴書綠半沈      

물 목이 불어나 건너기 어렵고                       濟盈難揭厲          

길마저 끊어져 찾는 사람 드문데                     路絶寡參尋        

홀로 모랫벌의 목 긴 황새만                         獨有沙頭鸛            

날거니 울거니 잘난 체 하네                         飛鳴得意深     


시렁에 공문서 던져두고서                           熊軒抛簿牒              

소나무 난간에 의관을 말리자니                      松檻曬衣冠         

어지럽던 정신이 비로소 깨이고                      瞑眩酲初折        

깊던 근심과 걱정 모두 사라지네                     幽憂病盡刪        

아잇적 낚시하던 앞 강물과                          釣魚童子水             

다 자라 약초 캐던 뒷 산이                          採藥丈人山             

저절로 내 분수에 편안하리니                        自可安吾分          

제관에 들어가기 생각 마세나                        休思入帝關          


  2) 임하구곡臨河九曲과 선유정


  임하구곡이란 임하의 백운정 상류를 거슬러 도연陶淵의 선유정仙遊亭에 이르기까지의 강산에 서리었던 명승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름난 경치에는 그 곳을 사랑하여 마음에 담거나 그 곳을 닮으려 한 사람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옛사람의 별호에 무슨 산山, 봉峯, 대臺, 정亭, 주洲, 애涯, 천川, 탄灘, 호湖 등, 승지勝地의 이름을 따른 것이 많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구곡이라는 명칭은 대개 주자朱子가 만년의 강학지 무이정사武夷精舍 일대의 절승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명명하고 구곡가를 지어 자신의 산수를 통한 수양의 지취를 읊은 데서 보편화 되었다.

 이곳 임하 구곡 일대에는 의성김씨 일문의 고적이 많이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위아래  처음과 끝은 단연 백운정과 선유정이며 모두 청계 김진의 유촉이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백운정 중수기에서

“임하에 아홉 구비의 승경이 있는데 백운정은 그 중 하나이다. 내앞 큰 마을과 강 하나 사이로 겨우 수백 보 거리이니 여염의 연기나 불빛이 맞닿고 사람의 말소리가 가까이 들릴 듯하다. 세속의 경계와 멀지 않아 그리 기이할 게 없을 듯하나 막상 정자에 올라 굽어보면 맑은 물 세찬 여울이 아래 위를 비쳐 두르고, 긴 모래톱과 갯벌이 굽이치며, 너른 임야와 줄지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 대개 강호의 절승과 산림의 풍치가 구비된 곳으로 임하 구곡 가운데 선유정의 기이한 경치만이 이곳과 견줄 만할 뿐, 나머지는 모두 이에 못 미친다.  ------ 서書에 긍당긍구肯堂肯構를 일컬었는데 그 전傳에서는 선계선술善繼善述을 기렸다. 선조가 물려주신 대관 궁실을 온전히 전하여 기울거나 상하지 않게 하는 일이 또한 긍구계술堂構繼述의 하나이니 이번 중수는 진실로 아름다워 기강 삼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선세의 업적 중 여러 대 승계되어 후예에 교훈될 일이 이보다 큰 일이 있으니 우리 자손이 더욱 두렵게 여겨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문호의 쇠퇴가 심함이여! 시서를 도타이하고 효우돈목을 강론하여 집안 대대로 물려온 풍교를 실추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려 하는 자들이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라 하여 백운정이 선유정과 함께 임하구곡의 으뜸이 됨을 말하고 이 속에 노니는 후예들이 선대의 도덕 기풍을 이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은 청계의 증손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가져온 국치 후,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자처, 도연陶淵의 와룡초당臥龍草堂에 복거하면서 세사를 끊고 도학에 잠심한 사람이다. 나중에 사헌부 집의의 증직이 내렸다. 도연에 숭정처사 유허비가 있어 선유정 지척의 또 다른 명승이 되었다. 다음은 그의 시 한거잡영閑居雜詠 네 수이다.


작은 갯마을에 봄비 그치니                          小村春雨歇

먼 산 봉우리에 석양이 붉었네                       遠峀夕陽紅

버들 솜은 방초에 나부끼고                          柳絮飄芳草

송화가루는 미풍에 흩어지는데                       松花落細風

산그늘 속에서 꾀꼬리 울고                          鸎歌山影裏

여울물 소리 속에 백로가 섰네                       鷺立水聲中

갈대 기슭 너머엔 고기잡이 노래소리                 漁唱隔蘆岸

외로운 배 하나 어옹은 어디 갔나                    孤舟何處翁


시흥 이는 바람에 긴 둑에 나가                      乘興出長堤

소요음영 하다보니 해가 기우네                      逍遙日欲西

붉은 꽃을 찾자니 원근이 다 붉고                    尋花紅遠近

푸른 숲에 쉬자니 위아래가 다 푸르다                憩樹翠高低

외딴 절 종소리 이윽고 그치자                       孤寺鍾初歇

한적한 개울가에 어지러운 새소리                    幽溪鳥亂啼 

입신양명 두 가지 버리고 나니                       身名兩俱遣

세상의 온갖 일에 이미 서툴 뿐                      萬事已筌蹄


절벽에 올라 높직이 기대서서                        欹危登絶岸

긴 하루 담담히 돌아갈 길 잊었네                    永日憺忘歸 

스님은 꽃 사이 오솔길 쓸고                         僧掃花間逕

물새는 버들 아래 돌 위에서 조누나                  鷗眠柳下磯

맑은 개울 물결은 반짝거리고                        晴川波閃閃

저문 골짝 그림자는 일렁이는데                      晩壑影依依

어린 아들 멀리서 바라보다가                        稚子遙相望

아비를 부르며 사립문에 기댔네                      呼爺倚短扉


한적한 초당에서 푸른 산 마주하니                   閒齋對碧峯

그윽한 구경거리 끝이 없어라                        幽賞自無窮

바람은 쌍쌍이 학을 날려 보내는데                   風送雙飛鶴

심상한 봄날에 홀로 취한 늙은이                     春尋獨醉翁

버들 가 아지랑이 푸른빛에 잠겼고                   柳烟微鎖綠

도화우 가랑비엔 분홍빛이 스몄네                    桃雨細含紅

만물이 모두 다 무리를 이루다니                     萬物盡成衆

태허엔 오히려 종적이 있었구나                      太空還有蹤


 한적한 계거의 정취와 처사의 맑은 삶이 그림처럼 선연하다.

 표은 이후의 내앞 김문의 가학의 흐름을 후인들은 금적제구로 압축하여 말한다.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이 그들이다. 금옹 김학배는 표은의 재종손이자 문도로서 표은의 행장을 쓴 사람이다. 현종 4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 춘추관기사관 고성현감을 지냈다.

 금옹의 문도이며 금옹 사후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에게 집지하여 갈암의 적거 이후에 금양강학錦陽講學의 물적 토대를 만들었던 적암 김태중은 반변구곡의 산수풍월이 ‘내 집 물건(吾家物)’이라 하였다. 그의 시 제선유정題仙遊亭에서


청명한 바람 속에 자갈 길 다 지나니              踏盡晴風亂石川

석양 비낀 정자엔 계단 길이 가파르네             花宮斜日步層顚

풍월 찾는 시인 붓에 구름이 일어                 騷人覓句雲生筆

촌로도 바람 타고 신선이나 될 듯해라             野老乘風骨欲仙

만리에 가을 들어 온 계곡이 단풍인데             萬里秋容粧絶壑 

보름 달 차가운 빛 하늘에 가득하다               一輪霜月滿諸天

오늘부터 이 강산은 모두 다 내 차지니            江山自是吾家物

좋은 경치 가져다가 남에게 전하지 마소          莫把奇觀世外傳 


라 한 것을 이른다. 적암은 평생을 전야에서 독서하며 사환의 길에 초연하였던 사람이다. 불구문달不求聞達(명성이나 영달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의 생애를 지탱하였던 힘이 강호취며 산수벽이었을 법하다. 함께 갈암의 문도였으며 영조英祖 신임辛壬 연간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혐의로 평생 낙백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는 적암에 대한 만사 칠률에서 이렇게 적어 그의 생애를 요약하였다.


너른 저 물 볼 때마다 임하를 생각노니            洋洋流水想臨河

운곡서당 거처에서 읊은 시도 많았었지            雲谷幽居雜詠多

   --- 중 략 ---

백운정 물 위에 뜬 달은 옛날과 같건마는          依舊白雲潭上月  

슬프다 오늘 후로 누구 차지 되려는고             可憐從此屬誰家


 임하 앞을 흐르는 반변천은 안동부 동쪽의 와부탄에서 낙강과 합류한다. 포헌은 와부탄과 영호루의 아래 쪽 청성산 앞에 살았다. 송암 권호문의 주손이다. 임하를 생각한다는 말은 하류에 사는 포헌이 상류에 살았던 적암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하류는 상류의 흐름에 힘입는 법이니 두 강의 합류로 드넓어진 강류를 보면서 방금 세상을 떠난 적암을 ‘山高水長’의 도덕에 비긴 것이다. 포헌의 생각에 그 의경과 도덕의 원천은 백운정 주위의 산수풍광이었다. 적암 생전에는 그 모든 것이 적암의 차지였는데 이젠 그 풍월의 주인이 죽고 없다고 탄식한 것이다.

 또 구사당 김낙행은 내앞 안쪽의, 금옹과 적암의 자취가 배인 운곡서당이 퇴락하자 문내 인사와 더불어 그 중수를 주도하고 기문을 지었는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컨대 이 곳 산천의 승경은 우리 가문의 문헌 전승을 도왔다. 금옹의 유허가 지척에 있고 적암의 구택이 주춧돌 하나 사이에 있으니 선현 후현의 학문 수수와 덕업 계승은 하늘의 뜻이요, 진실로 우연이 아닐 것”이라 하였다.

 구곡에 관련된 일들은 향내 인사들의 수창이나 문집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영가지永嘉誌>와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이 빠질 수 없다. 영가지에는 백운정에 대하여 “백운정은 임하현의 북쪽 이 리, 부암연 위에 있다. 증판서贈判書 김진 공이 지은 것을 아들 수일守一이 옛 제도에 더하여 개축한 것이다”라고 한 후, 백운정에 게판된 시 중 청계의 원운을 소개하고 있고, 또 선유정에 대해서는 “임하현 동쪽 선찰사 앞에 있다. 김진이 지은 것이다. 동쪽에 있는 산을 봉일산이라 하고 뒤에 있는 것을 무학산이라 하며 앞에 있는 것을 장륙산, 왼쪽을 옥병산, 오른쪽을 취병산이라 한다. 취병의 봉우리는 도경봉이요, 옥병의 봉우리는 탁천봉이다(<永嘉志> 卷三, 樓亭條)”라 하고 있다.

 택리지에서는 이상적인 가거지 중 한 형태로 계거를 들고 계거의 대표적 유형으로 안동의 도산, 임천, 하회, 유곡을 들고 있다. 여기서 임천은 말할 나위 없이 임하의 임천서원(후에 송현의 호암으로 이건하였다.) 일대이며, 청계 김진 이래 내앞 김문 집성지역을 지칭한다.

 구곡이 각각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자세하지 않아 선현이 남긴 자료로 대략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은 그의 동유십소기東遊十小記에서

복주 동쪽에 임하현이 있다. ------ 처음 청계 김공이 이 곳에 터를 잡아 한 지방의 이름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강 하류로부터 상류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유촉이 닿은 곳이라 혹은 정자를 세우고 혹은 사당을 세우기도 하니 드디어 내앞 김문의 고장이 되었다. 내가 요사이 외숙 정재선생定齋先生(한들의 정재 유치명을 가리킨다)께 학업을 닦으러 다니는 여가에 걸어서 내앞으로부터 도연까지 구경한 적이 있다. ------ 김사원金士遠의 말에 ‘임하에 구곡이 있다’고 하는데 내 아직 알지 못하여 구곡의 이름을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다. ------ 드디어 그 경치를 뽑아 동유십소기를 짓는다. (<愼庵集> 東遊十小記)

 

라 하고 백운정으로부터 상류를 거슬러 가며 임천臨川, 사빈泗濱, 송석松石, 선창仙倉, 석문石門, 낙연落淵, 표옹유허瓢翁遺墟, 선유정仙遊亭, 상선암上禪庵의 십승에 짤막한 기문을 붙였다. 그런데 이들 중 석문과 낙연은 사실 하나이고 선유정과 선찰사의 상선암은 동일한 구역에 있으므로 두 구역에서 하나씩 낙연과 선유정만을 택하면 구곡 중 여덟 곳은 뚜렷해진다.

 여기에 안동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에 소장된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 (虛舟府君山水遺帖. 藏書閣 第 3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0. 7.)의 열세 폭에 실린 그림 중에서 백운정과 도연 사이의 승경을 그린 것은 모두 7폭인데 이들을 대조해보면 나머지 한 곳을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임하구곡 지역에 해당하는 일곱 폭 중, 첫째 그림의 화제畵題는 운정풍범雲停風帆이다. 백운정과 하류의 개호송, 그 건너편 내앞 마을의 정경을 부감俯瞰하여 사실적인 필치로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칠탄후선七灘侯船이며 세 번째는 망천귀도輞川歸棹이다. 칠탄은 지금의 임하에서 망천 사이의 깊은 여울이며 망천은 임하댐으로 수몰된 옛 夢仙閣 주변의 경승이다. 칠탄은 숙종조에 섬계剡溪 이잠李潛이 그 때 동궁이었던 경종을 보호하려다 장폐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조정에 나포되었던 김세흠金世欽의 별호이기도 하며, 몽선각은 자신 또한 산수화에 뛰어나 도산서원의 풍광을 그렸던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이 꿈에 소동파를 만나 노닐고서 만년 장수지소로 얽은 정자이다. <택리지>의 계거溪居 조에도 이 몽선각에 대한 언급이 실렸을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 승지인데, 신암의 동유십소기에는 이 칠탄과 망천이 빠져 있다.


 네 번째는 사수범주泗水泛舟. 사의 동구와 사빈서원 앞에 배를 띄우고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사수 상류, 경출산 남록에 청계 김진의 묘소가 있다. 묘소에서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오 리 가량 상류의 맞은 편 지점이 대박大朴 김철金澈의 재궁이 있던 송석이다. 가정이지만 허주가 동양산수의 또 하나 큰 주제였던 구곡을 염두에 두고 구곡도를 계획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사수범주와 그 다음 그림인 선창계람 사이에 송석과 관련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 다음은 선창계람仙倉繫纜이다. ‘선계의 만물상’이라는 뜻에서 명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섯 째 그림은 낙연모색落淵暮色이니 도연폭포의 저물녘 풍경이다. 마지막은 선사심진仙寺尋眞이다. 그림의 광경은 이 선유船遊의 종착점이라 할 선유정에 당도한 유객들이 청계의 영정影幀을 봉심하는 장면이다.


 동유십소기에서 빠져있는 칠탄은 망천輞川 몽선각 앞의 징연澄淵과 이어진 여울이며 그 밖의 다른 경승과 유사한 선인의 행적에 관련된 정사나 유허 등의 구조물이 없으므로 사실 상 망천 하나로 합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유십소기의 중복된 경물을 뺀 여덟 승지와 이 망천을 합하여 구곡을 비정할 수 있다. 임하구곡은 일곡의 백운정으로부터, 이곡은 임천과 임천서원, 삼곡이 망천과 칠탄, 사곡은 사수의 사빈서원, 오곡은 송석, 육곡은 선창의 수석, 칠곡은 낙연현류, 팔곡은 선찰사와 선유정, 구곡은 표은 유허가 되는 것이다.


 우리 선인들의 산수취미는 출처관의 핵심과 닿는다.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論語> 泰伯篇)라거나,  ‘숨어살면서 자신의 지향을 추구하며, 의를 행하여 자신의 도를 달성한다’ (<論語> 季氏篇)라 한 언급은 경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숨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의 티끌, 즉 물욕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산수 간, 전원 간에 은거함을 말한다. 나라의 정치 사정이나 사회적 여건이 천리를 구현하려는 나의 지향과 합치하면 세상에 나아가지만 그러한 나의 지향과 다를 때는 재야로 물러나 세상의 명리를 멀리하며 심신의 수양에 전념한다는 뜻일 터이다.


 특히 이 은일청유隱逸淸遊의 사상은 요산요수, 난진이퇴, 삼공불환, 임천고치 등의 수신일의修身一義의 개념을 생활로 실현하려 한 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훗날의 사대부 사이에 보편화되어 시문詩文이나 도화圖畵의 오랜 테마가 되었다. 예컨대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려 하면서도 사정상 그 속에 부침浮沈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이 산수취山水趣를 통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할 텐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므로 그림이나 시문에 지취를 가탁하여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계 김진의 산수 강호취江湖趣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며 적극적이다. 종래의 문인 한사는 자신의 산수취미를 충족하기 위하여 선계仙界의 풍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을 당실堂室 안에 걸었다. 한적한 수석의 풍치를 남이 개입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옮겨와 독점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계는 선유정의 산수를 그려 완상자적하는 대신, 자신의 초상을 그려 선유정에 걸어두게 하였다. 초상에 담긴 스스로의 넋이 길이 선유정 부근의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평생 누린 강호취미 아직도 미진하니              生平未盡江湖趣 

노경의 내 모습 그려 정자 남쪽에 걸어 두네.      爲寫衰眞寄舍南 

                          

 주인공의 시의가 바로 보물 1221호인 <청계 김진 영정>이 그려진 사정이려니와 여하간 이 이후로 선유정 일역의 도연에서부터 내앞의 백운정과 개호송에 이르기까지의 아홉 구비가 내앞 문헌의 산수고장이 되고 후예들의 삶의 표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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