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의 구국혈성으로 발화한 내앞의 지절과 인물


  가성家性이나 가풍家風이라는 말은 어떤 집안의 집단적 성품이나 기풍을 뜻하니, 그 구성원의 기질과 성향이 동일한 역사와 환경 속에서 꾸준히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한 결과를 가리킨다. 왕왕 그것이 긍정적인 내용을 가졌을 때 가성(家聲)이라는 말로 대체해 쓰기도 하는데, 가문의 명성名聲이나 성망聲望을 뜻한다. 개인의 기질과 성향이 주변 인물이나 자연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듯이, 가성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가문의 기풍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그 가문의 역사와 인물, 주변 환경에 주목하는 법이다. 옛 풍습에 처음 만나는 사람과 수인사를 행할 때, 관향은 어디를 쓰며, 어디에 살며, 현조로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지를 자세히 물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가성에 비추어 처음 만나는 그 사람의 대략의 기질이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게 수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흔히 내앞의 가성은 사환仕宦에 따른 부귀보다 학문행의學問行誼에 바탕한 지절指節에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중흥조 청계 이래의 가문의 역사와 문화, 또 내앞을 중심한 수상水上 수하水下의 산수山水 속에서 발양되고 전습, 심화된 결과일 것이다. 청계의 아랫대 중 이러한 가성을 이루는 데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단연 학봉 김성일이다.


   1) 학봉 김성일의 구국 활동


 잘 알려진대로 학봉 김성일은 통신사로 왜에 다녀온 후, 사행 복명에서 정사 황윤길과는 달리 왜의 침공 조짐을 부정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임란으로 인한 국가 위난의 책임이 학봉에게 전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란 직전의 백성이 처해 있었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면 학봉이 왜倭의 침공설에 동조했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온 나라가 장차 다가올 침공에 대비하여 전시체제의 동원과 축성 보수의 부역에 힘을 기울였다 가정한다 하더라도 임란의 발발, 즉 왜의 침공 자체를 미리 막을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학봉이 나주 등지의 목민관牧民官과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를 수행하는 동안 눈으로 목도한 백성의 피폐상을 감안하면 전란이 발발하기 전에 민란 수준의 내부적 혼란에 먼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아사 직전의 백성들이 유리 도산하여 민정을 소집할 수 없었고, 관청의 군기는 창검槍劍과 궁시弓矢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어 새로 갖추기커녕 보수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실제로 전란 초기에 적정敵情에 동화同化하여 지리에 어두운 왜군의 길라잡이를 자담하거나, 왜성倭聲을 쓰는 등, 왜병을 가장하여 향촌에 출몰하며 침탈하였던 적당들은, 조정의 무능과 관차의 침학에 몰리다 기어이 향촌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산지유민散地流民들이었다. 수령과 군관은 이들 유민과 나라의 안위安危에 떨쳐 일어선 향병을 동일시하고 핍박을 일삼아 김시민金時敏이나 곽재우郭再佑조차 적당으로 몰았으며, 향병은 향병대로 예봉을 돌려 관군과 부딪칠 때가 많았다. 관군과 의병이 목전의 외침을 치지도외하고 갈등 반목에 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위에서 이미 이반한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어 향병으로 결속시키고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제調劑 화합和合시킴으로써 임란 초기 삼대승첩의 하나인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이끌어낸 것은 학봉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조실록의 “영남 사민이 성일誠一의 초유招諭와 효시曉示에 의지하여 안집安集하고, 다시 흩어지지 않았으니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 것은 성일의 공이 가장 크다.”라 한 사신의 말은 당시의 최악의 상황을 성혈誠血로 반전시킨 학봉의 공로를 평가한 것이다. 경상좌도 방면의 왜병의 기세가 치열해질까 우려한 조정이 학봉을 좌도감사左道監司로 옮겨 제수함에 따라, 학봉이 임지를 떠나려 하자 우도사민友道士民의 실망이 막심하였다거나, 나아가 통문通文을 돌리고 유회儒會를 열어 진정서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가는 길을 막아 우도에 계속 머물러 줄 것을 호소하였다는 데서도 초기 전란 극복 와중에서 점했던 학봉의 역할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학봉은 결국 1593년 봄부터 삼남에 돌았던 역병에 걸리어, 스스로 진주성 사수를 효유할 때 말한 바의 ‘삼남三南의 요로要路요, 호서 호남 곡창의 보장堡障이니, 곧, 온 나라의 기틀’이었던 진주 감영에서 별세하였다. 자신과 함께 왜적의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던 경상우병사 김면金沔을 같은 돌림병으로 앞세워 보내고 제문을 지어 곡한 직후였다. 둘째 아들 혁(삼수변의 奕)도 전쟁 중의 아버지를 수행하며 시중을 들다가 전정 만 리의 나이, 스물넷에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학봉 행장行狀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학봉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대개 영남이 앞을 다투어 왜이倭夷로 화하지 않은 것은 의로운 선비들이 창기한 공로이지만, 의병의 활약을 그처럼 끝내 성취토록 한 것은, 실상 선생이 혈성血誠으로 사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고, 진주성을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은 까닭은 비록 김시민金時敏이 역전한 공로이지만, 이 또한 선생의 지원指援과 응책應策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으니, 그 자신, 살아서는 일도인심一道人心의 의지하는 장성長城이 되고, 돌아가서는 대소사민大小士民의 울며 서로 위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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