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報計開京畿道、江華府駐箚全羅道節度使崔遠兵四千, 京畿道巡察使權徵兵四百, 倡義使金千鎰兵三千, 義兵將禹性傳兵二千, 水原府駐箚全羅道巡察使權慄兵四千,【已上在王京西邊, 距京城一日程。】楊州駐箚防禦使高彦伯兵二千, 楊根郡駐箚義兵將李?兵六百,【已上在王京東邊距京城一日程。】驪州駐箚京畿巡察使成泳兵三千, 安城郡駐箚助防將洪季男兵三百,【已上在王京一日半程。】忠淸道稷山縣駐箚本道節度使李沃兵二千八百, 平澤縣等處將官各將數百名, 約共三千餘名。 各處義兵各數百, 約共五千餘兵。【已上在王京南邊, 距京城二三日程, 或四五日程。】慶尙左道安東府駐箚本道巡察使韓孝純兵一萬, 蔚山郡駐箚本道節度使朴晋兵二萬五千, 昌寧縣駐箚義兵將成安義兵一千, 靈山縣駐箚義兵將辛碑兵一千, 右道晋州駐箚本道巡察使金誠一兵一萬五千, 昌原府駐箚本道節度使金時敏兵一萬五千, 陜川郡駐箚義兵將鄭仁弘兵三千, 宜寧縣駐箚義兵將郭再祐兵二千, 居昌縣駐箚義兵將金沔兵五千,【已上在王京南邊, 距京城或七八日程, 或十二三日程。】全羅道順天府前洋駐箚本道左水使李舜臣舟師五千, 右水使李億?舟師一萬, 及各處分屯措備軍一萬。【已上在王京南邊, 距京城八九日程, 或十三四日程。】咸鏡道咸興府駐箚本道節度使成允文兵五千, 鏡城府駐箚評事鄭文孚兵五千, 安邊府駐箚別將金友皐兵一百, 助防將金信元兵一百。【已上在京城北邊, 距京城十五六日程, 或二十四五日程。】江原道麟蹄縣駐箚本道巡察使姜紳兵二千。【在王京東邊, 距京城四日程。】平安道順安縣駐箚本道節度使李鎰兵四千四百內, 射手千二百八十。 法興寺駐箚本道左防禦使鄭希雲兵二千內, 射手二百二十三, 砲手五十。 義兵將李柱兵三百內, 射手七十。 召募官曹好益兵三百。【已上在平壤雰邊, 距本府城一日程。】龍崗縣駐箚右防禦使金應瑞兵七千內, 射手七百七十。 助防將李思命兵一千內, 射手九十。 大同江下流駐箚舟師將金億秋兵三百內, 射手一百二十。【已上在平壤府西邊, 距本府城或一日程, 或半日程。】黃海道黃州駐箚本道左防禦使李時言兵一千八百, 載寧郡駐箚右防禦使金敬老兵三千, 延安府駐箚本道巡察使李廷?兵四千。【已上在王京西北平壤府南邊, 距王京七八日, 距平壤城一二日程, 或四五日程, 俱在大同江近南。】 右各處軍馬, 合十七萬二千四百, 隨賊所向, 臨機進?, 不可的指當駐去處, 兼又軍數或添或分, 多寡無定。

답보(答報)하면서 헤아려 개진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
【이상은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京城)과의 거리는 1일 정(程)이다.】

양주(楊州)에 주차한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李?)의 군사 6백 명,
【이상은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일 정이다.】

여주(驪州)에 주차한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에 주차한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
【이상은 왕경에 있으며 1일 반 정이다.】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천 8백 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5천여 명이다.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2∼3일 정이나 4∼5일 정이다.】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만 명,
울산군(蔚山郡)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昌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천 명,
영산현(靈山縣)에 주차한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천 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만 5천명,
창원부(昌原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陜川郡)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천 명,
의령현(宜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천명,
거창현(居昌縣)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천 명,
【이상은 왕경의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나 12∼13일 정이다.】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 주차한 본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水軍) 5천 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만 명,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8∼9일 정이나 13∼14일 정이다.】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천 명,
경성부(鏡城府)에 주차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천 명,
안변부(安邊府)에 주차한 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백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백명,
【이상은 경성 북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5∼16일 정이나 24∼25일 정이다.】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 추자한 본도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천 명이다.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4일 정도다.】

평안도 순안현(順安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4천 4백 명 내에 사수(射手) 1천 2백 80명,
법흥사(法興寺)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천 명 내에 사수 2백 23명·포수(砲手) 50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백 명
【이상은 평양부(平壤府) 동쪽에 있으며 본부와는 1일 정이다.】

용강현(龍崗縣)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천 명 내에 사수 7백 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천 명 내에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에 주차한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1백 20명,
【이상은 평양부 서쪽에 있으며 본부와의 거리는 1일 정이나 반일 정이다.】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천 8백 명,
재령군(載寧郡)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천명,
연안부(廷安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이정암(李廷?)의 군사 4천 명이다.
【이상은 왕경에서 서북쪽, 평양부에서 남쪽에 있으며 왕경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며 평양성과의 거리는 1∼2일 정이나 4∼5일 정인데 모두 대동강 남쪽에 잇따라 있다.】

위의 각처 군마(軍馬)는 합계가 17만 2천 4백 명인데,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



임진년 일본의 침략이 있고 바로 이듬해 계사년 즉 1593년 1월 11일의 기록이다.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부랴부랴 한성을 떠나 왕과 조정이 모두 의주까지 피난을 가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행정력은 각도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의병이 보유한 100명 단위까지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비록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패주하던 상황이었건만 그러함에도 조선의 행정력이 여전히 제대로 가동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경상도의 병력이 눈에 띄는데, 임진년 초반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그대로 유린되었다고 여겨졌던 경상도에서 바로 이듬해 7만 7천 명, 당시 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병력의 45퍼센트에 해당하는 병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의병이라고 해봐야 1만 2천이 고작, 나머지 6만 5천은 모두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 경상좌도 절도사 박진,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보유한 관군이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그렇게 허무하게 일본군에 패해 흩어졌던 경상도에 어느새 이렇게 많은 병력이 모이게 된 것일까?

사실 임진년 전쟁에서 죽거나 다쳐 사라진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부산과 동래, 밀양 등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느라 피해가 발생했을 뿐, 그나마도 이들 성에서 전몰한 병사는 전체 병력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 이외의 병력은 미처 싸워보지도 않고 전쟁이 나자마자 모두 도망쳐 흩어졌다. 그것도 병사들이 먼저 도망쳐 흩어진 것이 아니라 박홍과 원균, 김수 같은 지휘부가 먼저 겁을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기껏 제승방략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 집결했던 병사들마저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쳤다고 모두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임진년의 충격이 가시자 조정에서 파견된 김성일과 김늑 등을 중심으로 다시금 병력과 행정력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에서 흩어진 병력들도 다시 조선 조정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관군에 합류하지 않은 병사들은 각 지역의 명사들의 아래에 모여 의병이 되었다. 도망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쟁 초반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다시 결집하여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임진년 그렇게 허무하게 패한 것은 다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지휘부 책임이었다 할 수 있다. 병사들은 여전히 싸울 의지가 충만했는데, 그래서 처음의 혼란이 가시자 다시금 관군으로, 혹은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의 싸움에 나서고 있는데, 심지어 수군에 속해 있던 병력마저 수사들이 배를 불사르고 도망치자 육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의 쌍무을 계속하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러함에도 정작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이며 관리들이 먼저 도망치고 말았으니 제대로 싸움이 되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임진년의 싸움에서 김성일의 공이 크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이미 민심의 동요를 꿰뚫어 보아 그것을 수습하고자 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서는 초유사로 임명되어 적지나 다름없던 경상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력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것은 장차 의병과 관군이 연합작전을 통해 임진년 당해 이미 경상우도를 회복하고 진주성을 지켜내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김성일의 공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일방적으로 패주했다고 여겨지는 임진왜란에서 이미 이듬해 17만 이상의 병력이 결집되어 있고, 그것을 조정에서 1백 명 단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사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고 나면 행정력이고 뭐고 마비되어 버리는 것이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전장에 나선 장수는 적군에 투항하고, 심지어 왕의 측근들조차 배반하여 왕을 팔아 넘기려 하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조차 조선은 저와 같은 치밀하고 정교한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만큼 조선의 시스템이 얼마나 잘 정비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초반의 불리함에도 끝내 나라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러한 바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아쉽다면 저 17만 이상의 병력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인데, 일단 경상도를 함락당한데다,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피폐해지면서 조선 조정은 더 이상 10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할 재정적 여력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고서는 그들에 대한 보급까지 책임져야 했던 데다, 정유재란에 이르러서는 진주와 남원이 뚫리며 호남의 곡창지대까지 유린되었으니 당장 10만의 병력조차 언감생심이었다. 이것은 역시 또한 당시 조선이 갖고 있던 한계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웅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순신의 공이 가장 컸다. 명의 참전 역시 일본군에게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이 되었고, 스스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졌던 의병이며 관군에 속한 이름없는 용사들의 활약 역시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왕이 수도를 벗어나 북쪽 끝으로 도망치던 상황에서조차 이처럼 왕의 명령이 각지로 전달되고 각지의 상황이 왕에게로 다시 모이는 시스템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만일 다른 나라에서였다면 전장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고, 가장 강력한 정예병을 보유한 장수를 압송해 처벌하려 했다면 당장 반란이 일어나도 몇 번은 일어났을 것이다. 조정이 건재하다면 모를까 수도를 버리고 땅끝까지 도망쳤었던데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 군량으로 모아놓을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이고 보면 어지간해서는 다른 마음을 먹기 쉬웠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기꺼이 조정의 잘못된 결정을 따랐다. 조정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만을 비판할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모면 삼도수군통제사라고 하는 자리도 전쟁 도중 조정에서 급조해 내린 것이다. 당장 회사에서 새로이 자리를 하나 만들고 윗서열에 자신보다 입사도 늦고 진급도 늦은 사람을 앉히면 누가 기꺼이 따르고 싶어 할까? 그러나 당시 원균은 그러한 조정의 결정에 기꺼이 따랐다. 속내야 어찌되었든 뒤로 따로 뭔 짓을 하든 이순신이 부당한 명령을 기꺼이 받들어 따르듯 조정이 부여한 삼도수군통제사라고 하는 권위에 대해서는 복종했다. 그리고 그것은 원균에 비해 아랫서열이던 이순신이 무리없이 삼도 수군의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다시 말해 이순신조차 죽일 수 있었던 바로 그러한 탄탄한 시스템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압도적인 일본군을 상대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멸망에 이르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서조차 최악의 결과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나 할까? 전장의 장수를 두려워해 벌을 줄 것도 주지 못하고, 장수는 그것이 부당하다며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나라였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져 멸망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아주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장 전쟁이 터지자 조선 조정이 한 일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거나 혹은 위협에 노출되었을 지역에 대한 감세였다. 어차피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할 바에야 인심이나 사자는 어찌 보면 얄팍한 속셈이기는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세금부터 올리고 보는 다른 나라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하긴 그 전에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멀어질까 저어하여 일본군의 침략이 침략할 것을 알면서도 전쟁준비의 속도를 조절하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한 마음씀씀이가 있었기에 왕이 도망치고 군대가 무너져 흩어진 상황에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조정에 붙들어 둘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나라여서가 아니다. 백성이어서도 아니다. 그 나라가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한 목숨 바치더라도 나라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나라를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것을 조선은 알았고, 그래서 처음의 어려움에도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끝내 나라를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이 병자호란의 참화를 한 번 더 겪고서도 다시 200년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다.

나라가 강하다는 건 단순히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물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모두 강국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다.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승복할 수 있는 시스템. 그 시스템이 온전히 제대로 돌아갈 때만이 비로소 그 나라는 자신이 가진 바 모든 힘을 한 데 모아 쓸 수 있게 되어 강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인구 150만의 스웨덴이 당시 유럽 최강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을 유린하여 마침내 사실상 해체로 몰아갔던 것처럼. 고작해야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장차 지중해세계를 통일할 수 있게 만든 바로 그것처럼.

이러한  점은 그로부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선진국으로 이끌 것인가.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어디에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그런 나라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심을 알았기에 스스로 위기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것을 잊는 순간 제대로 저항조차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조선에서.

다른 이야기지만 조선이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상대적으로 준비가 소홀했던 것은 당시 조선인의 지리지식이 큰 몫을 했다. 조선인에게 있어 일본은 아주 작은 나라였고, 설사 바다를 건너 군사적인 도발을 하려 해도 1만이나 2만 정도가 고작이라 여기고 있었다. 일본 역시 조선을 자신보다 큰 나라라 잘못 알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조선만 탓할 수는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마 당시 조선의 왕이나 신료들이 일본의 실제 크기나 인구에 대해 알았다면 저리 느긋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전쟁이 일어나고,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 왕성이 있는 한양까지 모조리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이듬해 무려 17만 4천 2백이라... 과연 지금 우리나라라면 어떠할까?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까지 도망치고, 전방의 지역들이 모조리 함락된 상황에서도 저리 버틸 수 있을까? 설마 싶기는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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