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世. 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知經筵弘文館例文館春秋館觀象監事諡文純公諱滉 事錄

 

遺事

 선 생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고 순수하기가 옥과 같았다. 성리의 학문에 뜻을 두어서 젊어서 과거하여 급제로 발신하였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으셨다. 기사사옥에 이기가 선생의 명예를 꺼리어 나라에 아뢰어 관작을 깎아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이기는 다시 아뢰어 벼슬을 회복시켰다. 선생은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더욱 조정에 설 뜻이 없어서 벼슬이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은 그가 세속에 물러남을 가상히 생각하여 여러 번 품계를 올려서 자헌대부까지 이르게 하였다. 예안의 퇴계에 자리 잡고 살면서 퇴계라고 호 하였다. 의식은 겨우 유지하였으나 담백한 생활에 맛을 들여 利에 치우치고 호화로움을 뜬구름처럼 보았다. 만년에는 도산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자연의 흥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부르는 명령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음으로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한탄한 「초현불지탄招賢不至歎」 이란 시제로 가까운 신하를 시켜서 시를 짓게 하고 또 화공을 시켜 선생이 살고 있는 도산을 그려서 바치게 하셨으니 선생을 경모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학문은 의리가 정밀하여 오로지 주자의 교훈을 따랐고 여러 학설의 이동異同도 또한 낱낱이 천착穿鑿했으나 주자학설로ㅅ써 절충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가로이 혼자 있으면서 전분(典墳, 삼황오제의 글을 말하는 것이니 즉, 고전을 뜻함) 이외의 다른 것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때로는 산수를 찾아 소요하면서 성정性情을 읊어 한가로운 흥취를 나타내었다. 학자들이 물으면 자기의 아는 바를 모두 일러주었고 또한 사람들을 모아 스스로 스승인 채 하지 않았다. 평시에도 잘난 체 하지 않아서 조금도 남과 다른바가 없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나 사양하고 받는 경우에도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 남이 무엇을 주어도 의리에 맞는 것이 아니면 끝내 취하지 않았다. 금상께서 처음으로 즉위하니 조정이나 백성들이 모두 올바른 정치를 바랐는데 선비들의 여론은 한결같이 선생이 아니면 임금의 덕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임금의 뜻도 역시 선생에게 촉망했었는데 선생은 세상이 타락하고 쇠하여 선비로서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에도 바른 정치하기에 정성되지 않고 대신들도 또한 학식이 없어 한 가지도 믿을만한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간절히 관작을 사양하여 기필코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다. 도산으로 돌아와서는 한마디도 시정에 관한 것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의 여론은 선생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갑자기 서세逝世하니 그때 연세가 칠십이었다. 조정이나 온 백성이 모두 슬퍼하였고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못내 슬퍼하여 영의정에 추증하시고 국가 일등의 禮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자제 준寯이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 예장禮葬을 사양 하셨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태학의 학생들도 제물을 갖추고 제문을 만들어 내려와서 제사 지냈다. 선생이 비록 별다른 저서는 없으나 폭 넓은 의론으로서 성인의 법도를 발휘하여 현인의 교훈을 찬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중종 말년에 화담 서경덕(徐敬德, 본관은 당성이고 평생을 처사로 일관하였음) 또한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으나 그는 기氣를 리理로 인정하는 論이 많았기에 선생은 그것을 잘못이라 하여 낱낱이 설명하여 밝히니 그 말의 요지가 환히 밝아서 학자들은 깊이 믿었다. 선생은 유학儒學의 유종儒宗이시다. 조정암(본 관은 한양이며 휘는 광조이고 한훤당 김굉필에게 사사하였으며 중종 때에 문과 급제하시고 이상정치의 실천에 노력하였으나 남곤 심정 홍경주의 무고로 중종 14년 2월에 사사되었으나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이고 문묘에 종향되었다) 뒤로는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나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함을 다하기는 또한 정암도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門人 李珥 謹撰 (本貫 德水 號 栗谷 明宗時 文科及第 吏戶禮兵曹 判書 諡號 文成公 文廟從享)


言行總錄

 선 생은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고 신채神彩가 정명하여 어리 때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공경하였으며 필요 없는 희롱을 즐기지 않았고 성장하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도의를 수양하고 총명 정직하며 효제충신孝悌忠信하였으며 온순하고 정수하여 모든 일이 모나지 아니하였다. 기질은 화하면서 굳세고 언사言辭는 유하면서 바르고 학문은 넓으면서도 요령이 있었고 행의行誼는 완전하고 돈독敦篤하여 청고하면서도 격하지 아니하였고 개결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고법古法을 따르면서도 치우치지 않았으며 세상에 처해서는 한편으로 흐르지 아니하니 선생의 사람됨은 아름답다 하기 보다는 쉽게 대성大成할 기틀이었다. 파리한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는듯하였으나 도에 나아가는 뜻은 금석같이 굳어서 재빨리 티끌세상을 벗어나듯하고 그 지조와 수양의 범절이 일상생활에서도 스스로 나타났다. 작록爵祿의 영광을 마치 깊은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두려워하였고 의리와 진리를 탐하기는 입맛에 맞는 고기를 좋아하는듯하여 학문이 이미 성취되었어도 오히려 급급하여 미치지 못한듯하였고 덕행이 수련되었어도 겸겸謙謙하여 아무것도 얻은바 없는듯하였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타고난 자질과 품성이 남다르고 수양이 가득차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가 장차 선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태어난 지 겨우 반년에 부친을 여의고 나이가 아직 십세 미만에 이미 독서를 즐겼으며 비록 부사父師가 있어 힘써 근면치 아니하여도 날마다 삼가 정한 과정을 외우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고 사람을 응대하거나 절하고 꿇어앉음에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니 보는 사람들은 이미 범상한 아이가 아닌 줄 알았다. 점점 장성하면서 논어소학 등의 글을 읽을 때는 더욱 스스로 깨우치며 깨닫고 조심하고 가다듬어 언어동작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애친경장愛親敬長에 더욱 독실하였다.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대를 반드시 단정히 하였고 대부인을 문안할 때면 언성을 부드럽게 하고 기운을 낮추어 얼굴빛을 유순하게 하여 조금도 실례됨이 없었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아 드릴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여 침석을 펴거나 거둘 때도 반드시 몸소 하였으며 한 번도 시중하는 아이들에게 시키지 아니 하였다. 중형과 같이 여러 해 동거하면서도 나이차가 수년위지만 삼가 섬겼고 수숙嫂叔간에 아침저녁으로 대할 때마다 반드시 예로써 공경하고 스스로 겸손하고 피하여 감히 가까이 하기를 항상 조심하였다. 대부인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식들은 부모의 교훈을 받아도 반드시 그대로 시행을 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 아이에게 지도하여 잘 가르친바는 없어도 일찍이 한 번도 갓을 쓰지 않거나 띠를 매지 않거나 다리를 죽 뻗는다든지 비스듬히 눕는다든지 하는 행동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으니 대개 천성이 그러하셨다.  또한 이미 경학을 박통博通했고 아울러 성리학에 관한 모든 서적에 통달하여 이미 성현사업의 대의를 깨달아 마음에 두고 복응服膺한지가 오랜지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처할 때도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서 혹 글을 보고 혹은 종일토록 정숙하고 묵묵하게 지내시며 한담이나 잡설은 하시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며 두려워하였고 비록 평소에 교양이 없는 사람도 선생을 대하게되면 몸을 단정히 하고 스스로 경계하여 감히 방자함이 없었다. 이십 미만에 진사로 성균관에 있을 때 기묘사화(중 종 14년 기묘에 홍경주 심정 남곤 등의 사장파詞章派 훈구파勳舊派 재상이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김정 등 사림파의 신진 사류를 몰아낸 사건인데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하고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힘으로써 이에 훈구파의 불만이 커 가던 중 조광조가 다시 중종반정에 공이 있는 정국공신에 그 자격이 없는 자가 있다하여 남곤 심정 등을 포함한 76명의 공신 호를 박탈하자 훈구파는 마침 홍경주의 딸이 중종이 총애하는 후궁인 것을 기회로 갖은 음모를 써서 조광조가 반대한다고 무고하여 조광조 등 75인의 사류들에게 피해를 입힌 것임) 를 겪은 뒤인지라 선비들의 습속이 날마다 거칠어져 가고 있어서 사람들이 선생의 하는 일을 보고 웃고 업신여겼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처세를 초연이하며 임학林壑에 뜻을 두고 출세하여 이름을 나타내려 하지 아니하였다. 중년에 학문공부에 각고한 탓으로 모습이 파리하고 수척하여 병을 얻었다. 또한 세속과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함을 알고 진사에 선발된 이후에도 영진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서 소요하면서 나물먹고 물 마시는 생활을 즐기시고 장차 이렇게 일생을 마칠 뜻이었으나 집은 가난한데다 어버이는 늙으셔서 힘써 과거에 나아가 현달하는 길에 올랐으나 심중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바는 아니었다. 을사사화(명종 즉위년인 을사에 일어난 사건으로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과 그의 일당인 이기 등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그에 동정적인 유관을 이언적 권계 등 47인의 사류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을 말함) 변란에 빠져들어 갈 뻔하였으나 이미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퇴계에서 자리를 잡고 살면서 세상 삶에는 뜻이 더욱 엷어지고 글을 읽고 도를 구하려는 뜻이 더욱 굳어지고 확고하여졌다. 일찍이 서울에 계실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얻은 것이 있어 이때부터 즐겨 읽음에 문을 닫고 고요히 지내시며 종일토록 꿇어앉아 온 정신과 뜻을 오로지 여기에 두고 부지런히 읽고 탐구함에 참을 알게 되고 실을 얻게 됨을 요령으로 하여 힘쓰시니 그 학설이 돈독함을 믿게 되어 바닥깊이 탐구하는 즐거움은 마치 직접 귀로 듣고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견해가 더욱 정명하고 조예가 날이 더할수록 순고하여 모든 경전에 있는 미사오지(微詞奧旨, 은미한 맛과 깊은 뜻)를 마치 깊은 못에 더듬어 진주를 찾아내는 것 같고 바다에 들어가서 용을 보는 것 같아서 이미 그 아는 바를 바탕으로 하여 더욱 정미함에 이르렀고 미진한 바를 미루어 그 나머지에까지 통달하였다. 뒤섞여 얽힌 곳 까지도 모조리 빗질하고 연구 분석하여 그 궁극을 더듬어 연구하다가 구하여도 얻지 못한 것이 있으면 혹 사람들에게 묻고 남에게 물어 얻어지는 것은 반드시 마음속에 찾아서 옛날에 풀지 못한 것이라도 이제는 다 얼음 녹듯이 환하게 이해하셨다. 염락제서(염洛諸書, 렴은 주돈이가 살던 염계이고 락은 두 정자인 정호 정이가 출생한 낙양인데 전차轉借하여 북송학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북송학자들이 지은 학설을 말함) 에 미치기까지 다시 더 침잠하고 탐구하여 그 속에 넉넉하게 잠겨서 마음으로 증험하고 몸소 체득한 바를 닦고 실행하시었다. 이렇게 하여 당세에 기리고 천거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혹은 서법이 정묘하다거니 혹은 문장이 아름답다느니 혹은 겸손하다느니 혹은 청백하다느니 하였고 그 아는 자도 그저 경전을 밝히고 행의行誼가 훌륭하다는 것에 불과하였다. 나라에서 소명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나아가고 물러감에는 일정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도학을 향한 일편단심은 마치 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 같고 화살이 과녁에 적중한 것과 같고 백번 단련한 쇠와 같이 알차고 성실을 요령으로 하여 정진에 몰두한 공효는 마침내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를 구하는데 이르렀고 다만 한 가지 예능과 한 가지 행의만으로 이름을 이루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일상거처 동정은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고 일어나면 곧 관대를 갖추고 앉을 때는 무릎을 거두고 설 때는 기대서지 아니하고 어깨와 등이 바르며 시첨은 단정하게하고 행보는 조용하게하고 대인對人하여 말씀은 맑고 조심스러웠고 구애됨도 없고 박절함도 없고 교만하지도 않고 태만하지도 않아 수양과 실습이 쌓여 표리가 융화하고 깨끗하였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모든 주선이 화하고 너그러워서 법도에 맞았고 어묵동정語?動靜에 있어서 단정하고 자상하고 조용하고 태연하여 분기를 띤 기미가 말씀에서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비복들에도 나무람과 꾸짖는 말씀을 나타내지 아니하셨다. 음식과 의복 등절에 있어서는 더욱 절약하고 검소해서 사람들은 능히 감내하지 못 할만 해도 태연자약하기가 천성이 그런 것 같았다. 사물을 접하거나 처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는데 자애와 우의로써 하고 집안사람을 거느리는 데는 엄하면서도 은혜스럽게 하셨다. 어른을 섬기는 데에는 자신이 존귀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태만하지 아니하였고 봉제사에는 근력이 쇠퇴하다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종족 간에 처해서는 반드시 돈목하였으며 손님과 벗을 접대하는 데는 한결같이 화순하고 공경하며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 귀한사람이나 천한사람 할 것 없이 다 같이 마땅하게 하였으며 길사나 흉사나 각각 그 정상을 적합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하사품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웃에 나누어주고 스스로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고 궁한 사람들 구휼하기에 후하고 생활은 간소하면서도 몸가짐은 치밀하였다. 위의威儀를 갖추고 동지動止등절에서나 사물을 접하는 데에도 각각 그 마땅한 도리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은 그 감화에 자연히 승복되고 먼데 사람들도 그 덕행을 흠모하였고 어진 사람은 그 도를 즐겼으며 착하지 못한 사람도 그 의리를 두려워하여 어떠한 할 일이 있으면 선생께 반드시 이런 일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라고 자문을 얻은 뒤에야 실행하였으며 이렇게 되니 선생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 退溪先生 이라고만 칭했고 관작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이것은 대개 작위爵位가 선생에게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을 뜻함 이었다. 예의를 갖추고 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선비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많아졌으며 번갈아 질문을 하면 각각 그 실력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조용히 계도하여 순순히 타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한결 같이 이끌고 인도함에 권태를 잊고 심술을 밝혀주고 그 기지를 변화시킴을 위선으로 하셨다. 그 말씀은 곧 성현의 교훈이었고 그 이치는 곧 마음에서 얻어졌고 그 쓰임은 세상만사에 고루 쓰여지는 것이고 체득한 것은 항상 몸에 갖추었으니 그럼으로 종일토록 의논한 바가 공자 맹자 증자 자사 염락여민(염 洛閭민,맹자는 중국의 宋나라시대 지명으로는 산동성인, 추현출신으로 즉 노나라 사람인데 그 이름이 가軻요 자는 자여子輿며 인의와 효제를 바탕으로하여 성선설을 주장하여 공자의 후손인 공급孔伋에게 사사師事하였다고하나 불명이고 양 제 송 등 각국을 돌아다니며 왕도를 설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년에는 노나라인 고향에서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책 맹자가 세상에 전하고 있다. 증자曾子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도학자인데 이름은 참?이요 字는 맹자와 같은 자여子輿이며 공자의 제자인 증점曾點의 아들이다. 공자의 덕행과 학설을 조술하여 공급孔伋에게 전하고 효경을 지었다고 한다. 역시 불명이고 자사子思는 중국 춘추시대 말의 도학자로서 성은 공이요 이름은 급이고 자는 자사인데 공자의 손자로서 증자의 제자이며 성誠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으로 삼아 천인합일설을 주장하였으며 유교의 최대 경전으로 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하나 역시 불명이고, 염락관민의 렴은 周敦이(염溪)가 살았던 곳이고 락洛은 이 정자인 정호程顥 정이程이형제가 출생한 낙양이고여閭는 장재張載인 횡거橫渠가 살던 여중閭中을 말하고 민은 주자인 즉,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출생한 민중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이 둘의 거처 또는 출생지를 세상에서 말하여 왔으나 그를 전차轉借하여 학설 또는 저서를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송나라 유학자들의 학설 저서임) 의 제서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고 그 체득한 것은 무궁하고 말씀은 더욱 친절하였으며 궁리치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실천하고 자기수양을 위하여 홀로 있을때도 삼가 공부를 더욱 확충하였으니 비록 세상에 드러내어 쓰이게 된다면 나라와 천하를 바로 잡는데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로 말미암아 멀리 사는 선비들도 소문을 듣고 일어나서 수백리 길을 발이 부풀어 터저 가면서도 선생에게 이르렀고 벼슬이 높은 귀인에 이르기 까지 또한 다같이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여 학문을 강구하고 몸가짐을 경계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이에 경서의 강의에 있어서 속학자俗學者의 고집과 천반한 것은 참고하고 정정하여 바로 잡았고 계몽에 의심스러운것이 있으면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이동異同에 따라 분류하여 자세히 밝혀서 깊은 속뜻을 다 하였다. 회옹晦翁(호가 회암인 주희)이 몰歿한 뒤로 학문의 지파가 갈라져서 학자들이 그 적실한 전통을 능히 지키지 못하므로 리학理學에는 통론이 있고 학술에는 하나로 통일됨이 있어야 하는데 비록 주자의 전서는 있으나 편질이 너무도 많고 넓어서 독자가 능히 그 취지를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긴요한 어구를 산절하여 성학이 발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명도설에 있어서는 처음에 정지운 (鄭之雲, 본관이 경주이고 호는 추만秋巒인데 논저로 유명한 천명도설이 있음)이 지은바를 바탕으로 주렴계(중국 북송의 유학자인 이름 敦이 인데 자는 무숙茂淑이며 호가 염계이다. 태극도설과 통서를 저술하여 종래의 인생관에 우주관으로 통합하고 거기에 일관하는 원리를 수립하여 송나라 신유학자의 시조가 되었으며 시호는 원공元公) 및 자사의 설을 참고하여 그릇된것을 고치고 결함을 보충하였다. 무릇 인물의 품부와 이기理氣의 화생化生이 환하여 마치 손바닥을 보는듯 하였으며 그 정양하고 동찰한 공효가 그 가운데 깃들어 있다. 이는 다 세속의 오래된 누습을 씻어버리고 성현들이 쌓아온 심오한 이치를 계발하여 후학들의 마음과 눈을 열어준 것이다. 여러 제자들과 문답한 서간문 중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 정精하고 미微하고 굽어지고 ??어지고 실오리처럼 미세한 데까지 진개하여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이해토록 하시었다. 그리고 중국의 도학이 그 전통을 잃어서 진백사(陳白沙, 중국 명나라 유학자로 정좌하여 마음을 가라 앉히고 우주의 理를 몸소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심리학적인 선구자임)의 선회禪會와 왕양명(王陽明, 명나라 유학자. 이름은 수인守仁이고 양명은 호, 절강성 출생으로 육구연陸九淵(號는 象山)의 영향을 받아 심즉리지행합일치양지설心卽理知行合一致良知說을 주장함)의 파벽頗僻의 학설까지 흘러갔으므로 그 잘못된 점을 극언으로 갈론竭論하여 그 뿌리를 뽑아서 잘못을 배척하였고 백사의 시교詩敎와 양명의 전습록(傳習錄,왕수인의 학설을 그 문인들이 모아서 편찬한 책 이름) 을 발췌하여 그 그릇됨을 보여 주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동방東邦에도 도학에 뜻을 두고 학문을 지향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으나, 혹은 상수象數의 학學에 구애拘碍되기도 하고 혹은 이기理氣의 분파에 어두워, 가까운 자는 그 이치가 속은 허하고 겉으로는 입에만 익었고, 먼자는 아득하고 어두운 지경에 마음이 쏠려 혹 백가지 도를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학문만한것이 없다고 생각하는자가 허다하게 많으니, 능히 널리 배우고 살펴서 묻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사도斯道(유학, 즉 성리학)를 찾아 나아가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고 하셨다. 선생은 매양 자나깨나 이를 근심하여 오도吾道의 병폐로 여겼으므로 그 학문은 먼저, 가깝고 작은데서부터 멀고 큰데까지 미쳐서 정조(精粗, 정밀한 것과 거친것) 가 합쳐서 안과 밖이 겸비하고 지와 행이 서로 나아가(지행은 병진을 말하는데 지는 대학의 격물치지와 중용의 박학심문신사명변博學審問愼思明辯의 학을 말하며 행은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과 중용의 독행篤行의 학을 말하는 것으로 지와 행을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이 정주학파이고 지는 곧 행이라하여 지행의 합일을 주장하는것이 육상산 왕양명 진백사계통의 학자들임) 움직임과 쉼이 함께 작용하여 번거로움도 참고 쓴것도 맛들여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실천함에 한시라도 방심하지 아니하였으며 한밤중에 일어나서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심경(주 자의 사숙 문인인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호:서산)가 서경 시경 주역 논어 중용 맹자 대학의 사서삼경과 예기와 같은 유학의 경전과 주렴계의 통서에서 심성에 관한 격언들을 채취하고 그 외에 정이천 범란계 주회암의 잠과 명을 초록하여 편찬한 책) 등의 글을 항상 외워서 스스로 책려하였으나 선생은 이것으로 도를 다했다고 만족하게 생각하지 아니했으며 허심하고 겸손하며 가까운데를 살펴 묻기를 좋아하고 자신에게 결점있는것을 알게되면 버리고 여러 사람의 말 가운데 이로움이 있으면 곧 취하고 사물과 심신이 서로 힘입게하여 피차가 서로 발전하여 자신도 이루어지고 사물도 이루어지는 도를 갖추어지게 하였다. 평생에 글이란 글은 아니 읽은것이 없으나 잡되고 허황하게 부화된 글은 읽지 않았으며 그 어떠한 의치라도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반드시 도덕과 인의에 귀합시켰다. 사람을 가르치는데는 순순히 차례가 있어서 대본대원大本大原(대 본은 중용에서 中也者天下之大本이고 맹자에서 말한 先立乎其大者란 말에서 나온 것이고 대원이란 중국 한나라 유학자인 동중서가 말한 道之大原 出於天에서 나온 말인데 근본 원리를 말함)은 반드시 숨김없이 지적하였다. 대개 학자들이 서로 절실하고 가가운 공부에 급하지 않을 수 없지마는 또한 높고 깊은 도학의 체용(體用, 사물의 본체와 그 활용을 말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외부에 나타나지 않은 근본이 되는것과 외부에 나타나서 활동하게 되는것을 말함) 깊이 살피자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학설은 다 수용에 절실한 것이었으니 비유하건대 많은 군사가 말을 달려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것과 같은 허황한 학설은 아니었다. 만년에 예에 뜻을 두어 유전해온 것을 검토하고 때에 마땅함을 참작하여 학자들을 가르치고 아직 저술하여 책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격물치지설(대 학의 격물치지를 말하는것. 주자는 사람의 영함은 지를 가리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리를 갖추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학문을 한다는것은 천하의 사물에 접하여 어느것이나 그 의미인 리를 따라서 더욱 연구하여 그 극에 이르도록 함에 있다고 해석하는데 격물치지를 간단히 말하면 학문하는 방법중의 하나임) 에 이르러서는 평소에 속된 해설을 배격하고 그 학설을 저술하였는데 마침내 고봉 기명언의 글을 받고 다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전 학설에 착오된 것을 깨닫고 다시 논종하여 답하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늙고 병들은지라. 손수 쓰지 못하고 자제들로 하여금 탈고하도록 하여 일찍이 서로 더불어 논변한 여러곳에 보내도록 하였다. 또 역책(易?,예기 단궁편에 증자가 죽을 때를 당하여 평소에 사용하던 책?: 삿자리를 바꾸었다는데서 나온말로 전차하여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말함)하시기 수일 전에 정정하신 심경주석의 착오된 곳을 동도(東都,경주의 별칭) 에 보내서 판본을 고치게 하셨다. 아! 선생의 학문에 돈독한 일념과 빛나는 단심은 임종할 때 까지 그치지 아니하였음을 또한 여기서 볼 수 있다. 그 도덕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얕음은 나같은 말학으로서는 감히 알지 못할 것이로되 도학 신념의 독실함과 학문을 즐기는 정성은 힘겨워 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권태하지도 않음은 비록 주자의 세대라고해도 적합하리라. 항상 속 마음이 정숙하고 도량이 고상하여 매양 한가한 틈을 타서 아름다운 산수와 그윽하고 절묘한 곳을 찾아 홀로 술병을 끼고 가시기도 하고 혹은 친우와 동반하여 노닐면서 종일토록 시를 읊고 돌아 다니기도하니 다 이런것은 심흉을 활짝 열고 정신을 맑게 씻고 서정을 자양하는 일이니 그저 한가하게 자연속에서 마음을 놓고 구경이나 하는데 비유할 바는 아니다. 시를 읊고 문장을 짓고 서화를 하는 일은 학문을 연구하는 여사로 하였으니 우아하고 세련되어 일찍이 그 명성이 높았다. 만년의 작품은 화려하고 색채나는 문장법을 털어 버리고 날카로운것도 거두고 숨겨서 그저 충담沖澹하고 건실하고 온오蘊奧하고 단정하고 방정하고 치밀하여 마치 두 손으로 잡은데서 나온듯하여 읽는자로 하여금 옥으로 다듬은 거울을 보는듯 하였으며 또한 품위의 두터움과 교양이 심오함을 볼 수 있으니 날이 갈수록 더욱 전진 하였음이 이와 같았다. 만년에 도산에 정사를 짓고 정신을 수양하고 성정을 기르는곳으로 삼았으니 스스로 만족하던 정취는 손수지은 도산기와 잡영雜詠에 갖추어 나타나 있으니 다른 사람으로서는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도산사시음陶山四時吟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어 한가로이 살면서 도를 맛보는 무궁한 즐거움을 읊어서 그 심중을 표현하였으니 장차 이것으로 스스로 늙으리라 하셨다. 그런데 명종 말년과 금산초정今上初政(선조가 즉위한 것을 말함) 부터 국은을 내리심이 심히 중하여 부르심이 이를때 마다 선생은 두려워하여 스스로 몸 둘바를 모르는듯 하였으며 매양 한번씩 소명이 있을때 마다 작위가 올라가게 되는데 간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뜻으로 벼슬받기 난처함을 간곡히 전달하셨다. 조정에서도 그 간곡한 성의를 이해하여 혹은 다른 벼슬로 갈아 주기도 하고 혹은 직책을맡기지 아니하기도 하였으니 결국 그 뜻을 위로하여 반드시 부임해 올것을 바라서였다. 선생은 또한 군신의 의리를 중하게 생각하여 내리신 유지諭旨가 간절하여 서울에 가기는 하여도 한번도 오래 머물러 있지 아니하셨다. 대개 그 일진일퇴와 일거일취一去一就가 저울이 경중을 다는것과 같았고 자로 장단을 재는것과 같아서 저울의 한 눈도 반드시 살펴서 한치 한푼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세속사람들의 얕은 견식으로서는 다 알지 못하고 감히 쉽사리 논평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으로 일찍이 호문정공(胡文定公, 중국 송나라 학자인 胡安國을 말하는데 字는 康侯고 號는 武夷 또는 草居인데 문정은 諡號이며 春秋傳을 지었음) 의 말씀을 들어 사람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가고 말하고 침묵함은 마치 춥고 따뜻하고 굶주리고 배부른것과 같아서 스스로 참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며 남에게 결단을 받을 수도 없고 또한 남이 결단을 내릴바도 못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제왕의 그 격치성정格致誠正의 학문과 징분질욕懲忿窒欲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방법은 혹 면대하여서 혹은 차자箚子를 올려서 혹 도해와 도설로서 기미幾微하고 정밀한 것을 자세히 분석하고 근본을 밝혀서 간절한 정성을 다하여 다시 미진한데가 있지 않도록 하였다. 문소(文昭, 세종이 중국 한나라 2대 황제인 혜제가 그 부황인 고조를 위하여 세운 종묘 이외의 사묘인 原廟를 모방하여 세종의 사친(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봉사하기 위하여 세운 종묘이외의 별묘를 말하는것임)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태조 동향의 위를 정하여 남북으로 소목(昭穆, 종묘에 신위 모시는 차례. 左昭 右穆)의 순서를 정하여 삼대(중국의 상고 때 夏殷周의 삼황조)의 종묘의 위향과 합치되게 하였으나 끝내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인 종을 문소전에 부廟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조신들이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제 명종을 문소전에 부묘하여야 하기 때문에 인종도 함께 부묘토록 공의가 결정 되었으나 문소전의 위치는 태조위가 북에서 남향하고 소목은 동서로 향하게 되어있어 남북은 짧고 동서는 길어서 여기에 인, 명종을 부묘하자면 전이 좁기 때문에 당시의 대신들이 전의 일편을 헐어서 남북을 보건하여 가설해서 부묘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 때 선생이 예전 삼대에 합향하는 위치는 央祖가 동향하고 소목은 남북으로 향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종묘에는 합향하는 절차가 없고 다만 原廟(문소전)에 부향이 있지만 그 위차가 옛 제도와 다르다 하시면서 이번 기회에 太祖位를 동향하고 소목을 남북에 相向하면 묘우를 헐 폐단도 없고 고례에도 합당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백년을 시행하여 오던것을 일시에 변경하는것은 불가하다하여 선생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시행되지 않음) 그 애국우군하는 마음은 비록 한가롭게 사실 때라도 하루도 마음에서 잊어본 바 없었다.매양 조정에서 한가지라도 득정得政을 했다고 하면 즐거운 빛이 말씀에서 나타났다. 만년에는 생각하신 바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임금을 도와 군덕을 기르고근원을 맑게하고 근본을 바로 잡는것이 급선무라하여 매양 당시의 賢사대부를 만나 간곡히 격려하심을 그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이 도의에 대해서는 신명과 같이 공경하고 시귀(蓍龜, 점 칠때 쓰는 가새풀과 거북을 말하는데 尊信에 사용되는 말) 처럼 믿었으며 의리를 중히 여기시기를 밥 먹고 옷 입고 사는것 같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까닭으노 진실로 의리에 맞는 일이라면 비록 사람들의 비방하는 웃음을 받을지라도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불러도 가지 아니하고 벼슬을 주어도 머물러 있지 않음으로 위로 조정의 벼슬아치로부터 밑으로 이름없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고집이 너무 지나치시다는 의혹이 없지 않았으나 선생은 언제나 확고부동하게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오직 의리에만 따를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처신을 세상 사람들은 뜻을 알지 못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 실천하는 바는 고인에게 물어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마치 상서러운 기린이 숲속에 있는것처럼  봉황새가 천 길이나 나는것처럼 밝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듯 넘치는 급류에 돌기둥이 우뚝한 듯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은것처럼 우러러 보았다. 그러나 선생은 오히려 스스로 이르기를 「헛된 이름으로 높은 작위(벼슬)를 취하여 강호(江湖, 은사와 시인 묵객이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자연속에 살고 있는것) 에 처해 있으면서 이름만 조정에 관적을 두고 있는것이 평생에 가장 큰 근심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기만 하면 곧 물러오기를 빌었고 이미 물러와서는 곧 치사할 것을 빌어 진정도하고 혹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 탄핵도 하면서 어느 해라고 그렇게 아니한 때가 없었는데 만년에 와서는 벼슬을 사양하는 예규에 따라 세 번이나 전箋 을 올려서 치사할 것을 간절히 빌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또 병환이 나서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내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고 국장을 사양하며 다만 퇴도만은退陶晩隱이라고만 묘석에 쓰라」고 하셨다. 아! 이것이 선생의 평소에 품은 뜻이었다. 선생의 학문은 배우는 자는 비록 많으나 뜻을 아는자는 드물었고 비록 아는자가 있다해도 진실로 체득한 자는 더욱 적었다. 이러므로 그 미덕을 형용할 이는 없다. 그러나 선생의 글이 갖추어져 있으니 후세에 글을 잘 읽는자가 마땅히 이글을 탐구한다면 또한 선생의 마음을 알것이다. 선생의 출생이 위로 주자의 세대와의 차이가 거의 400년이나 되고 살고있는 지처의 거리가 만리나 되는데도 선생은 오히려 주자의 글을 읽고 그 의리를 구하여 통달하셨으니 만약 후세의 사라들도 선생이 회옹晦翁의 심학을 배우는 마음으로써 선생의 학문을 탐구한다면 그 도학에 이르는것이 멀지는 않으리라. 아! 우리 동방은 치우쳐서 선비의 견문이 극히 국한되어 위로부터 전해줌이 없었고 아래서 이어받는이가 없어서 비록 뜻을 품은자가 있다할지라도 목적한 바에 도달한 자가 드물다. 그 학문의 정대하고 그 의리가 깊고 정밀하고 공부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고 파리播履(몸가짐과 마음가짐)가 굳고 확실하고 깊이 자심하여 발분하고 도를 체득하고 덕을 이룬이를 찾는다면 穆이 소견으로서는 선생 한분 뿐이다. 이제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이었으니 오도吾道를 의탁할 곳이 없구나. 아! 슬프도다. ------門人 趙穆 謹撰(本貫 橫城 號:月川 時宣祖 薦學行始敎官 至 工曹參判 配享 陶山書院)


墓碣銘


生而大癡   壯而多疾    생이대치  장이다질

中何嗜學   晩何도爵    중하기학  만하도작

學求猶邈   爵辭愈영    학구유막  작사유영

進行之겁   退藏之貞    진행지겁  퇴장지정

深慙國恩   亶畏聖言    심참국은  단외성언

有山억억   有水源源    유산억억  유수원원

婆娑初服   脫略衆산    파사초복  탈략중산

我懷伊阻   我佩誰玩    아회이조  아패수완

我思古人   實獲我心    아사고인  실획아심

寧知來世   不獲今兮    영지내세  불획금혜

憂中有樂   樂中有憂    우중유락  락중유우

乘化歸盡   復何求兮    승화귀진  부하구혜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네.

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으며, 만년에 어이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을 구할수록 더욱더 멀어지고, 벼슬은 싫다 해도 더욱더 주어지네.

나아가면 넘어지고 물러나 굳이 감추니,

나라 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도다.

높고 높은 산이 있고 흐르고 흐르는 물이 있어,

평복을 갈아입고 뭇 비방 떨쳐 버렸네.

내 생각 제 모르니 내 즐김 뉘 즐길까?

옛 사람 생각하니 내 마음 쏠리도다.

뒷사람 오늘 일을 어찌 알아주지 못할 건가?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조화를 타고 돌아가노라, 또 바랄 것이 무엇이랴?   <이상은 역>

                                             

선 조 3년 봄에 퇴계선생의 연세가 70이라. 두 번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를 원하였으나 허락지 않음으로 이해 가을에 또 간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셨다. 이 해 12월 8일 신축에 선생이 돌아가심에 상감께서 부고를 들어시고 크게 슬퍼하셔서 영의정을 증직하시고 영의정의 장례로서 장사할 것을 명하셨다. 멀고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선생의 부고를 듣고 슬퍼하고 아깝게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어서 서로 다투어 조문 하였다. 그 이듬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 건지산 남쪽 등에 장례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요, 휘는 황이요 자는 경호인데, 일찍이 퇴계에 복거하였으므로 스스로 호를 퇴계라고 하셨고 그 후에 도산서당을 짓고 또 호를 도수陶搜(註:수搜는 손수변이 없는 글자임: 늙은이 수)라고도 하셨다. 그의 선조는 진보이씨 인데 6세조 석이 현리로서 사마시에 합격되고 밀직사의 증직을 받았다. 그 자제는 자수인데 판전의시사로서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의 봉작을 받고 안동 주촌에 옮겨 사셨다. 증조의 휘는 정이신데 선산도호부사로 증직이 판서요 예안현 온계리에 옮겨 사셨으며 배위는 정부인 김씨이다. 아버지의 휘는 식이신데 성균진사로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의 증직을 받았고 배위는 의성김씨와 춘천박씨 이신데 각기 정경부인의 증직을 받으셨다. 선생이 나신 후 한돌이 못되어서 부친을 여의시고 숙부 송재공께 수학하셨고 장성하셔서는 뜻을 세워 글 읽기에 더욱더 힘을 쓰시었다. 중종 23년에 무자에 진사가 되셨고 갑오년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셨다가 다시 박사가 되셨고 또 성균관전적 호조좌랑으로 옮기셨다. 정유년 겨울에 모친상을 당해서 3년 상을 마치신 후에 다시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형조정랑 홍문관부교리 교리를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을 겸하였고 다시 사인 사헌부장령 성균관사예에 전직 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을 겸직하였다. 휴가를 얻어서 성묘하시고 다음해 갑진년 봄에 홍문관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을 제수했다가 다시 홍문관응교 전한으로 옮겼는데 병환으로 사면하시고 사옹원정이 되셨다가 다시 전한에 복직하셨다. 이때 이기가선생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계청하였다가 얼마 안가서 삭탈하지 말 것을 계청하였고 그 후 사복시정을 받으셨다. 병오년 봄에 휴가를 얻어서 장인의 장례를 치르시고 병환으로 체임하셨고 정미년 가을에 응교로 부름을 받으시고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였으며 무신년 정월에 단양군수로 출사하였다가 풍기군수로 바꿨으며 을유년 겨울에 병으로 사임서를 제출하시고 바로 돌아오신 까닭으로 벼슬 두 계급의 강등 처분을 받으셨다. 임자년 여름에 교리로서 부름을 받으시고 조정에 도달함에 사헌부 집의를 제수하였다가 부응교로 바꾸었으며 다시 성균관 대사성에 승진 되어서는 병으로 사임하셨고 다시 대사성 형조참의 병조참의가 되셨으나 모두 병으로 사임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셨다. 을묘년 봄에 해직을 고하시고 동으로 돌아오던 중에 첨지중추와 홍문관부제학에 잇달아 부름을 받으셨으나 모두 병환으로 사임하셨다. 무오년 가을에 상소하여 벼슬을 면하려하셨으나 상감의 비답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도성에 들어가서 사은하셨다. 대사성을 배수하고 얼마 안 되어 공조참판을 배수함에 여러 번 사양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휴가를 얻고 향리에 돌아와서 면직할 것을 세 번 청하시니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을축년 여름에 간곡한 장계를 올려 관직을 벗었으나 그해 겨울에 다시 동지중추에 제수되는 특별한 부름을 받으시고 병인년 정월에 병환을 무릅쓰고 상경하시는 도중에 장계를 올려서 해직하여 몸의 자유로움을 원했으나 도중에서 공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제수되심에 한사코 사임하시고 집에 돌아와서 대죄하시니 지중추부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정묘년 봄에 나라에서 장차 조사詔使의 소명이 있음으로 6월에 입성하시니 때 마침 명종이 승하시고 선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셨는데 예조판서에 제수되시어 사면코져 하셨으나 허락지 아니함으로 병으로 사면하시고 곧 향리로 돌아 오셨는데 10월에 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교서로서 부임할 것을 재촉 하였으나 소를 올려 한사코 사양하셨다. 무진년 정월에 의정부우찬성을 제수함에 또 소를 갖추어 배수치 못할 뜻을 극력 전개하였으나 또 교서를 내리어 속히 부임할 것을 독촉함으로 장계를 올려서 간곡하게 사양하시니 고쳐 판중추부사를 제수하셨다. 7월 달에 대궐에 나아가서 사례하시고 6조소를 올리며 또 성학십도를 바치었다.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을 제수하니 극력 사양하시고 배수치 않으셨다. 기사년 3월에 차자를 올려 귀향하기를 연달아서 네 번이나 청함으로 상감께서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대면하여 위로하면서 역마를 차출하여 호송시켰다. 이 달에 선생이 집에 돌아와서 장계를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걸원乞願하셨다. 일찍이 선생이 병환에 계실 때 자제 준寯에게 훈계하시기를 내가 죽으면 해조該曹에서 반드시 예장禮葬을 청할 터이니 너는 유명遺命이라고 하여 소를 올려 고사하고 또 비석을 쓰지 말며 다만 작은 돌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退陶晩隱眞城李公 이라 하고 약간의 세계世系와 행실을 후면에 서술하되 가례家禮에 표준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런 일을 만약 남들에게 부탁한다면 서로 잘 아는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가 실제에 없는 일을 늘어놓아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게 할 것임으로 평소에 내 일찍이 스스로 지은 명문銘文이 마치지 못한 채 난고亂藁  중에 감추어 두었으니 찾아서 쓰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준이 이러한 유계遺戒를 받은 까닭에 두 번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해서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으므로 묘도의 표석만 유명대로 그 명문을 새겨 세웠다. 오호라 선생의 높으신 덕망과 큰 업적은 우리 동방의 우두머리임은 이미 당세의 사람들은 또한 아는 바이나 후세의 학자들이 선생의 언론과 저작을 보게 되면 반드시 느끼고 깨달을 점이 있을 것이며 명문 가운데 서술이 더욱 그 오묘한 뜻을 상상할 것이다.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선생의 권장하고 격려하신 덕을 힘입어 성취되었으니 그 은혜가 부모 친지와 같을 뿐만 아니었으나 이제는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어 진 듯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가만히 유계의 말씀을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 없으나 묘 앞에 새겨 세워 후세에 알리는 일은 또한 그 사적을 숨기지 못함으로 대개를 기록하고 명사를 쓴다. 선생은 어려서도 단정하고 장성하여서는 더욱 질서가 있었으며 함양의 공부가 깊었고 중년 이후부터는 명예와 지위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학문 강구에 전념하여 맑고 미묘하고 쌓고 뛰어남을 사람들이 감히 헤아려 측량하지 못하였다. 겸허비손謙虛卑遜하여 아무것도 가진바 없는듯하나 날로 향상 발전하여 출처 거취에 있어서 시국을 참작하고 의리를 헤아려서 힘써 내 마음의 편함을 구하여 마침내 굴함이 없었다. 선생의 언론과 저서가 골고루 밝고 의젓하여 수연히 한결같이 정대하여 孔, 孟, 程, 朱의 말씀과 합하지 않음이 없으니 천지간에 두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심이 없을 것이니 아아 ! 지대 하시도다. 선생께서 두 번 장가 가셨는데 처음은 김해 허씨 진사 찬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고 후취는 안동권씨 봉사 질의 따님이신데 모두 정경부인의 증직을 받으셨다. 자제 寯은 봉화현감이요, 寀는 조세하였다. 손자는 셋인데 安道는 신유년에 생원이 되었고 다음은 純道 詠道요, 손녀는 사인 박려에게 출가하였고 측실자는 寂이다.   --------後學 通政大夫 工曹參議知製敎 高峯 奇大升 謹撰 成均生員 琴輔 謹書(先生自銘 高峯 奇大升 敍其後)


傳敎

전교(국왕께서 내리신 교서) 동년 초삼일(정조 16년 3월)

전 교에 가로되 「정학을 높이려면 마땅히 선현을 높여야 한다. 이즈음 사학邪學에 점점 물들어 가는 곳이 많은데 오직 교남嶠南 사람들만은 선정의 바른 학문을 지키는데 흔들리지도 아니하고 물들지도 아니하였다. 이러함으로 내가 선정을 추모하는 마음이 많아져 이로 인하여 서원에 치제할 것을 명하노니 선정의 자손 되는 자는 물론이요, 인근 고을 인사들도 많이 참여하라. 그리고 이 글제를 주니 가지고 가서 계시해 시험에 응하도록 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 열어 보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각 신이 이 교서를 받들고 와서 치제하고 그 이튿날 서원 앞 강 건너편에서 과거를 보임에 교서와 제문을 새겨 전교당에 걸고 또 고적을 비롯하여 특히 볼 만한 것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는 교시에 따라 월천 조공이 소중히 간직하였던 사문수간師門手簡(선생과 문인간의 서찰) 팔 첩을 받들어 올리니 친히 발문을 지어 붙이고 겸하여 칠서七書(시경 서경 역경의 삼경과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의 새 책을 하사하여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였다.


퇴계와 그 제자들(‘퇴계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

                             영남대학교 교수·한국교육사 전공 丁淳睦

<상서尙書>에 “글 가르치는 사람은 만나기 쉬우나,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한퇴지(韓退之:愈)는 그의 <사설師說>에서 “옛 학자들은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 함은 道를 전하고 業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퇴 계와 그의 제자들은 서로 진리와 인간 속에 만남으로써 민족사에 하나의 거대한 ‘정신산맥’을 형성하였으며, 제자들은 스승을 통해서 삶의 확고한 신념을 가질수 있었다. 그래서 퇴계와 그 제자들은 그들의 정신적‘만남’속에서 비약적인 성숙을 이루었으며, 16세기를 ‘퇴계의 시대’로 꽃피운 것이다.

 <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기록된 퇴계의 제자는 310여명에 이른다. 전통적인 교육형식에서 스승과 제자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직접 급문及門하여 배움을 청하는 것이 대표적인 형식이지만, 다만 서한으로 문목問目을 하거나 사후에까지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스승으로 받들 수도 있다. 이를 사숙제자私淑弟子라고 한다. 그러나 한번 맺은 사생師生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이는 일시적인 이해나 편법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군사부일체시대에 스승을 저버리는 일[背師]은 강상綱常의 죄에 버금가는 도덕적 파탄행위였다.

 퇴계는 스승을 자처하지 않고 제자들을 벗과 같이 대하였으며, 아무리 젊은 사람일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하였다. 그의 인격과 학문이 깊고 넓어질수록 그를 따르고자 하는 무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동서의 파당을 초월하였다.


- 기라성 같은 퇴계의 제자들 -

 <도산급문제현록>에 실린 310여명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문인을 가려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여섯 분을 선정하여 퇴계와의 관련아래서 퇴계와 제자들의 만남을 약술하고자 한다.

 퇴 계退溪와 고봉기대승 高峯奇大升과의 나이 차이는 26세, 거의 한 세대 간이나 된다. 그는 32세에 문과에 올라, 그해 10월(명종12년:1558)에 때마침 상경하여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58세의 퇴계와 만나게 된다. 이로부터 퇴계가 돌아가기까지 12년에 걸친 두 사람의 ‘사귐’이 비롯된다. 비록 고봉은 퇴계에게 ‘속수의 예(束脩之禮)’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고봉은 평생 동안 퇴계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그의 은혜를 “마치 부모나 천지의 은혜와 같다”고 하였으며, 퇴계 역시 고봉을 “영발한 기상과 동량과 같은 재주를 갖춤으로써 동방의 절학絶學을 밝힐 수 있는 사람”으로 기대하였고, 새로 동극한 선조의 물음에 기대승이 통유通儒라고 자신있게 추천하면서 조정을 물러났다. 퇴계는 고봉을 외우畏友며 지기知己라고 하였다.

 퇴 계와 고봉은 불과 네 차례의 짧은 상면을 가졌을 뿐이다. 그래서 고봉은 늘 “평생 앙모하는 마음을 풀지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산과 광주를 수없이 오고간 서한을 통하여 곡진한 인정과 넓고 깊은 사상을 교환할 수 있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퇴계와 고봉의 ‘4.7논변’은 논쟁이 계속되면 될수록 차츰 발전되어 그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격으로 점철되었다. 후세에 이들의 만남을 ‘정자와 장횡거’ ‘주자와 이연평’의 만남과 비유하기도 하였다.

 퇴계의 생전·사후를 두고 가장 많은 친자(親炙, 가까이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일) 나 공헌을 한 이는 월천조목月川趙穆이다. 따라서 그가 수많은 문인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尙德詞에 퇴계의 종향從享이 된 것 역시 여러모로 당연하다. 퇴계의 제자 가운데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월천을 제외하면, 가령 서애·학봉·한강 등 위차 문제가 복잡하다.

 월천은 퇴계 재세 시에 역동서원 건설에 앞장섰고, 퇴계 사후에는 퇴계가 돌아간 뒤 도산 향사에 참례하여 천연대에 올라 시 한 구를 읊으니 모두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님 가신 빈 산골에 새는 슬피 울고

벽라 언덕에 소나무와 계수나무는 서로 의지하건만

가울 하는 구름은 원래 무정타더니

조용히 천연대를 바라보노니 늦 노을만 퍼지네


 월천은 스승에게서 받은 편지를 엮어 <사문수간師門手簡>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명종 5년(1550)부터 퇴계가 고종考終한 선조 3년(1570)까지 20년간 보낸 109통(별지 2매는 따로 계산) 의 편지가 모아져 있다. 한 사람의 제자를 위하여 이만한 분량의 편지를 내려준 스승의 사랑과, 그 스승의 글월을 한편도 빠짐없이 장첩粧帖하여 살았을 때는 앙모의 정신적 거울로서, 사후에는 귀중한 문화재로서 후세에 물려준 제자의 정성은 우리 정신사에 빛나는 성사盛事라고 할 것이다.

 도산서원 및 문집간행에 성력을 다하였다. 이것은 마치 공자 사후에 장로長老문인이던 증자가 흩어지는 공자교단을 수습하고 선사先師의 유업을 계승한 일과 방불하다.

 월천이 퇴계의 문하에 든 것은 15세 때로서 24세의 연령 차이였다. 퇴계는 이대성(李大成:이름은 文樑, 농암 선생의 아들)에게 조 아무개(이름은 大春)가 아름다운 아들을 두었다고 크게 칭도하였다. 성장하면서 더욱 발분하였고, 퇴계가 상경하였을 때는 글월로, 도산에 내려와 있을 때는 백운동서원에 기거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학파의 문호 연 서애와 학봉

21 세 되던 해에 형님인 겸암 유운룡과 함께 퇴계를 계상에서 배알한 서애유성룡 西厓 柳成龍은 그 후 여러 달을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다. 퇴계는 서애를 보자, “이 아이는 하늘이 낳은 인재이니 뒷날에 반드시 대유大儒가 되리라”하였다. 이때 학봉 김성일이 “우리들은 선생의 문하에 든지 오래되건만 한마디 장허?許의 말씀이 없었는데, 이제 공은 선생께서 하늘이 낳은 바라 하셨으니, 공은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는가?” 하고는 “서애는 나의 사표師表로다”하였다.

 28 세에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간 서애는 태학생 수 백명에게 말하기를,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에 선학禪學의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명나라 학사 오경吳京의 전송을 받고 옥하관에 이르렀을 때, 서애는 퇴계의 <성학십도>를 내보였다. 46세에 <퇴계선생문집>편찬에 참여하였고, 59세에 퇴계의 손자 안도가 초한 것을 기초로<퇴계선생연보>를 지었다.

 서애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구국의 대 재상이었고 일세의 대학자였다. 그는 퇴계의 학통을 올바르게 이어받아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으며, 퇴계학파의 일대 문호를 열었다.

 학 봉김성일 鶴峯 金誠一은 19세에 퇴계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다음해 여름과 가을에 걸쳐 아우 남악 김복일과 함께 도산에서 <서경><역학계몽>을 수강하였고, 겨울에는 운암 김명일과 함께 <대학><심경>을 질의하였으며, 24~25세 무렵에도 장기간 수학하였다.

 27 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찬에만 힘쓸 각오를 하였으나, 퇴계는 “부형이 계신데 혼자 독단으로 작정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 뒤로도 틈 있는 대로 스승을 찾고 청문한 일이 많았다. 34세 때에는 대교待敎로서 사국史局에 비치된 퇴계에 관한 <당후일기堂後日記>를 등사하여 뒷날 <퇴계연보>편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몸소 <선생실기先生實記>를 지었다.

 퇴 계 사후인 38세 때의 가을, 도산에 이르러 오죽梧竹이 뜰에 가득한 것을 보고 <도산의 뜰에는 오죽이 가득한데 달밤에 배회하니 슬픈 눈물이 끝없이 솟네>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46세에 <성학십도>와 <계산집록>을 간행하는 한편, 다음해는 <주자서절요> <자성록>을 간행하였고, <퇴계선생문집>의 편집교정 작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학봉은 <퇴계언행록>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고제高弟였고, 학문과 인격이 당대의 사표가 되었음은 물론, 스승의 학풍을 이어받아 동문인 서애와 함께 퇴계학파의 일대 문호를 열었다.


‘율곡학파’형성에도 기여해

 한강정구 寒岡 鄭逑는 퇴계와 남명의 두 문하를 출입하였다. 한강은 두 스승의 장점을 고르게 물려받아 경(敬=퇴계)과 의(義=남명)를 조화롭게 협지挾持할 수 있었다.

 한 강이 퇴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알한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이때 퇴계는 이미 조야가 태두泰斗같이 추앙하던 63세의 노대가로서 기고봉과 ‘4·7논변’을 전개하는 중이었고, 경신년(1560)에는 도산서당이 낙성되어 본격적으로 강학 연찬생활을 펼칠 때였다.

 청년학자와 원로기숙元老耆宿간의 첫 대면은 그 해의 어느 봄날이었다. 이때 한강은 ‘교육의 방법’을 듣고 비로소 지난날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교육의 목적’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이에 더욱 힘써서 학문의 발전이 날로 확충되었다.

 퇴계와의 첫 대면이 있고 나서 두해 뒤에 한강은 퇴계에게 <심경>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몸소 선생에게 왕래하지는 아니하였으나 그 뒤로도 계속하여 편지로 질문하기를 끊이지 않았다.

 한 강은 65세 되던 해 정월, 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동문 선배인 황준량의 묘에 제사 지내고, 다시 예안의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 들러서 은사 퇴계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급문한지 실로 44년만의 일이었다. 동학同學의 장로였던 월천의 묘를 비롯하여, 충재 권발·학봉·서애 등 동문사우同門師友의 무덤을 차례로 찾아 재문으로 조사하였다. 그의 안동 도임 길은 사우에 대한 마지막 추념의 여정이었고, 백수를 날리는 그에게는 회구의 정을 더욱 간절히 하는 길이었다.

 한 강은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도 심원한 경지에 이른 학자인 동시에 퇴계와 여러모로 흡사한 점이 많았다고 평가되는데, 그 첫째는 혼란한 시대를 당하여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한 것이고, 둘째는 궁경窮經저술이 고금에 박통하였다는 점, 셋째는 동서의 분당에 초연한 자세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의 학통은 실학의 연원이 되고 있다.

 율 곡이이 栗谷 李珥는 23세 때 계상溪上으로 퇴계를 배알하고 3일간을 묵으면서 학문을 질정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이대 남긴 시로 퇴계의 <이수재숙헌견방계상李秀才叔獻見訪溪上>의 7언 1절과 <이수재견방계상우류삼일李秀才見訪溪上雨留三日>의 7언 1절 7율 1수, <증이숙헌>의 7언 2절, 5언 1수(모두 8수)가 있고, 율곡의 ,봉차奉次 퇴계선생 기시운寄示韻> 7언 2절이 그의 <쇄언?言>에 실려있다.

 그 의 <상上퇴계선생>의 ‘별지’와 <문목> 5편이 <율곡전집>에 실려 있고, 퇴계의 <답이숙헌>은 <퇴계문집> 및 <속집>에 모두 7편이 실려 있다. 퇴계가 돌아가자 율곡은 <곡哭퇴계선생>이라는 만사輓詞를 지었으며 흰 띠를 하고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의 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과 같고, 용과 범이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 소자, 일찍이 배움을 잃고서 하릴없이 방황할 때, 마치 저 사나운 말이 가로 뛰며 가시 밭 길이 무성할 때 나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신 것은 실로 선생께서 열어주심이었습니다.


 율 곡은 경연에서 퇴계의 문묘종사를 극력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시호를 내릴 때도 적극 힘썼다. 그러나 퇴계 사후에 율곡은 기고봉의 사칠론四七論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여 스승의 학설과 갈라졌으나, 역시 좋은 발전이라 하겠다.

 퇴 계와 율곡의 이 같은 사제의 정리가 동서 당쟁의 와중에서 첨예하게 대립된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일종의 정치무상이고 퇴·율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는 일이다. 율곡의 문하에서는 사계 김장생·중봉 조헌·수몽 정엽 등 많은 학자와 정치가가 배출되어, 뒷날 우리나라 양대 학파중 하나인 ‘율곡학파’라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였다.


사학 아카데미즘의 연원

 퇴 계가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것은 57세 때인데, 서당을 짓는데 2년이 걸린 것은 당시의 재력이 미처 뒤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퇴계의 문인인 성재 금난수 惺齋 琴蘭秀는 다음과 같은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를 남겼는데, 당시의 퇴계와 서당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정 사년(1557)에 선생께서 도산 남쪽에 서당 터를 잡으시고, 마침내 서당을 이곳으로 옮기시고자 하였다. 중 법련에게 그 일을 맡아보라고 청하였는데, 준공이 되기 전 무오년(1558) 7월에 선생께서 나라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가시면서 집의 청사진 한 부를 벽오 이문량에게 주면서 법련에게 시키는 대로 일을 마무리 짓게 하였다.

 법 련이 죽고 난 뒤 정일이란 중이 계속 일을 맡아 영건하였다. 경신년(1560)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서당이 준공되었는데, 당堂은 모두 3칸이었다. 헌軒은 암서巖栖요, 재齋는 완락玩樂인데 합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 편액 하였다.

 서 당의 서쪽에 정사精舍 8칸을 지었는데, 헌은 관란觀瀾이고 요寮는 지숙止宿이니 ‘농운정사朧雲精舍’라 이름 하였다. 당을 꼭 정남방향으로 한 까닭은 행례行禮에 편하고자 함이고, 재를 꼭 서쪽으로 한 까닭은 원포園圃를 마주하여 그윽한 운치를 숭상함이다. 그밖에 방실房室·주장(廚裝, 곳간)· 문호門戶는 각기 뜻한 바가 있다. 걸어놓은 편액은 모두 선생의 필적인데, <경재잠敬齋箴> <백록동규白鹿洞規> <명당실기名堂室記> 들을 벽 위에 걸었다. 이로부터 ‘도옹陶翁’이라는 다른 호를 쓰셨다.

 방 가운데 서북쪽 벽에 서가를 만들고 서면西面은 격장을 두어서 반은 침실로 남겨 두었다. 내가 “서가를 잠자리 방밑에 두지 않는 까닭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이곳은 내가 잠자고 기거하는 곳으로 성현의 경훈經訓을 등 뒤에 두는 것이 온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하였다. 이 가운데 고서 천여 권을 좌우로 서가에 나누어 꽂았으며, 화분 한 개 연갑硯匣 하나 지팡이 한 개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두었다.

 남 벽南壁 상면에는 가로로 시렁을 걸어 옷상자와 서류를 넣는 부담상자를 두었고 이 밖의 다른 물건은 없었다. 서가에 비치한 서적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어지럽지 않았으며 매년 7월이면 책을 볕에 말렸는데, 계상 본댁에 소장한 책과 번갈아 교대하여 왕래했으므로 시기가 다소 많이 걸리거나 짧아지기도 하였다. 내가 두 곳을 출입하여 책 목록대장을 정리하여 보니 모두 합하여 1천7백여 권이었다.

 모시고 있을 때, 선생께서 참고하실 곳이 혹 있을 것 같으면 “몇째 시렁, 몇째 줄, 몇째 권을 빼내어 오라”고 명하셨는데, 빼 놓고 살펴보면 한 치의 착오도 없었으니 선생의 정신역량을 알 수 있는 일단이다.(후략)

 서 원이나 서당교육은 교사를 자의로 선택한다. 따라서 스승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학생에게 있었다. 도산서당이나 구계서원에 모인 문도는 가까운 고을의 청년학자는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 ‘천리부급千里負?’한 준재들이었다. 퇴계의 교육방법은 교재중심이 아니라 주재중심이었고, 강의형식이 아니라 토론형식이었다. 퇴계는 <심경>과 <계몽>을 특강하였으나 오히려 수시수처에서 경험진달을 통한 계발방식을 즐겨하였으며 대화교육이 특색이었다.


수업은 대화식으로 이루어져

 퇴계의 제자 가운데 평민출신이 한사람 있었는데, 배순(裵純, 또는 裵漸) 이라는 대장장이였다. 퇴계가 풍기군수 시절, 소수서원을 중창하고 그곳에 자주 나가 강講을 할 때 이 대장장이 배점은 하루도 거르는 일없이 뜰에서 청강을 하였다. 그 뒤 퇴계가 돌아가자 이 평민학도는 퇴계를 위하여 심상 3년의 제자례弟子禮를 하였으며, 퇴계의 철상을 조각하여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다. 지금 순흥에 있는 <배점>에는 그의 여각閭閣이 남아있다.

 계 급사회에서 양반만이 학문을 독점하였다는 얘기는 그들이 학문할 수 있는 경제력을 독점하였다는 말과 같다. 퇴계교실은 학문하는 분위기의 구심점이었고, 배순의 경우는 민초民草들도 도덕성과 학문지향성을 함께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좋은 예이다. 퇴계와 제자들의 사제애師弟愛는 이 시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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