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남학파의 발전

16세기에 형성된 영남학파의 중심은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이다.
조식은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지내면서, 영남지방 남부의 합천 산청 등지에서 학문 탐구에 전념하였다. 그가 평생토록 힘쓴 것은 경의사상(敬義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적 실천론이었다.
영남의 북부 예안에서 태어난 이황은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갔었다.
그 러나 49세에 고향에 내려온 이래로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독서와 궁리에 힘쓰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황이 평생 힘을 쓴 것은 거경(居敬)의 심학(心學)이었다. 조식과 이황의 다른 공로는 수많은 제자를 통해 후대에 심오한 학문을 전수한 일이다. 조식은 136명의 문인와 162명의 사숙(私淑) 제자를 배출하였고, 이황은 320여명의 문도를 양성하였다.
16세기 후반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영남지방의 사상과 문화는 두 사람의 후학들이 주도하였다.
영 남의 남부에는 오건(吳健, 산청), 정인홍(鄭仁弘, 합천) 등 조식의 문도들이, 영남의 북부에는 조목(趙穆, 예안), 김성일(金誠一, 안동), 유성룡(柳成龍, 안동) 등 이황의 제자가 학문을 주도하였다. 두 사람의 문하에서 모두 배운 정구(鄭逑, 성주)의 문인들은 성주, 선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그 제자 허목(許穆, 경기)을 통하여 근기(서울, 경기) 지방의 학자들에게도 영남의 학풍이 전수되었다.

영남 유학의 특성을 요약하면,
첫째 영남유학의 바탕에는 재야(在野的) 성향(性向)이 있었다. 은둔의 길을 택한 길재 이후로 영남 유학의 주류는 재야의 토양에서 성숙하였다. 영남에는 가정의 서숙이나 동리의 서당이 많았고, 다른 지방에 비하여 서원이 월등히 많았다. 사학적 전통이 갖는 자발적 건강성 위에 영남 유학은 성장하였던 것이다.

둘째, 영남 유학자들은 자기 실천을 중시하였다.
부도덕 한 권력에 맞서는 비판적 절의정신은 조선 초기 사림파 이래의 전통이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만인소는 영남의 선비들의 비판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서는 의병 활동이 왕성하였다.

셋째, 영남 유학은 이단에 대한 비판정신이 투철하였다.
특 히 퇴계학파는 주자학 이외의 철학은 물론이고, 주자학파 내부의 다른 이론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성을 지녔다. 18세기 이래 현실 지향의 철학으로 대두된 실학적 경향은 물론 서학에 대한 호의적 관심은 근년에 이르기까지 영남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2) 영남학파의 문화적 전통

[영남의 선비들은 학문을 존중하고, 학자를 존경하였다.]

높은 벼슬을 하기 보다는, 깊은 학문에 전념하기를 더욱 좋아 하였다.
이 와 관련된 것이 가학(家學)의 오랜 전통이다. 김숙자·김종직 부자의 학문 전수 이래로, 손중돈·이언적의 외숙질 전수, 유성룡·유진·유원지의 삼대에 걸친 학문 전수, 이현일·이재의 부자 전수, 이재·이상정·유치명의 외조손 전수 등이 대표적이다.

문중에서의 학문적 성숙은 이 지역 유가 문화의 실제적 밑거름이었다. 영남의 선비들은 학술문자를 소중히 여겼고, 학술 문화가 담긴 서책을 아꼈다. 특히 조상의 수택이 남은 책이나, 명현의 수적이 담긴 책은 가보로 삼아 소중히 보존하였다. 이 지역은 지금도 고문헌의 보고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영남지방에는 서원문화(書院文化)가 발달하였다.
서원은 선비들의 강학 장소로서 향중의 풍속을 진작시키는 구심체가 되었고, 고을 선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가에 전달하는 집단적 여론 수렴 장소가 되었다.
서원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서당이 많았던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 지역 학자들은 서당이나 문중에서 가학을 통하여 학문을 익히고 장성한 뒤에는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영남지방은 문중 간의 동족의식(同族意識)이 견고하였다.
집성촌이 많았고, 동족 간의 내부 결속이 공고하였다.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동족 간의 긴밀한 연대의식은 영남의 유교문화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었다.

[영남사람들은 도의(道義)와 염치(廉恥)를 매우 존중하였다.]

영남지방에서 명망있는 가문은 벼슬을 잘한 집안이 아니었다.
학문적 업적을 남긴 학자를 배출한 문한가(文翰家)이거나,충신열사 또는 효자열부 같은 조행(操行)을 남긴 조상을 모신 가문이라야 대우를 받았다.
예컨대 17세기 에 봉화지방에 정착한 홍우정 가문, 법전의 강흡 가문,
영양의 정영방 가문 등은 다른 문중에 비하여 입향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라는 국치를 당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절의를 지킨 가문이라는 점에서,각기 지역사회의 유망 가문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도의와 염치를 숭상하는 기풍은 국난의 시기에는 몸을 던진 의병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임 난 초기에 영남 지역의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이들 가운데, 조식의 제자들이 매우 많았다. 국권을 유린 당한 한말에, 의병의 초기 활동은 유가 출신 인사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는 한일 합방 뒤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목숨을 바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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